교회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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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6
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남유다 최고의 선한 왕 요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몬의 악행을 복구하는데 큰 역할을 한 두 명의 측근들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사반이라는 서기관이고 다른 한 명은 대제사장 힐기야입니다.
아몬이 세운 여러 이방우상들을 훼파하고 그가 훼손한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는데 헌신했던 서기관 사반과 대제사장 힐기야는 요시야와 함께 하나님께서 남유다의 회복을 위해 사용하신 인물들이었습니다.
특히 사반과 힐기야가 예루살렘 성전 복구 중에 모세오경을 발견한 것은 본격적인 남유다의 회개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숙청되었고 유배되고 감금되었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복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3대 절기가 회복되었고 율법의 규정대로 예배하고 우상들은 철폐되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과 바알제사장들은 쫓겨나고 억압되었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이제는 사회지도층과 부유층이되어 돈과 명예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모세오경의 규정에 따라 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머리 좋고 똑똑한 서기관들은 오늘날 법조인들처럼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저버렸습니다.
율법의 규례를 제대로 지킨다는 명목하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엄격한 종교적 잣대를 들이대고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뒤로는 재물을 쌓았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부자들과 고관들의 편에 서서 가난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들을 버렸습니다.
스바냐, 미가, 나훔 같은 선지자들은 이러한 남유다의 거짓된 신앙을 통렬히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남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왕이 되자 남유다의 거짓신앙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여호야김이 친이집트 반바벨론 정책을 내세우며 이것이 마치 애국심인 것처럼 포장하자 남유다는 극렬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뜻과 다르면 폭력을 휘두르며 인권을 유린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이에 동조하여 과격파 정부를 지지하였습니다.
요시야 왕과 함께 신앙회복을 주도하였던 대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입만 다물어도 대제사장의 아들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남유다의 죄악을 드러내고 회개치 않으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요시야 왕때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미가를 죽이려던 제사장들을 요시야 왕이 그나마 막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시대는 폭력이 난무하는 무도의 시대였습니다.
선지자 우리야가 남유다의 회개를 촉구하자 여호야김은 그를 이집트까지 가서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왕의 폭력에 대해 일절 입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으로 여호야김 왕에게 반역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감금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요시야 왕과 대제사장 힐기야와 함께 종교개혁의 축을 감당했던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구출해주었습니다.
지금 2025년의 대한민국은 예레미야의 시대처럼 혼돈관 혼란의 시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건만 오히려 혼돈의 중심에 서있는 역대급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을 구속시켰다고 법원을 습격하는데 주축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반대하는 정당에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서 위헌적이고 폭력적인 계엄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정치선동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예레미야 시대의 과격분자들로 만들었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자신들에게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례에 따라 예배드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들은 절대로 옳다고 믿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고 매일 예배를 드리고 예배 때마다 헌금을 하는데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므로 법을 어겨도 되고 폭력도 허용되고 인권도 소용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이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정권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를 고소한 자들은 제사장들과 율법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폭력과 거짓 증언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 로마황제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고 시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종교적 행위를 섬기는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교회 건물을 높게 크게 세우느라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행태는 중세시대 타락한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종교적 행위를 충족시켰으니 세상에서 마음껏 속이고 뺏고 사기치고 거짓말해도 된다고 믿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레미야는 결국 말씀을 전하다가 과격분자들에 의해 죽임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원대로 행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이 곳에 모여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위해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죽기위해 이 곳에 모였습니다.
잘 살기 위해가 아니라 잘 죽기위해 모인 것입니다.
의미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죽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살리셨듯이 내게 주어진 삶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살려고 예수를 죽여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을 살리기위해 죽어야 합니다.
죽기전까지 최선을 다해 고통받는 자, 어려운 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 소외 당한 자, 억울한 자, 포기한 자, 더러운 자들에게 베풀고 사랑하고 함께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교회는 많은 고난을 앞두고 있습니다.
순탄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사명이 있는 한 그 사명만 감당하면 됩니다.
부한 자, 힘 있는 자들에게 빌 붙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면 됩니다. 아멘.
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남유다 최고의 선한 왕 요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몬의 악행을 복구하는데 큰 역할을 한 두 명의 측근들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사반이라는 서기관이고 다른 한 명은 대제사장 힐기야입니다.
아몬이 세운 여러 이방우상들을 훼파하고 그가 훼손한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는데 헌신했던 서기관 사반과 대제사장 힐기야는 요시야와 함께 하나님께서 남유다의 회복을 위해 사용하신 인물들이었습니다.
특히 사반과 힐기야가 예루살렘 성전 복구 중에 모세오경을 발견한 것은 본격적인 남유다의 회개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숙청되었고 유배되고 감금되었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복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3대 절기가 회복되었고 율법의 규정대로 예배하고 우상들은 철폐되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과 바알제사장들은 쫓겨나고 억압되었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이제는 사회지도층과 부유층이되어 돈과 명예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모세오경의 규정에 따라 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머리 좋고 똑똑한 서기관들은 오늘날 법조인들처럼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저버렸습니다.
율법의 규례를 제대로 지킨다는 명목하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엄격한 종교적 잣대를 들이대고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뒤로는 재물을 쌓았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부자들과 고관들의 편에 서서 가난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들을 버렸습니다.
스바냐, 미가, 나훔 같은 선지자들은 이러한 남유다의 거짓된 신앙을 통렬히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남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왕이 되자 남유다의 거짓신앙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여호야김이 친이집트 반바벨론 정책을 내세우며 이것이 마치 애국심인 것처럼 포장하자 남유다는 극렬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뜻과 다르면 폭력을 휘두르며 인권을 유린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이에 동조하여 과격파 정부를 지지하였습니다.
요시야 왕과 함께 신앙회복을 주도하였던 대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입만 다물어도 대제사장의 아들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남유다의 죄악을 드러내고 회개치 않으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요시야 왕때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미가를 죽이려던 제사장들을 요시야 왕이 그나마 막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시대는 폭력이 난무하는 무도의 시대였습니다.
선지자 우리야가 남유다의 회개를 촉구하자 여호야김은 그를 이집트까지 가서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왕의 폭력에 대해 일절 입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으로 여호야김 왕에게 반역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감금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요시야 왕과 대제사장 힐기야와 함께 종교개혁의 축을 감당했던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구출해주었습니다.
지금 2025년의 대한민국은 예레미야의 시대처럼 혼돈관 혼란의 시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건만 오히려 혼돈의 중심에 서있는 역대급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을 구속시켰다고 법원을 습격하는데 주축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반대하는 정당에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서 위헌적이고 폭력적인 계엄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정치선동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예레미야 시대의 과격분자들로 만들었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자신들에게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례에 따라 예배드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들은 절대로 옳다고 믿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고 매일 예배를 드리고 예배 때마다 헌금을 하는데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므로 법을 어겨도 되고 폭력도 허용되고 인권도 소용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이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정권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를 고소한 자들은 제사장들과 율법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폭력과 거짓 증언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 로마황제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고 시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종교적 행위를 섬기는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교회 건물을 높게 크게 세우느라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행태는 중세시대 타락한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종교적 행위를 충족시켰으니 세상에서 마음껏 속이고 뺏고 사기치고 거짓말해도 된다고 믿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레미야는 결국 말씀을 전하다가 과격분자들에 의해 죽임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원대로 행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이 곳에 모여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위해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죽기위해 이 곳에 모였습니다.
잘 살기 위해가 아니라 잘 죽기위해 모인 것입니다.
의미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죽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살리셨듯이 내게 주어진 삶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살려고 예수를 죽여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을 살리기위해 죽어야 합니다.
죽기전까지 최선을 다해 고통받는 자, 어려운 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 소외 당한 자, 억울한 자, 포기한 자, 더러운 자들에게 베풀고 사랑하고 함께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교회는 많은 고난을 앞두고 있습니다.
순탄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사명이 있는 한 그 사명만 감당하면 됩니다.
부한 자, 힘 있는 자들에게 빌 붙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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