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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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30:22-27
22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능숙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 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23 온 회중이 다시 칠 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 일을 즐겁게 지켰더라
24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으며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도 많았더라
25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
26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
히스기야는 209년 만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유월절 제사를 복원하였습니다.
22절에 칠 일 동안 화목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구약의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입니다.
번제와 소제는 일상적인 예배에 해당합니다.
번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예배입니다.
그 의미는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제물 전부를 불태웁니다.
번제를 통해 예배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껍질을 깨부순 곡식을 바침으로 진정한 회개를 뜻합니다.
소제의 예물 중 예배 때 하나님께 드리고 난 나머지는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지파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도록 물질적 지원을 하나님께서 마련케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헌금 중 일부가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사례비 몫으로 지급되는 것이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제는 자신도 모른 체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힙니다.
속건제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회개와 보상을 위한 제사입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과 동시에 피해자에게 20% 할증된 금액의 보상을 해야 합니다.
번제와 소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예배이며 속죄제와 속건제는 인간이 죄를 하나도 안 지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로하면 이 또한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입니다.
그에 반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화목제는 의무가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자원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번제나 소제, 속죄제와 속건제는 빼도박도 못하고 무조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의무가 아니라 자원입니다.
그리고 드리는 방식도 다른 제사들과 많이 다릅니다.
레위기 3장에 보면 화목제의 방법이 나옵니다.
흠없는 짐승을 잡아 내장과 기름과 피를 하나님께 태워드리고 고기는 제사장과 백성들이 24시간 안에 다 먹어야 합니다.
다른 제사들은 제물을 온전히 다 태워버리거나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에게만 주게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제물의 살코기를 하루가 지나기 전에 모두 먹어치워야 하는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소 한마리를 제사장 몇 사람과 한 가족이 하루 내에 다 먹어 치우기는 불가능합니다.
그 다음날까지 제물의 모든 살코기를 먹여치우려면 어쩔 수 없이 이웃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 25-26절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화목제는 예배를 넘어 축제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5대 제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알아야 합니다.
번제는 나의 모든 것을 불태운다는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 성결을 뜻합니다.
소제는 완전한 헌신을 뜻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회개와 보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나눔과 기쁨을 뜻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렇게 성결과 헌신, 회개와 보상, 그리고 나눔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빵과 떡을 불 태울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완전한 제물이 되셨고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구약의 5대 제사의 형식은 없어도 되지만 그 안의 근본 의미들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성결과 헌신, 회개와 보상, 그리고 나눔의 기쁨이 있어야 제대로 된 예배이며 말씀에 근거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에배를 통해서 더욱 거룩해지고 윤리와 도덕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헌신과 결단의 끈을 다시 꽉 조여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철저히 회개하고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의 보상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감사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이웃들과 감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한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있다가 은혜받고 집으로 가는 반복적인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 봐야 합니다.
예배를 본다고 표현하는데 보기만 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찬양단 찬양하는 것 보고 목사님 설교하는 것 보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성결과 헌신, 회개와 보상, 나눔의 기쁨을 가져야 하며 이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번제는 한 주 동안 죄로 오염된 생각을 말씀으로 씻어내고 성결케 됨으로
소제는 찬양과 청소, 운전, 식사 준비 등의 봉사활동에 참여함으로
속죄제와 속건제는 보다 높은 윤리 도덕적 향상과 성장을 이룸으로
그리고 화목제는 함께 감사와 기쁨과 음식과 물품을 나눔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상 열거한 예배의 요소들은 단지 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예배는 나의 전부를 바친다는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며 보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예배는 너무나 수동적입니다.
5부 6부가 있는 대형교회의 예배는 마치 극장에서 영화 한 프로 보고 온 느낌입니다.
길지 않는 예배 후 잠시 기도라도 할라치면 다음 예배 때문에 모두 자리를 비워달라는 통에 귀 빠진 날 예식장 온 느낌마저 듭니다.
같이 예배 드린 옆 사람과 반갑다고 인사는 해도 예배가 끝나면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남이 됩니다.
이는 분명히 성경이 말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멉니다.
특히 오늘 날 교회들이 가장 부족한 부분은 나눔의 기쁨인 것 같습니다.
구약의 5대 제사 중 화목제가 오늘날 가장 미흡한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화목제는 백성들 가운데 기쁨을 넘어 하늘의 처소에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24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으며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도 많았더라
이 때 당시 남유다의 인구를 최소 60만 명으로 잡는 것이 대부분 고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60만명이 대략 2만 마리의 소와 양을 하루만에 먹었으니 양 한 마리의 살코기를 대략 30kg로 잡으면 30명당 한마리니까, 한 명이 그 날 하루 약 1kg의 고기를 섭취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 명이 하루에 1kg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살코기를 먹는다는 것은 연중행사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일년에 한 번 고기를 배급받는데 김일성 생일이라고 합니다.
그마저도 전달과정에서의 부정부패로 가장 낮은 계급들은 맛도 못본다고 합니다.
더구나 고대 사회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일이었습니다.
극소수의 상위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하층민들에게 살코기란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고대사회 다수의 하층민들에게서 고기 섭취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이 만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화목제를 통해 가장 낮은 하층민들에게도 일년에 최소 세 번은 살코기를 섭취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산업의 근간인 최하층민들이 적어도 일년에 세 번 고기를 섭취함으로 건강을 증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국가생산력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일년에 3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만큼은 상하빈구남녀노소 모두가 고기를 맛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화목제를 통해 실현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가만히 앉아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듣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날만큼은 모두가 함께 배불리 먹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두신 화목제의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더욱 성경적인 얘베가 되려면 우리나 너무나 간과했던 화목제에 대해서 바로 알고 화목제의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2대 사역은 복음전파와 구제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도 이 두 가지 사역은 여전히 필수적인 의무입니다.
화목제는 제사물을 이웃들과 나눈다는 의미에서 구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확장하면 성도의 교제로 볼 수 있습니다.
예배가 가만히 앉아서 보는 것이라는 수동적인 개념을 깨고 성경적인 의미를 살려야 합니다.
말씀으로 성결케되고 헌신과 결단고 회개와 보상이 적극적으로 실현되며 모두가 함께 감사와 음식을 나누는 살아 숨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진정한 감사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서 더 많은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거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목제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습관적 반복적인 예배의 매너리즘을 깨부숩시다.
말씀으로 돌아가 진정한 예배, 화목제가 다시 드려지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를 회복합시다. 아멘.
22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능숙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 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23 온 회중이 다시 칠 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 일을 즐겁게 지켰더라
24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으며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도 많았더라
25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
26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
히스기야는 209년 만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유월절 제사를 복원하였습니다.
22절에 칠 일 동안 화목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구약의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입니다.
번제와 소제는 일상적인 예배에 해당합니다.
번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예배입니다.
그 의미는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제물 전부를 불태웁니다.
번제를 통해 예배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껍질을 깨부순 곡식을 바침으로 진정한 회개를 뜻합니다.
소제의 예물 중 예배 때 하나님께 드리고 난 나머지는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지파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도록 물질적 지원을 하나님께서 마련케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헌금 중 일부가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사례비 몫으로 지급되는 것이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제는 자신도 모른 체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힙니다.
속건제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회개와 보상을 위한 제사입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과 동시에 피해자에게 20% 할증된 금액의 보상을 해야 합니다.
번제와 소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예배이며 속죄제와 속건제는 인간이 죄를 하나도 안 지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로하면 이 또한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입니다.
그에 반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화목제는 의무가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자원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번제나 소제, 속죄제와 속건제는 빼도박도 못하고 무조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의무가 아니라 자원입니다.
그리고 드리는 방식도 다른 제사들과 많이 다릅니다.
레위기 3장에 보면 화목제의 방법이 나옵니다.
흠없는 짐승을 잡아 내장과 기름과 피를 하나님께 태워드리고 고기는 제사장과 백성들이 24시간 안에 다 먹어야 합니다.
다른 제사들은 제물을 온전히 다 태워버리거나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에게만 주게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제물의 살코기를 하루가 지나기 전에 모두 먹어치워야 하는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소 한마리를 제사장 몇 사람과 한 가족이 하루 내에 다 먹어 치우기는 불가능합니다.
그 다음날까지 제물의 모든 살코기를 먹여치우려면 어쩔 수 없이 이웃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 25-26절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화목제는 예배를 넘어 축제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5대 제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알아야 합니다.
번제는 나의 모든 것을 불태운다는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 성결을 뜻합니다.
소제는 완전한 헌신을 뜻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회개와 보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나눔과 기쁨을 뜻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렇게 성결과 헌신, 회개와 보상, 그리고 나눔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빵과 떡을 불 태울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완전한 제물이 되셨고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구약의 5대 제사의 형식은 없어도 되지만 그 안의 근본 의미들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성결과 헌신, 회개와 보상, 그리고 나눔의 기쁨이 있어야 제대로 된 예배이며 말씀에 근거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에배를 통해서 더욱 거룩해지고 윤리와 도덕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헌신과 결단의 끈을 다시 꽉 조여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철저히 회개하고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의 보상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감사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이웃들과 감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한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있다가 은혜받고 집으로 가는 반복적인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 봐야 합니다.
예배를 본다고 표현하는데 보기만 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찬양단 찬양하는 것 보고 목사님 설교하는 것 보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성결과 헌신, 회개와 보상, 나눔의 기쁨을 가져야 하며 이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번제는 한 주 동안 죄로 오염된 생각을 말씀으로 씻어내고 성결케 됨으로
소제는 찬양과 청소, 운전, 식사 준비 등의 봉사활동에 참여함으로
속죄제와 속건제는 보다 높은 윤리 도덕적 향상과 성장을 이룸으로
그리고 화목제는 함께 감사와 기쁨과 음식과 물품을 나눔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상 열거한 예배의 요소들은 단지 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예배는 나의 전부를 바친다는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며 보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예배는 너무나 수동적입니다.
5부 6부가 있는 대형교회의 예배는 마치 극장에서 영화 한 프로 보고 온 느낌입니다.
길지 않는 예배 후 잠시 기도라도 할라치면 다음 예배 때문에 모두 자리를 비워달라는 통에 귀 빠진 날 예식장 온 느낌마저 듭니다.
같이 예배 드린 옆 사람과 반갑다고 인사는 해도 예배가 끝나면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남이 됩니다.
이는 분명히 성경이 말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멉니다.
특히 오늘 날 교회들이 가장 부족한 부분은 나눔의 기쁨인 것 같습니다.
구약의 5대 제사 중 화목제가 오늘날 가장 미흡한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화목제는 백성들 가운데 기쁨을 넘어 하늘의 처소에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24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으며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도 많았더라
이 때 당시 남유다의 인구를 최소 60만 명으로 잡는 것이 대부분 고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60만명이 대략 2만 마리의 소와 양을 하루만에 먹었으니 양 한 마리의 살코기를 대략 30kg로 잡으면 30명당 한마리니까, 한 명이 그 날 하루 약 1kg의 고기를 섭취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 명이 하루에 1kg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살코기를 먹는다는 것은 연중행사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일년에 한 번 고기를 배급받는데 김일성 생일이라고 합니다.
그마저도 전달과정에서의 부정부패로 가장 낮은 계급들은 맛도 못본다고 합니다.
더구나 고대 사회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일이었습니다.
극소수의 상위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하층민들에게 살코기란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고대사회 다수의 하층민들에게서 고기 섭취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이 만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화목제를 통해 가장 낮은 하층민들에게도 일년에 최소 세 번은 살코기를 섭취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산업의 근간인 최하층민들이 적어도 일년에 세 번 고기를 섭취함으로 건강을 증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국가생산력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일년에 3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만큼은 상하빈구남녀노소 모두가 고기를 맛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화목제를 통해 실현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가만히 앉아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듣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날만큼은 모두가 함께 배불리 먹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두신 화목제의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더욱 성경적인 얘베가 되려면 우리나 너무나 간과했던 화목제에 대해서 바로 알고 화목제의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2대 사역은 복음전파와 구제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도 이 두 가지 사역은 여전히 필수적인 의무입니다.
화목제는 제사물을 이웃들과 나눈다는 의미에서 구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확장하면 성도의 교제로 볼 수 있습니다.
예배가 가만히 앉아서 보는 것이라는 수동적인 개념을 깨고 성경적인 의미를 살려야 합니다.
말씀으로 성결케되고 헌신과 결단고 회개와 보상이 적극적으로 실현되며 모두가 함께 감사와 음식을 나누는 살아 숨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진정한 감사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서 더 많은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거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목제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습관적 반복적인 예배의 매너리즘을 깨부숩시다.
말씀으로 돌아가 진정한 예배, 화목제가 다시 드려지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를 회복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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