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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과 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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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순복
댓글 0건 조회 1,269회 작성일 23-10-2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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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3:1-3
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2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앞으로 열왕기상하를 읽으면서 가장 유의하게 살펴봐야 할 점은 산당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바알이나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가 산당이었습니다.

주로 푸르고 키 큰 나무 아래 세워졌는데 산당의식은 매우 타락하고 부도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과 함께 우상의 신전들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민 33:52).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장소에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 거기서만 예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로인해 블레셋과 아람을 비롯한 여러 이웃족속들과의 전쟁과 다툼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웃족속들에 의해 시달리느라 성전을 짓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궤는 이리저리 옮겨졌습니다.

그러는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영향을 받아 산당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방족속의 우상숭배의식과 혼합되어 버렸습니다.

산당의 예배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예배의 본질을 놓쳐버리고 개인적인 복을 비는 구복과 이러한 사람들의 숫자를 늘려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모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에 법궤를 가져오고 이를 위해 성전을 건축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그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때 성전이 지어진 후에도 과거의 전통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의 산당 예배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이는 곧 우상 숭배로 이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후에 아사(대하 14:2-5), 여호사밧(대하 17:5-6), 히스기야와 같이 여호와를 섬기는 신실한 왕들은 산당들을 훼파하였으나(대하 31:1) 여로보암(왕상 12:26-31), 여호람(대하 21:9, 11), 아하스(대하 28:24-25), 므낫세(왕하 21:1, 3)와 같이 악한 왕들은 반대로 산당을 재건하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으며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이유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을 막고 곳곳에 산당을 지어 거기서 예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배를 집도하는 제사장 직분은 오직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주어졌는데 북이스라엘은 아무나 자원하면 제사장이 되어 산당예배를 집도하게하는 악습을 저질렀습니다.

이로인해 남유다보다 136년 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성군(聖君) 요시야는 산당을 제거하는 종교개혁(왕하 22:8-20)을 단행하였으나 그의 죽음으로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까지 다시금 우상 숭배가 성행하게 되었고 기원전 586년에 바벨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앞으로 열왕기상하를 읽으면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에 대해 알아볼터인데 각 왕들의 평가에 산당이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22: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오늘날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 근처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어찌보면 산당 예배가 다시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오늘날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오와 연합된 우리가 성전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된 우리가 교회이며 예수님은 머리이시며 우리는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예베를 드리든 장소에 상관없이 우리가 가는 곳이 교회이며 성전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예배를 드리든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또 하나의 산당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모든 지역 교회들이 어디서 예배를 드리든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를 드려야 예수님과 연합된 진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하고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예수님과 연합된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기위해, 병 고침을 위해, 능력을 얻기위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기위해 예배를 드린다면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산당예배가 되고 맙니다.

지금 우리가 모인 이 곳은 성전인지 산당인지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렸습니다.

같은 장소에 모였어도 성전예배의 마음이 있고 산당예배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으로 내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성전예배입니다.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솔로몬이 예배를 드린 장소에 대해서 열왕기상 본문은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한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복과 영달을 구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구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9절에서 '듣는 마음' 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제목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당에서 예배드린 솔로몬이었지만 그의 기도제목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물질적이지 않고 오직 어려운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제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도제목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도제목을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기도제목을 정해줍니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의해 기도제목이 정해집니다.

일찌기 솔로몬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윗의 다른 아들들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받고 위협받아왔습니다.

왕인 다윗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호의호식하면서 평안하게 자랐을 것이라 착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 뿐만 아니라 넷째 아들 아도니야를 비롯한 왕궁의 여러 세력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도 여러번 처했습니다.

이러한 위협과 고초들로 인해 솔로몬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솔로몬은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을 발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살 길임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가 아닌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 하는 속절없는 인생의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에 비슷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한결 더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지만 이미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듣는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넓은 마음'도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4:29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세상에는 머리 좋고 지식과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공부 많이하고 지식은 많아도 정작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공감하는'공감 능력' 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를 패쓰하고 의사가 되었어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공감저능아'들이 우리 사회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좁아 터진 마음이라면 그의 지식과 능력은 사회에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됩니다.

솔로몬이 '듣는 마음' 이 없어서 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듣는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듣는 마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듣는 마음'을 지혜라고 부르시면서 돈보다도 더 귀한 가치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듣는 마음'입니다.

오직 자신의 욕구와 문제에만 온통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소리는 듣지 못하면 어린 아이인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자신의 고통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잘 들을 수 있다면 어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시더라도 어린 아이에게 주시면 화가 되며 어른에게 주어져야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복보다 더 귀한 것은 '듣는 마음'입니다.

'듣는 마음'은 마음 먹은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배운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받는 고통과 억울하고 분통한 쓰라린 상황에서 견디고 또 견디다보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도 고통받고 있지만 나처럼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을 깨닫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말 없이 담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비로소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는 나의 고통이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구원이며 '듣는 마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성격이 사납고 못된 사람들이 성공하면 성공할 수록 더 교만해지고 추악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큰 병에 걸리거나 큰 실패와 아픔을 겪으면 더욱 악해질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착해지는 현상을 드물게 봅니다.

물론 예수님을 전혀 안 믿는 자들은 대부분 나락으로 빠지지만 고통 중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 더욱 착해지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도 바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로마 시민권자이여 베냐민지파 가말리엘 학파의 엘리트로서 예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사흘 동안 눈이 먼 다음부터는 사람이 확 바뀌었습니다.

'듣는 마음'을 드디어 갖게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고난과 고통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 아닙니다.

물론 고난과 고통 그 자체로 끝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을 통해 나 중심의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는 마음을 얻게 될 때 고난과 고통은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본문 이 후에 나오는 두 창기가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신의 아기라고 우기는 재판이 나옵니다.

아기를 죽여 반으로 나누라는 솔로몬의 판결에 깜짝 놀라 내 아이가 아니니 저 여자에게 주라는 여인이 친모임을 밝히는 놀라운 지혜의 판결이었습니다.

그러나 판결의 지혜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창기들이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에게 직접 상소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대통령이나 대법원 판사를 직접 만날 수 있겠습니까?

천대받는 창기의 목소리일지라도 마음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던 솔로몬의 '듣는 마음'이 판결의 지혜보다 더 놀라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는 고난과 고통이 자신의 잘못에 비해 너무 크고 억울할지라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듣는 마음'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편한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같이 머리 좋은 사람도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겨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축복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통해 '듣는 마음' 과 '넓은 마음'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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