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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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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순복
댓글 0건 조회 1,753회 작성일 23-08-0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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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8:1-5
1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2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3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4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6절에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웠다는 구절을 통해 압살롬의 군대가 다윗이 피신한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까지 쳐들어 온 것을 짐작하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던 다윗도 압살롬의 군대가 코 앞까지 쳐들어 오니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정비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보다 숫적으로 훨씬 많았으므로 불리한 쪽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압살롬의 안위였습니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치다가 그의 자랑인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압의 부하들은 압살롬을 살리라는 다윗의 명령 때문에 어찌하지 못했지만 요압은 상수리나무에 달린 압살롬을 보자마자 찔러 죽였습니다.

요압 입장에서 압살롬은 맺힌 것이 많았습니다.

압살롬이 형 암논을 죽이고 아말렉에 유배되었을 때 다윗을 설득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온 압살롬에게 큰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만나기위해 요압의 밭에 불을 놓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요압은 이 때부터 압살롬을 보복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더러 압살롬을 죽여 반란의 싹을 뽑겠다는 심산에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압살롬이 죽자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요압은 승전소식을 다윗에게 전해야 하는데 자신이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사실을 알리기가 껄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다음과 같이 꼼수를 쓰게 됩니다. 

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다윗과 다윗의 친구 후새 사이의 연락책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발이 빠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도 아히마아스를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습니다.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그런데 요압은 아히마아스를 보내려 하지 않고 구스 사람을 대신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구스 사람은 오늘날 이디오피아 사람으로서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승전보를 전달하는 경우 아히마아스 같은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담당합니다.

그리고 전황이 불리하거나 답보 상태일 때는 구스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구스 사람을 보내어 다윗과 백성들을 먼저 불안초조하게 한 뒤 승전의 소식을 전하면 긴장이 확 풀리면서 승리의 기쁨이 증폭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압살롬의 죽음을 알리면 승리에 도취된 백성들의 분위기에 묻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아히마아스가 지름길로 가서 구스 사람보다 먼저 도착해버린 것입니다.

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다윗은 승전의 소식에 기뻐하고 아히마아스를 칭찬하는 대신 압살롬의 안부를 먼저 물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당황했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전쟁의 승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질문은 원수 압살롬의 안부였습니다.

아히마아스는 너무나 당황하여 압살롬의 죽음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20절에서 요압을 통해 압살롬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멀리서 달려오던 아히마아스를 보고 다윗은 압살롬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온 구스 사람을 통해 그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구스 사람을 이용하여 다윗의 충격을 완화하려하였던 요압의 계획은 틀어지고 오히려 다윗의 충격은 배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알면서도 무참히 압살롬을 죽였던 천하의 모략꾼 요압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쟁의 승리에 모든 관심을 두었던 아히마아스는 정작 다윗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헛고생만 하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요압과 아히마아스의 관계는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것을 알면서도 이용하려드는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혼 사람의 마음을 모른 채 자신의 뜻과 이상을 실현하려고 헛고생을 하는 사람들로 교회는 가득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마음과 실제 하나님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오히려 해가 되는 사람을 불타는 가슴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위해 99마리의 양을 뒤로하는 목자의 마음을 성경을 읽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물질 중심적이고 효율과 합리에 편향되어 있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깨닫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평가는 똑똑하고 잘나가고 모범적인 99명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안되고 해가 되는 한 명의 말썽꾼을 사랑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교회에 맡겨주신 한 명의 말썽꾼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비뚤어진 부성애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큰 아들처럼 압살롬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다윗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나아서 잘나서 거룩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봐도 이해할 수 없을 뿐아니라 나 자신이 봐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으니 오직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이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을 가지려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용서받아야 합니다.

요즘 잘못된 구원관과 죄론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의 죄의 댓가인 죽음을 소멸시키셨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만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함받으니 죄지어도 괜찮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2:10-11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다윗은 충성된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죽인 죄로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용서해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저지른 죄의 책임을 분명히 예고하셨고 오늘 압살롬의 사건을 통해 명백히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지른 죄는 그로 인해 얻은 쾌락과 이익보다 몇 갑절 더 큰 고통과 손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성경은 명백히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야무야 모르는 척하시거나 아예 신경쓰지 않으실 것이라는 큰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한 두번 작은 죄를 지어봐도 별 문제가 없으니 이 착각은 완전히 진리로 자리를 잡게 되고 맙니다.

사무엘하 12:10에 말하였듯 모든 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무신경'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순간 죄는 바로 우리에게 파고 듭니다.

우리의 육신의 한계로 인해 24시간 365일 하나님께 집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죄를 짓고 죄가 습관이 되어버리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잡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인가는 신경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데만 모든 신경을 쏟습니다.

세상은 죄가 들킨 사람과 아직 들키지 않는 사람 이 두 부류로 나눕니다.

아직 들키지 않은 사람들은 들킨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고 조금만 신경쓴다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을 수 있습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나의 음욕과 물욕과 거짓과 교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 하나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용서받는 것에 집중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 나는 용서받았다는 말을 무한 반복하여 자기자신을 쇄뇌시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아 내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내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게 부과하신 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용서에 집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의 원인을 압살롬 개인의 일탈이 아닌 우리아를 죽였던 자신의 죄의 댓가로 받아들였습니다.

피난길에 시므이의 잔인한 인신공격에도 시므이를 처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매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을 등돌린 이스라엘 장로들을 벌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탓했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대놓고 거역한 요압을 벌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해코지를 하고,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과 싸우려고 하고, 싸우기에는 힘에 부치는 상대면 자신 보다 더 약한 상대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에 집중하는 사람은 내게 닥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들고 싸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간 무시하고 모욕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갚으시는구나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생기는 부정적인 사건들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원인을 찾지말고 내 죄를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으로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과 싸우기 전에 나 자신과 먼저 싸우다보면 하나님께서 놀랍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요즘엔 잘못된 착각으로인해 자신의 죄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더 이상 죄책감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무책임한 사상이 퍼져있습니다.

자신이 전에 지은 죄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셨으니 더 이상 따지지말라는 적반하장의 태도가 마치 구원론인냥 착각하고 있습니다.

진정 용서받은 사람은 지나간 죄를 다시 끄집어내어도 화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묻지마 칼부림 사건들처럼 자신의 죄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무작위 범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생기는 부정적인 일들에 대해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부터 이해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나를 해코지 하려는 사람을 무조건 가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오늘 공격해온 압살롬에 세 편대를 짜 대응했던 다윗처럼 최소한의 방어 또한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생략한 채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응징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하나님께 무신경한 사람입니다.

나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부당한 수욕과 모욕일지라도 참을 수 있는데까지 참고 피할 수 있는데 까지 피한 후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반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에 집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지켜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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