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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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2-16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갖은 고생 끝에 호르산을 넘어 세렛 골짜기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평화롭게 주신 '브엘'의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는 모압평야가 시작되었습니다.
여지껏 거칠고 험한 산과 골짜기와의 싸움이었다면 평야에 당도하니 그 곳에 거주하던 이방 족속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아모리 족속을 물리치고 그 다음 바산왕 옥과 그의 백성들을 쳤습니다.
이런 두 번의 승리를 통해 모압 평야에 거주하던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압 평야의 최대 종족은 당연히 모압 족속들이었으며 당시 모압의 왕은 십볼의 아들 발락이었습니다.
발락은 어떻게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아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사신들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유명한 예언자 발람에게 보냈습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에돔 족속과 모압 족속은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과의 평화로운 공존 대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싸우려고 하지 않지만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바라는 것은 우리의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지는 안되 그들과 동화되어 섞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하는 분명한 영적 윤리적 도덕적 육체적 선을 지킴으로 세상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결코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더 희생하고 선하며 인자하며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700 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길을 온 발락의 사신들은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2:9-18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들이니이다 이르기를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모압 귀족들이 일어나 발락에게로 가서 전하되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여기까지 보면 발람은 비록 이방신을 숭배하는 영매였지만 나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발람의 정신은 이미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패배하였음을 보게됩니다.
22: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높여 크고 존귀하게 해준다는 발락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한 번 더 물어본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한 번 더 물어본다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바꾸실리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간 발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후 발람은 모압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충성된 나귀가 세 번이나 가던 길을 멈추고 결국에는 나귀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제사를 행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주장하심으로 저주가 아닌 축복을합니다.
이런 일이 23-24장에 걸쳐 세 번 반복됩니다.
22-24장은 대부분의 구약성경이 그러하듯 전지적 작가시점이 아닌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으로 담담히 일어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발람이 얼마나 악한지 읽는 이로 하여금 굳이 설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일련의 행동들은 담담하게 기록함으로써 발람이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정신상태가 썩었는지를 오히려 더욱 강하게 강조합니다.
고집쎈 나귀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모압으로 가는 길에서 세 번이나 버텼습니다.
세 번이나 저주하기 위해 벌렸던 제사가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정도면 발람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포기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고 다른 작전을 시도하였습니다.
25: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자신이 숭배하던 바알신을 이스라엘에게 퍼뜨렸습니다.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바알브올의 제사의식은 지극히 더럽고 음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특히 모범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의 지도자 층들이 바알의 여사제들인 모압 여인들과 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에게 발람의 교훈을 따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더불어 니골라 당의 교훈을 경계하셨습니다.
니골라는 사도행전 6장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들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신실하고 충성된 자였지만 후에 변절하여 큰 해악을 끼쳤습니다.
그는 육신의 죄가 구원과 상관없으니 마음껏 죄지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 받기때문에 굳이 세상의 쾌락과 유혹과 굳이 싸울 것없이 즐기고 싶은대로 즐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오늘날 2021년의 한국 교회는 과연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으로부터 안전한가 돌아봐야 합니다.
발람은 하나님과 대화도 하였으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였습니다.
오늘날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목적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세 번 열 번 백 번을 깨닫게 해주셔도 끝까지 자신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합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지만 이것은 발람의 기도일 뿐입니다.
자신의 목적이 모두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 선교를 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선교를 크게 하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상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인 경우입니다.
돈 많이 벌어 선교를 크게 하려는 목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소박하게 살면서 작지만 의미있는 선교, 예를 들면 옆의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하신다면 이에 순종해야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위한 기도는 발람의 기도입니다.
바람직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실패하게 하셨는지 그 뜻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니골라의 교훈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신령하게 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놀라우리만치 윤리 도덕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방언하고 예언한다고 죄가 묵인되고 허용될리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거역하는 발람이 자신의 아끼던 나귀를 죽이려고 하던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영적인 것처럼 기도하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음의 중심이 세상의 쾌락과 영광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라면 하나님의 인격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계속 죄짓고 살거면 차라리 영적인 것처럼 보이질 말아야 합니다.
물론 죄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타인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하는 노력과 사죄의 태도를 갖춰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죄의 책임이 없다고 적반하장으로 우기면 바로 니골라당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본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25:6-13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압 여인들과 더러운 바알숭배를 한 이스라엘에게 전염병을 내리시고 이로인해 이만 사천명이 죽었습니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의로운 분노의 응징으로 전염병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만연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직시하고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을 과감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작은 죄 큰 죄 가리지 말고 싸우며 혹여 지은 죄를 덮으려 하지 말고 철저히 사죄하고 보상하며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친한 척, 환영하는 척하지만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노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저주가 오히려 축복으로 바뀌었듯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임을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대상답게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하고 선하고 깨끗하게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립시다. 아멘.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갖은 고생 끝에 호르산을 넘어 세렛 골짜기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평화롭게 주신 '브엘'의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는 모압평야가 시작되었습니다.
여지껏 거칠고 험한 산과 골짜기와의 싸움이었다면 평야에 당도하니 그 곳에 거주하던 이방 족속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아모리 족속을 물리치고 그 다음 바산왕 옥과 그의 백성들을 쳤습니다.
이런 두 번의 승리를 통해 모압 평야에 거주하던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압 평야의 최대 종족은 당연히 모압 족속들이었으며 당시 모압의 왕은 십볼의 아들 발락이었습니다.
발락은 어떻게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아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사신들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유명한 예언자 발람에게 보냈습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에돔 족속과 모압 족속은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과의 평화로운 공존 대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싸우려고 하지 않지만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바라는 것은 우리의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지는 안되 그들과 동화되어 섞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하는 분명한 영적 윤리적 도덕적 육체적 선을 지킴으로 세상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결코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더 희생하고 선하며 인자하며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700 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길을 온 발락의 사신들은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2:9-18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들이니이다 이르기를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모압 귀족들이 일어나 발락에게로 가서 전하되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여기까지 보면 발람은 비록 이방신을 숭배하는 영매였지만 나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발람의 정신은 이미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패배하였음을 보게됩니다.
22: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높여 크고 존귀하게 해준다는 발락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한 번 더 물어본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한 번 더 물어본다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바꾸실리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간 발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후 발람은 모압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충성된 나귀가 세 번이나 가던 길을 멈추고 결국에는 나귀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제사를 행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주장하심으로 저주가 아닌 축복을합니다.
이런 일이 23-24장에 걸쳐 세 번 반복됩니다.
22-24장은 대부분의 구약성경이 그러하듯 전지적 작가시점이 아닌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으로 담담히 일어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발람이 얼마나 악한지 읽는 이로 하여금 굳이 설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일련의 행동들은 담담하게 기록함으로써 발람이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정신상태가 썩었는지를 오히려 더욱 강하게 강조합니다.
고집쎈 나귀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모압으로 가는 길에서 세 번이나 버텼습니다.
세 번이나 저주하기 위해 벌렸던 제사가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정도면 발람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포기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고 다른 작전을 시도하였습니다.
25: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자신이 숭배하던 바알신을 이스라엘에게 퍼뜨렸습니다.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바알브올의 제사의식은 지극히 더럽고 음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특히 모범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의 지도자 층들이 바알의 여사제들인 모압 여인들과 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에게 발람의 교훈을 따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더불어 니골라 당의 교훈을 경계하셨습니다.
니골라는 사도행전 6장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들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신실하고 충성된 자였지만 후에 변절하여 큰 해악을 끼쳤습니다.
그는 육신의 죄가 구원과 상관없으니 마음껏 죄지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 받기때문에 굳이 세상의 쾌락과 유혹과 굳이 싸울 것없이 즐기고 싶은대로 즐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오늘날 2021년의 한국 교회는 과연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으로부터 안전한가 돌아봐야 합니다.
발람은 하나님과 대화도 하였으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였습니다.
오늘날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목적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세 번 열 번 백 번을 깨닫게 해주셔도 끝까지 자신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합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지만 이것은 발람의 기도일 뿐입니다.
자신의 목적이 모두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 선교를 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선교를 크게 하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상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인 경우입니다.
돈 많이 벌어 선교를 크게 하려는 목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소박하게 살면서 작지만 의미있는 선교, 예를 들면 옆의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하신다면 이에 순종해야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위한 기도는 발람의 기도입니다.
바람직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실패하게 하셨는지 그 뜻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니골라의 교훈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신령하게 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놀라우리만치 윤리 도덕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방언하고 예언한다고 죄가 묵인되고 허용될리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거역하는 발람이 자신의 아끼던 나귀를 죽이려고 하던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영적인 것처럼 기도하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음의 중심이 세상의 쾌락과 영광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라면 하나님의 인격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계속 죄짓고 살거면 차라리 영적인 것처럼 보이질 말아야 합니다.
물론 죄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타인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하는 노력과 사죄의 태도를 갖춰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죄의 책임이 없다고 적반하장으로 우기면 바로 니골라당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본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25:6-13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압 여인들과 더러운 바알숭배를 한 이스라엘에게 전염병을 내리시고 이로인해 이만 사천명이 죽었습니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의로운 분노의 응징으로 전염병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만연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직시하고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을 과감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작은 죄 큰 죄 가리지 말고 싸우며 혹여 지은 죄를 덮으려 하지 말고 철저히 사죄하고 보상하며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친한 척, 환영하는 척하지만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노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저주가 오히려 축복으로 바뀌었듯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임을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대상답게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하고 선하고 깨끗하게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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