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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보다 옳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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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468회 작성일 20-11-29 07:41

본문

창세기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한참 요셉의 이야기 중 갑자기 유다가 뜬금없이 등장합니다.

본문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황당하다못해 천박한 사실들이 낱낱이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본문의 '그 후에' 는 바로 요셉이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 사건 후를 말합니다.

'그 일' 후에 유다는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갔다고 합니다.

이 때가 유다가 21살 때이며 유다 말고는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야곱의 슬하에서 떠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이전 장 37장은 왜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아버지 야곱까지 등지고 홀로 떠났는지를 말해줍니다. 

37:31-35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판 후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야곱의 아들들은 속임수의 대가 야곱 뺨을 후려치듯 완벽히 속여버립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댓가는 이렇게 두번에 걸쳐 정산됩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라헬 대신 레아와 결혼하게 되었고  또 이제 자신의 아들들에게 속아 요셉이 죽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이 사건을 통해 속임수와 사기극으로 점철된 야곱 가문의 정체성에 심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실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엄청난 비밀을 감춘 채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 야곱을 매일 봐야하는 것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이 집구석에 계속 있다가는 자신도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처럼 사기꾼이 되버리고 말것 같아 홀로 가출을 감행하였습니다.

유다는 집에서 뛰쳐나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엘과 오난과 셀라를 얻게됩니다.

그리고 유다는 장자 엘을 위해 며느리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자 엘이 너무나 악하므로 그를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졸지에 아들 하나없이 청상과부가 된 다말은 엘의 동생 오난을 통해 아들을 낳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부여에서도 있었던 형사취수법이라는 이 제도는 아들하나 없이 남편이 죽어 살 길이 막막한 청상과부들에게 남편의 형제를 통해 아들을 낳음으로 죽은 남편 몫의 유산을 받게하는 일종의 사회보장적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죽은 엘의 동생 오난은 죽은 형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악한 욕심을 가졌습니다.

:9-10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졸지에 아들 둘을 잃게된 유다에게 이젠 마지막 남은 아들은 셀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셀라는 아직 어려서 장성하기까지 며느리 다말이 친정집에서 기다리라고 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셀라가 장성하였건만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든 어쨌든 며느리 다말을 들인 후 아들 둘이 죽었으니 아무래도 이 며느리에게 마가 끼었다고 믿었습니다.

후에 다말은 유다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됩니다.

그리고 양털깍는 축제기간에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만나게 됩니다.

며느리 다말은 새끼 염소를 화대로 하고 그 담보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요구하였습니다.

요셉의 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을 속였던 유다는 이제 며느리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속임을 당했습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반드시 되돌아 온다는 사실이 그대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석달 후 유다에게 좋지 않은 그러면서 좋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친정집에서 칩거하던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한 것입니다.

유다는 옳다됐다하고 즉시 며느리 다말을 불태워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며느리 다말이 유다의 담보물을 제시하자 불법한 임신의 장본인이 본인임을 깨닫고 크나큰 반성과 회개를 경험하게됩니다.

이 후 며느리 다말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됩니다.

그리고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와 며느리 다말과 다말의 다를 베레스와 세라를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다시 돌아옵니다.

변화받은 유다는 후에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에게 자신을 담보물로 삼아 요셉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막내 베냐민을 구하려고 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기위해 덫을 쳐서 막내 베냐민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우고 베냐민을 노예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분연히 나선 자는 유다였습니다.

44: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았던 유다 자신이 이제는 막내 베냐민을 구하기위해 스스로 요셉의 종이 되겠노라 고백합니다.

이렇게 변화받은 유다를 통해 요셉은 통곡을 하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게되었고 무너졌던 야곱의 가정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창세기 마지막 부분의 중심인물은 요셉이 아니라 실상 유다였습니다.

그가 변화받아 새 사람이 되어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고 야곱의 가정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후에 유다는 예수님의 족보에 중심 인물이 되는 놀라운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결론)

1) 자기 자신이 선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37:26-27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때마침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을 보고 유다는 요셉을 죽이지 말고 대신 노예로 팔자가 제안합니다.

동생 요셉을 죽여서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요셉은 엄연히 자신들의 동생이요 혈육임을 형제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이런 유다의 설득으로 요셉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요셉에게 있어서는 유다가 좀 억지스럽지만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라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적어도 자신의 형제들보다는 자신이 더 의롭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다는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무정한 자요, 요셉이 죽었다고 아버지 야곱을 속인 사기꾼인 것입니다. 

자신이 충분히 선하고 의롭다는 믿음은 평생동안 우리가 싸워야할 영적 원수요 대적입니다.

자신이 선하고 원리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긍지를 가졌던 유다였지만 본 장이 보여주는 실제 삶 속에서 유다의 모습은 너무나 가식적이고 위선적이었습니다.

며느리 다말에게 자신의 마지막 아들 셀라를 보내지 않음으로 형사취수법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미적대던 유다는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죽어 홀아비가 된 것은 안타깝지만 아버지 야곱이 극도로 싫어하던 이방의 풍습을 따라 신전 축제에 동원된 창녀와 매매춘을 했다는 점은 유다의 망가진 영적 상태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결과적으로 멸시하고 무시하였던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형제들보다 자신이 더 불의하고 추잡한 인간임을 본인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2) 세상이 선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2-23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창녀인 줄 알았던 며느리 다말에게 자신의 담보물인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찾으러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당연히 허탕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다는 화대인 새끼 염소를 맡긴 친구에게 염소를 돌려받지 않고 주면서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적어도 자신은 창녀의 화대를 떼어먹는 양심불량은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화대를 줬느냐 안 줬느냐가 아니라 매매춘을 했다는 것인데 말입니다.

아버지 야곱을 떠나 타락한 가나안 이방 문화에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버린 유다는 매매춘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가나안 땅의 일상적인 풍습으로 받아들이는 심각한 영적 피폐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남들도 다 하니 괜챦다는 생각처럼 잔인하고 비열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자기 편이요 세상 풍토가 자신의 의로움의 근거라는 말입니다.

사회적 분위기와 풍토가 그러함으로 자신이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고해서 죄의 책임이 면제되거나 죄의 희생자가 저절로 보상받는 일은 없습니다.

과거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었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죄책감없이 아내를 학대하고 며느리를 괴롭혔던 남편들과 시어머니들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의 노예제도와 흑인을 차별하던 사회적 풍토에 따라 흑인을 학대했던 백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문 비뚤어진 자입니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도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던 남편들과 시부모들이 있었으며 흑인 인권을 위해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을 반대하던 백인들이 소수였지만 엄연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정화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불의에 암묵적 동의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3) 참된 의로움의 출발은 자신의 의를 부정함으로 이루어진다.

:24-26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보다 불의한 사람을 통한 비교 우위로, 그리고 세상의 풍토와 사회적 분위기를 근거로 자신의 의를 정립하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 의로움은 사람을 더욱 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들키지 않는 기술만 더욱 늘게 할 뿐 정작 그 사람을 더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의로워 지려면 내가 참으로 불의하고 나는 가망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진정한 의이며 나의 의로움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까이 하는 것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들키지 않으면 명예요, 들키면 수치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들키는 것이 다행이요 들키지 않은 것이 저주라는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살기 좋은 세상은 의로운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들이 모였다고해도 얼마안가 그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반성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

네가 나보다 옳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아내의 몸종과 사통한 장남 르우벤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겼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유다는 르우벤의 참혹한 죄에 분노했지만 실상 아버지 야곱의 우유부단함에 더욱 실망하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거룩하기는커녕 추잡하고 비열하기 이를데없는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형제들을 경멸하고 무시하였던 유다였습니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추악함과 비열함은 유다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충격이었습니다.

형사취수라는 원칙을 지키는 척하며 교묘히 빠져나가려던 자신의 비열함을 보게되었습니다.

매매춘의 댓가를 지불했으니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비난으로부터 면제받으려던 자기위안이 통째로 무너졌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미운 요셉을 노예로 팔아 놓고서 그래도 요셉을 죽이지 않았다고 자신을 정당화했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4) 참된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의 뿐이다.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며느리 빌하를 용납함으로 유다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아내의 몸종 빌하와 르우벤의 일을 그냥 덮어준 마음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유다는 요셉을 편애하고 자신의 어머니 레아와 자신의 형제들을 등한시 하였던 아버지 야곱에 대한 원망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야곱이 받았던 상처들과 폭력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벽과 완전함을 추구하고 불의를 처벌하는 것이 의로움이 아니라 용서와 용납으로 불의와 부족함을 감당해주는 것이 참된 의로움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았던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방황하던 모든 순간순간 한시도 나를 놓지 않으시고 며느리 다말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하신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참다운 의는 오직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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