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from 믿음(로마서 15:1-2) > 주일오전예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사랑 from 믿음(로마서 15:1-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1-05 08:00 조회 14,422 댓글 0

본문

당시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지만 아직도 어렸을 때부터 지켜왔던 율법의 전통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손에는 복음과 다른 손에는 전통이라는 두 개의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믿음이 약한 자라고 칭했습니다.
아직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약하여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믿음이 약한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접한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의 전통이 오히려 걸림돌이요, 장애물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 속에 율법의 전통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로마교회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로 모였지만 공동으로 신앙생활을 함께 나누는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할례 뿐만 아니라 금식과 절제로 시작되는 각종 유대의 절기들, 그리고 율법의 조항들을 로마교회의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큰 무리가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으로 모든 것이 다 성취되었으니 모든 율법의 전통을 내려놓으라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주요 불만은 왜 생각없이 신앙생활을 하느냐 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율법의 조항들만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마음에 깊은 생각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받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생각없는 동물로 회귀하려합니다. 
복음 중심의 신앙생활은 그러한 인간의 본능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하며 자기 자신을 말씀을 통해 분석하고 해석하고 통찰해야합니다. 
바울사도도 이러한 사람들을 믿음이 강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안에 믿음이 강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지만 그 모습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또한 믿음의 정도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잘 믿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질질 끌다가 말년에가서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전통을 생각없이 무조건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만을 주장하다 방종에 이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과 윤리를 중시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소위 허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만나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진리는 하나지만 그 안에서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문제가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복음과 전통의 갈등은 오늘날 현대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교회의 분열과 분란을 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보다 훨씬 살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전통을 파괴한다는 비방과 모함으로 핍박을 받고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사도 바울을 진짜 괴롭게 했던 사람들은 그를 핍박했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권세자들이 아니라 어줍쟎게 복음을 믿는다면서 율법의 전통을 내세워 그를 모함하며 비방하던 회색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전통이라면 이가 갈릴 갈등의 최대 피해자였던 사도 바울이지만 오히려 이마저도 복음의 원리로 풀어나갔습니다.
갈등해결의 첫번째 원리는 1절에서 처럼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복음의 지식을 갖추고 제대로 믿는다는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지식과 논리를 내세워 무조건 믿고 순종하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라, 즉 그들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는 믿음이 약한 자들의 변화가 아닌 믿음이 강한 자들의 희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라는 단어를 통해 이러한 "희생"은 믿음이 강한 자로서의 당연한 의무임을 말합니다. 
이는 바로 "사랑"이라는 복음 안에서의 유일한 의무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구절을 가사로하는 아름다운 노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사랑"은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 않습니다. 
99퍼센트 대부분의 경우 사랑은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기쁘게 하기보다 남을 기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제대로된 예수님의 사랑을 가졌다면 최소 하루에 몇번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육신의 기쁨이 서로 충돌하여 부르르 떠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과 어이없는 주장과 적반하장의 이기심 앞에서 심장이 떨리고 손이 부들거리는 것은 지금 제대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몸은 힘들더라도 마음을 편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강하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믿음이 강할수록 더 큰 문제를 감당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하고 할 수 있는 말이라도 침묵해야 합니다. 
나의 지혜로운 촌철살인 한마디로 미련한 자를 깨우고 악한 자를 참회시키고 정의를 구현하리라는 환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문제해결의 시작은 믿음이 강한 자의 희생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죄악속의 우리를 위해 묵묵히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한국 교회가 갈등과 분열 속에 침체된 것은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믿음이 강한 자들의 사랑에 문제가 있음을 고백하며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이러한 믿음으로부터의 사랑은 사람을 기쁘게 하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는 남의 기분을 맞추거나 남에게 맹목적으로 이용당하라는 차원의 말은 아닙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이룬다는 것은 원어적 차원에서 나보다 남을 더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는 것은 집을 세운다라고 표현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을 넘어 나보다 남을 더 섬기며 그들과 함께 집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복음서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여 구원받고 지옥대신 천국가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자신의 변화만을 이루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복음을 통한 내적인 변화가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멈춘다면 1절의 자기만을 기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복음은 자신의 변화와 구원을 넘어선 그 이상의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되 자신보다 남을 더 우선하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절을 통해 믿음으로부터의 사랑은 결코 성취감이나 자기만족이 아닌 "의지적인 고통"임을 강조합니다.
시편 69편을 인용하여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자신의 영광이나 기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심에 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고난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고난의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받는 자에겐 미덕이지만 베푸는 자에겐 희생이요 고통입니다.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한다고 하는데 이는 분명한 오해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대신 지는 것은 분명한 고통이며 희생입니다. 
나이들면 몸도 느려지고 감각도 둔해지지만 통증과 고통은 오히려 예민해집니다. 
믿음으로 사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신앙인으로서의 당연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을 사람에게 두고, 사람을 통해 보람을 얻으려한다면 더욱 힘들어지고 더욱 상처만 받게됩니다.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고통스러운 사랑이지만 그래도 이 믿음의 사랑을 계속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는 것입니다. 
원문은 성경을 통한 인내와 위로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고 표현합니다. 
인내와 위로는 찐빵과 앙꼬처럼 나뉘지 않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백마디 인간의 말보다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우리의 인내와 위로입니다. 
믿음의 사랑으로 인해 지치고 아프고 낙심될 때 성경말씀 만이 우리의 인내와 위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설교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감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어 성경을 통해 위로와 감동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성경을 읽지않으면 우리는 믿음으로 사랑할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생 최대의 실수는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았거나 실력을 쌓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유일하고도 참된 위로의 성경말씀을 읽지 않고 사는 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입니다. 
하루 한 장이라도 말씀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5-6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복음에 대한 믿음이 강한 자들이 인내와 위로의 성경말씀으로 소망을 얻음으로 더욱 사랑의 짐을 대신 질 때 교회는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부터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한마음과 한입이 되는 진정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각종 규칙과 프로그램들, 장로 권사 임직을 위한 각종 의무들과 과정들, 이를 위한 각종 행정기법들은 마치 교회가 하나의 기업체의 모습으로 진화된 것 같습니다. 
교회와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교제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갈수록 경쟁만 남아 큰 교회가 작은 교회들을 해체시키고 합병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과연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한마음과 한입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인내와 위로를 사람들이 영광이 아닌 오직 성경말씀으로만 구했다면 교회는 초대교회의 뜨거운 연합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내와 위로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할 때 교회는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본문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여기서 용납은 단지 환영하고 받아주고 참아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용납이라는 원어의 뜻은 타인 그 자체를 나 자신에게로 초대한다는 말로서 여기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을 말합니다. 
나의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심은 우리를 죄인취급하거나 우리를 열등하게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 주심을 말합니다. 
존중이라는 말은 한국사회에 속한 우리에게 참으로 거리감이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언어차원에서 단지 나이만으로도 서로를 존중하기가 참 불리한 조건에 있습니다. 
더구나 가족으로서는 더욱 용납, 존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충고와 권면의 한마디를 한다지만 그것이 오히려 듣는 이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동기로 한 말이었으니 별문제가 없다고 여기겠지만 과연 거기에 "용납"이라는 선결조건이 있었을까요?
좋은 동기로 해도되는 충고라면 똑같은 충고를 자신보다 더 지위가 높은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똑같이 할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 타인을 용납한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신중한 일입니다. 
타인을 그 자체로 존중하려면 고통을 마다않는 믿음으로부터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타인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이익의 수단으로 또는 숭배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타인을 자신의 권세와 힘을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억압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타인을 자신의 감정적 배설물의 배출구로 여긴다면 
우리는 "용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타인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사랑,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기위해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기에 준비된 사랑, 이러한 진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믿음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49건 13 페이지
게시물 검색

엘림전원교회 |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문화로 274-30
비영리단체등록번호:411-82-73048 | 대표전화:010-6691-0071 | 이메일 davidjbk@gmail.com

Copyright © elimtow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