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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새긴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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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3-03 09:43 조회 14,03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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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1:31-34
 
마음에 기록된 법
 
32절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은 바로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입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고작 열개 밖에 안되는 이 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 복을 얻고 형통하게되지만 이 법을 어기면 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법은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너무나 정당하고 공정한 법이었습니다. 
어떤 사회나 국가도 십계명을 어긴다면 서로 도둑질하고 약탈하고 서로 죽이다가 결국엔 공멸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안 믿든 모든 국가들은 법을 만들어 국민들을 보호하고 나라를 유지하려합니다. 
그리고 백퍼센트 예외 없이 십계명은 모든 국가들의 법정신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엄정한 권위는 종교의 유무를 떠나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가치를 그 자체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십계명은 열가지 조항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부모를 경멸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서 살인이나 간음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만이라도 어기면 다 어기는 것이 됩니다. 
열개의 조항이 제 각각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하나인 것입니다.  
 
출애굽시기 이 언약을 맺은 때 부터 근 천년가까이 지난 예레미야 시대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꾸준히 일관성있게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며 더 패역했던 북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 남유다마저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율법은 어차피 지킬 수 없던 애시당초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지키고 살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율법을 주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요?
 
로마서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의 약속이 없었더라도 인간은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율법이라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채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든 없든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늙게하고 병들게 하고 결국엔 죽게 만듭니다. 
사람이 어차피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찌 그리 두려워하는지요.
자연스러운 거라면 두려움이 없어야 하지만 왜 인간들은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죽음은 결코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음으로 죽음은 우리에게 찾아왔으며 실질적으로 우리는 조종하고 통제하는 최강 권력이 되었습니다.
 
이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순종" 이라는 문제가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은 커녕 불순종으로 일관하다 결국엔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어주신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차피 한번도 지키지 못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능과 불능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율법이라는 희망이라도 주지 않으셨으면 덜 비참해지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당하고 마는 것일까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시고 무조건 용서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께는 죄가 조금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 주시려고 해도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그 즉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31절에 새 언약을 맺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언약은 앞서 맺어주신 율법의 약속을 완전히 폐기하고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순종과 불순종의 댓가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살고 못지키면 죽는 것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대신 못지켜서 죽어야하는 책임을 인간에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를 인간 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죄가 없으시니 죽으실 이유가 없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들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이 새언약은 옛 언약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을 완성시켰습니다. 
다만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못 지켜서 당할 죽음을 대신 당하시고 우리 대신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그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더이상 우리는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지키느라 쩔쩔매지 않습니다. 
그대신 우리는 항상 우리 안의 성령님과 대화하며 성령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난이도의 면에서 율법을 지켜야하는 것에 비하면 성령님과 대화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우선순위는 죄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까?
 
먼저 성령님에 대한 오해와 근거없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으로 나는 모를지 몰라도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는 분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확신이 있다면 이미 성령님께서는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당들이 주문을 외우고 눈이 뒤집히면서 접신하는 귀신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령 충만 달라고 소리치고 구절을 반복하는 행위는 결코 성령님과 대화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아무리 흉악하고 광폭한 잡귀라도 성령님 앞에서는 꼬리조차 감추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쫒으실 때 목소리를 높이시거나 반복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귀신은 성령님의 존재 자체에 이미 혼비백산 도망가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주문이나 술법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통해 대화하십니다. 
먼저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근본 본체시며 사랑으로 하나가 된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믿어지고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일하실 기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마태복음 16:21-24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실 베드로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당한 말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꾸짖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용서받을 자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바로 성령님께서 지금 대화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나를 돌아보는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성령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기준이 되어 율법의 준수여부를 가렸습니다. 
그리고 행위로는 모든 인간들이 백퍼센트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탈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이루어 주셨고 우리가 지키지 못해 받을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마음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이 계셔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악령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성령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술중독 마약 살인 강도들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로 번역된 말은 원어로 "눈" 시각 초점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당연히 미워해도 되고 무시해도 되고 정죄하고 판단해도 된다는 내 속의 인간적인 기준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인간이 예수님의 대속하심으로 용서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의 가치를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앞세워 인간 스스로 구원받고 하나님 없이 인간이 이상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생각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시는 성령님과의 동행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더욱 깊이있고 진지하게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성령님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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