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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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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12-02 10:38 조회 13,67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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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7:16-20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보면 한낮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이라는 경전의 타이틀로 배우고 공부하며 믿는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고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엄정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행하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놀라운 능력에 감동되는 것이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감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교만하고 우쭐하다 두려워하며 우왕좌왕하는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에 대조적으로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른 대다수 국가의 연대기에 드러나는 미화나 과장 꾸밈이나 왜곡이 없기에 더욱 생생하고 현실적입니다.
그렇기에 수천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도 마치 지금의 현상황처럼 공감하게되며 역사를 통해 우리들의 미래를 적용 예측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는 이사야의 예언 중에 갑자기 뜬금없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활동시기의 다섯의 남유다왕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의미가 있기에 히스기야의 역사적 사실이 다뤄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히스기야왕의 일생은 드라마 자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왕은 남유다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왕이기에 한세대를 걸친 드라마틱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악한 왕 아하스와 선한 왕 히스기야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아마도 공포였습니다.
아하스 왕 통치 초기에 북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겪었습니다.
끊임없는 아람과 앗수르 제국의 침략과 노략에 남유다는 풍전등화의 형국이었습니다.
아하스왕이 가진 공포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이라는 정글에 사는 우리도 아하스왕처럼 두렵고 불안하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두렵고 불안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요즘엔 정신과 병동의 환자들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한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아하스왕은 자신의 공포를 대하는 방식에서 엄청난 실패를 저질렀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주변의 강대국들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을 섬기기위해 자신의 아들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제물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앗수르 왕에게 잘보이기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각종 기구들을 꺼내주고 백성들이 예배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문을 폐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성경은 역대하 28:22 에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더욱 하나님께 망령되이 행하기 마련입니다.
불안하기에 더욱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강한 자에게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불안하기에 참고 기도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행하여 일을 더 커지게 만들고 맙니다.
불안하기에 당장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생산적이지 못한 것들에 시간과 마음을 두어 해야 할 일들을 미루다보니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산더미처럼 쌓이게 됩니다.
불안하기에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위해 자신의 인생을 좀먹고 파괴하는 악한 자극을 추구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불안과 공포는 이렇게 사람을 철저히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놓는 위력이 있기에 마귀사단의 주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성경을 잘 몰랐을 때 아하스 왕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을 때는 아하스왕이 한심스럽기만 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텐데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였을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니 내가 아하스 왕의 위치에 있었다해도 별 뽀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좀 더 생겼습니다.
평생동안 아하스를 위협하고 괴롭혔던 주변의 아람과 앗수르 제국이 지금도 여전히 나의 삶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북한이나 중국, 일본이나 미국이 아니라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실과 급하게 변해가는 정치 경제적 상황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잘먹고 잘사는 우리를 더욱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과거 20-30년전보다 잘먹고 잘살지만 두렵고 불안하기는 오히려 더 합니다.
직장을 잃을까하는 두려움, 취업하지 못할까하는 두려움, 건강을 잃을까하는 두려움, 이런 것들을 잃으면 마누라 자식들도 나를 떠날까하는 두려움, 이렇게 속절없이 늙어가다가 허무하게 죽을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거대한 두 제국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도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험하게 만드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힘들고 어렵게 살게하시나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소박하고 소소한 평안과 안식의 나라는 지나친 꿈일까요?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왕의 역사는 이러한 저의 질문에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인생 자체가 불안과 공포였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가 자신의 아들들을 불에 살라 제물을 삼았다는 대목에서 참 히스기야는 운이 좋았다고 하기보다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을까 측은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닌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초기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보게되었고 앗수르 제국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잔인무도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러한 불안과 공포의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은 아하스왕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 아하스왕은 곤고할 수록 하나님께 범죄하였지만 히스기야 왕은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최선과 열심이 언제나 진리는 아닙니다. 
아하스 왕도 전국에 우상들과 이방신전들을 단시간에 세운 잘못된 열심을 쏟았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아람과 앗수르의 눈에 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잘못된 최선과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이 오직 기도만 하도록 상황을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본문의 상황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은 이제 남유다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마지막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을 히스기야는 
:3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정도면 대부분의 경우 항복을 종용하는 앗수르에게 굴복하고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협상테이블ㅇ르 마련하고 줄다리기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가장 긴박한 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고 먼저 행하다보면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는 결코 불로소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은 자녀로서의 마땅한 권리입니다. 
가장 급할 때 가장 먼저 기도하시길 축원합니다.
2) 우리는 불안과 공포의 실체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9-10 "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관하여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때마침 하나님께서는 이디오피아의 디르하가왕으로 하여금 앗수르를 침공하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함락을 목전에 두고도 앗수르 왕은 본국으로 돌아가 이디오피아를 막아야 하는 급한 불을 끄러 돌아가야 했습니다.
돌아가는 그 와중에서도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게 협박 편지를 보냅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협박편지에 크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합니다.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수많은 앗수르 왕의 협박편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뉴스의 경제난을 들어보면 회사는 다 망하고 우리는 다 직장 잃고 굶어죽어도 진즉에 죽었어야 하는데 신기하게도 너무 많이 먹어 문제지 굶어 죽은 사람을 보지못했습니다.
정치외교란을 보면 우리는 진즉에 북한 일본 중국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을텐데 참으로 신기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광고를 끌어오고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언론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모든 말을 믿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는 진실이 진실이어서 믿기보다는 자주 들어서 믿게 됩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가짜뉴스든 찌라시든 일단 틀어놓고 듣게만 해주면 진실이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보다 무엇을 듣는가라는 질문이 더 크게 와닿습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협박편지를 믿기보다 하나님의 사자 이사야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으려고 결심한다고해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자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어집니다. 
자주 듣는다는 행위 자체에 실제 마음의 중심이 거기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려면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길 축원합니다. 
3)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요즘시대에 이 말처럼 허투루 들리는 말이 있을까요?
말이야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하지만 대부분 우리에겐 결과가 중요합니다.
일단 올림픽에 갔으면 금메달을 따야 역사에 남고 사람들도 알아주고 돈과 명예도 따라옵니다.
일단 운이든 뭐든 명문대에 입학해야하고 대기업 공무원 공기업에 취업해야 합니다.
일단 부자가 되어야 더욱 부해질 수 있고 가난하면 더욱 가난해지고 고생할 일만 남았습니다.
이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은 믿음입니다. 
특히 다양성이 부족하고 효율성이 강조되는 우리나라는 약한 자들 소수 자들은 정말 살기 힘든 곳입니다.
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든, 입시에 성공해서 의대를 가든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방이 되버렸습니다. 
한방 터뜨리면 승리자가 되고 못되면 다수의 패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승부처에 강한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결과는 우리가 만든다는 것입니다. 
금메달따고 명문대 가고 대기업 공무원되고 강남 건물주 되는 것이 최고의 결과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오늘 판검사되고 다음날 교통사고로 죽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결과는 애시당초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정이라는 부분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만 집착하다보니 과정에 써야할 힘을 써보지도 못하거나 쉬운 길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역대하기를 보면 히스기야는 집권 초기부터 성전을 복구하고 중단된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또한 앗수르의 침공에 대비하여 어려운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512m 에 해당하는 지하수로를 파 식수를 확보하는 엄청난 수고를 감당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하나님께서 십팔만 오천의 앗수르 군대를 일시에 섬멸하신 결과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암울한 상황에 좌절하여 성전을 복구하고 예배를 회복하지 않았다면,
지하 수로를 뚫는 엄청난 난공사를 포기했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에 집착하면 성공과 실패 밖에 남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또다른 앗수르 제국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가 두려워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보람을 느끼는지 의미가 있는 일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남들 따라서 남들이 시키는 일에 수고와 정력을 쏟지만 성공하더라도 그 결과는 허망함 뿐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남들의 의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하기 때문에 하기 때문에 열정도 없고 끈기도 없어 차일 피일 미루거나 의미 없는 것에 시간과 정열을 허비합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을 복구하고 예배를 회복하고 수로를 파는 모든 과정에서 수많은 신하들과 주변국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 돈과 경비로 다른 강대국에게 공물을 바쳐 살길을 도모하라는 현실파들과 무기를 사서 국방력을 키우자는 강경파들이 얼마나 히스기야를 괴롭고 피곤하게 했을까요?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발견했기에 그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그 어려운 일들을 해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성공이라는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입니다. 
소명을 발견하고 소명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힘과 열정을 주십니다. 
거기에는 성공과 실패라는 말은 사전에 없습니다. 
어려움과 난관, 포기와 좌절, 타협과 미룸, 변질과 유혹이라는 적들이 있지만
그 적들을 물리쳤을 때 하나님의 승리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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