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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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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3-08-23 13:59 조회 9,00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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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9:30

오늘 우리가 맞이한 본문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친자매로서 한 남편의 아내로 살게 됩니다.

과연 이 둘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잘 지낼까요?

자매들로서 살아왔던 이들이 한 남자의 아내들로 살게된 상황에서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문에서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사랑하고 레아는 남편으로서의 의무만 행했다고 나옵니다.

아마도 야곱은 평소에는 라헬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다가 라헬과 부부싸움을 할때면 홧김에 레아에게 찾아갔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임신할 확률로 볼때 레아의 경우 훨씬 더 불리했을 것입니다.


1) 레아에게 임한 자손의 복 29:31-35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확률적으로 훨씬 더 낮은 레아에게 애가 섰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출산한 레아는 이름을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 라는 선포적인 이름으로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라헬 사랑은 여전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를 낳게 됨으로 레아는 이제야 말로 야곱이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이라 바라며, 시므온,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짓게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야곱은 라헬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셋째를 낳게된 레아는 이제야 말로 남편이 자기를 사랑할 것이라 기대하며 레위, 친함, 이라고 짓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야곱에게는 라헬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아들을 낳고서야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유다, 하나님을 찬송하다라고 짓습니다. 

이렇게 야곱에 대한 사랑의 질투가 사그라들자 때를 같이 하여 임신도 멈추게 되었습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한 쪽에서는 아들들을 줄줄이 낳아도 남편의 사랑이 없어서 매말라 가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넘치는 남편의 사랑에도 아들 하나가 없어서 말라죽는 일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2) 라헬의 도발 30:1-8

본문을 보면 라헬은 자기 소유의 아들을 낳기 위해 자신의 시녀를 야곱에게 보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시녀 하갈을 통해 아이를 얻으려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편법성 시도는 언제나 그 끝이 안좋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우기 라헬이 현재 누리고 받고 있는 남편 야곱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 댓가로 치루었다는 점에서 더욱 아픔이 큽니다.

항상 받고 있는 남편의 사랑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라헬이 어리석어서 일까요? 

당시 고대 근동사회는 지금처럼 사회복지가 잘되있지 않았으므로 가능한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 줄 아이를 갖는 일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라헬도 이제 곧 90이 될 늙은 남편 야곱만 바라보고 살다가 자식 하나 없이 홀로 남게 될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구하는 것을 욕구라고 합니다.

"욕구" 는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욕구" 는 도가 적당하면 "소망" 이고 도가 넘으면 "욕망" 이 된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바라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파괴하면서까지 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별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거기에 마음이 박혀서 정작 자신의 인생과 가정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기도가 필요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시고 제공해 주시라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는 기도가 먼저 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현재 받고 있는 축복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비교하게 됩니다.


8절에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의 가치는 너무나 큰 것이기에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가지고 이기고 지는 게임의 잣대를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참된 행복이라면 이를 비교할 기준도 파라미터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감사할수록 하나님께서 더욱 부어주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 레아의 반격 30:9-13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선포하는 라헬의 어처구니 없는 발언은 잠자던 레아의 투기를 깨웠습니다.

결혼 초에 아들들을 순풍순풍 날때만 해도 야곱이 가뭄에 콩나듯 자신을 찾아 주었지만, 넷째 유다를 낳고 난 후부터는 애도 들어서지 않아 그나마 찾아오던 야곱의 발길도 이제 뚝 그친 상황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들 넷만 바라보고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레아는 공평성의 원칙을 내세워 야곱에게 강제로 자신의 시녀 실바를 통해 아이를 얻게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개하고 싸우면 개가 된다는 개싸움이라고 합니다. 

상대가 이런 수준이면 그런가하고 감안해야하지만 레아의 성숙함도 라헬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나봅니다.

본문에 레아가 실바를 통해 낳은 아들의 이름을 갓, 복이라고 하고, 아셀, 기쁨이라고 지었으나 과연 레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복과 기쁨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경기 결과로 따진다면 무승부정도 된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두 자매 사이의 살벌한 결투에 생각지도 못한데서 큰 변수가 나타납니다. 


4) 라헬과 레아의 거래 30:14-16

다섯살 철부지 큰아들 르우벤이 임신 특효약인 합환채를 들에서 따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라헬은 다짜고짜 언니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동안 동생이라고 봐주고 참았는데 이제는 그 도를 넘었습니다. 

레아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라헬에게 껌딱지처럼 달아붙어있는 야곱을 하루만 달라고 거래를 제시합니다. 

라헬은 또다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복인 남편의 사랑을 합환채와 바꾸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축복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별 가치 없는 것을 얻기위해 가장 가치있는 것을 지불해버립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팥죽 한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의 미련함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에서의 미련한 거래를 제시한 장본인인 야곱이 자신을 합환채에 팔아버린 라헬을 바라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장자권을 판 에서가 자신을 조롱하는 듯, 마치 자신이 팥죽 한 그릇보다 더 초라해졌을 것입니다.

그동안 라헬이 뭘해도 사랑으로 참고 참았던 야곱도 이제는 한계에 다달았습니다.


5) 합환채의 효과 30:17-21

합환채가 효과가 있긴 있었습니다. 

문제는 복용한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판 사람에게 효과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합환채의 댓가는 하루밤만 야곱을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아들 둘과 딸하나가 레아를 통해 생산됩니다.

합환채 사건이후 지속적으로 야곱이 레아에게 찾아갔음을 보게됩니다. 

레아가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스불론, 즉 야곱이 자기와 함께 살리라라고 하였고,

막내딸 디나는 심판, 즉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 

라헬을 지게하고 자신을 이기게 하였다라고 짓습니다. 

이렇게 승리감에 도취된 레아의 행복도 오래가진 않았습니다.


6) 깨달은 라헬 30:22-24

드디어 라헬에게도 아이가 생겼습니다. 

이로써 라헬과 레아 사이의 길고 긴 남편 사랑 쟁탈전도 라헬의 막판 역전승으로 마무리 되는 듯 싶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이 둘째 베냐민을 낳으면서 산중에 죽음으로 경기 자체가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애시당초 야곱의 사랑은 경쟁의 대상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레아와 라헬은 큰 아픔과 상처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아픔의 장본인은 그 사이에 끼었던 야곱이었을 것입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에 목말라했으나 이를 위로해 줄 자식들이 있었으며,

라헬은 자식이 없어서 애태웠으나 이를 위로해 줄 야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로부터 사랑의 상처를 받았고, 레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사랑의 상처를 주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아들을 요구했으며, 레아는 야곱에게 사랑을 요구했습니다.

둘다 야곱에게는 불가능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 많은 것들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더디 주시거나 주시지 않는다고 속상해합니다.

보면 예수님은 수많은 라헬들과 레아들로 둘러쌓인 분인것 같습니다.

저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오늘만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싶습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들어 주고 싶어도 못들어 주시는 나의 기도 제목들,

없어서 못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대로 주셨다가는 내가 무너질까봐 못 주시는 예수님,   

내 기도 들으시지만 다른 사람도 나만큼 살피시는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바로 그런 기도가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나올 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더욱 불타오르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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