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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자”시119:116-1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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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9,275회 작성일 12-01-28 11:53

본문

 

본문 말씀을 보면 시편기자는 자기 나름대로 믿음 안에서 크고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116절)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2012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크고 좋은 소망을 가집시다. 그 소망들이 그대로 성취되어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물론 자신들도 소망이 성취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 합니다. 또 소망을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우리도 믿습니다.(118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자를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 시편기자는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로 사랑하나이다.”(119절)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크고 좋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받고 주의 증거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119-120절)


소원을 성취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러하신다면


첫째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갖 패배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결혼문제, 취업문제로 고민하며 불안 해 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생계 걱정, 자식들 걱정에 어깨 펼 날이 없습니다. “왜 나는 돈이 없을까? 무슨 일을 해야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때문에 웃고 있을 때도 그 속에 염려, 근심의 빛깔이 섞여 나옵니다. 그래서 활짝 웃지 못하고 삽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정말 온갖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패배감에 기죽어 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극심한 패배감에 사로잡힌 채 우울증 환자처럼 광야생활 40년을 절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40세에 민족을 구하겠다고 애굽의 궁정을 뛰쳐나왔지만 결국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절망적인 처가살이(노예)의 신세로 전략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40년 동안 자신의 민족과 하나님을 원망하며 우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마음에 절망을 품으면 우리의 삶은 온통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쓴 뿌리 (히12:15절)는 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자라는 쓴 뿌리는 어느 시기가 되면 반드시 밖으로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쓴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쓴 뿌리의 독이 우리 삶에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막기 위한 최선의 처방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상처를 떠 올려봐야 손해를 보는 쪽은 자신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만 점점 상처를 더 받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망과 절망의 언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심지어 기도하면서까지 저주와 악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험 망쳤어, 장사 망쳤어, 되긴 뭘 되, 3대까지 망해 버려라” 는 등의 절망적인 말, 저주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 뱉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까지 “직장 잡기는 물 건너갔어, 부모 복 없는 놈이 뭘 되겠어” 참으로 민망스런 탄식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소망을 성취하고 싶습니까? 기대 수준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의 삶에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나를 주목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패배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처럼 자기 자신을 메뚜기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사단의 말에 속지 마셔야 합니다.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우리게 되면 원망, 좌절, 두려움, 그리고 열등감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슈퍼맨 같은 완벽한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좀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나의 약점들과 열악한 환경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이 과소평가함으로서 상실해 버린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과 다름없는 큰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의 삶속에 가져와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그래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나 할 수 있다” (빌4:13절)고 외쳤던 것입니다. 감옥에는 패배감에 젖어 만사를 포기한 죄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 영화 “쇼생크탈출” 의 주인공은 탈출을 결심하고 어느 죄수 친구에게 망치를 하나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죄수 친구는 “여기 오면 희망을 버려야 한다. 이 망치 하나로는 탈출하는데 100년 이상 걸릴 것이다.” 라고 소망을 꺾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20년 만에 손바닥만 한 망치로 매일 굴을 파서 쇼생크 감옥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절망스런 말을 했던 감옥에서 만난 그 친구 또한 나이가 들어 만기 출소하게 되었는데 일찍이 탈옥한 주인공을 만나러 가면서 이런 말을 되뇌입니다. “나는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탈옥한 주인공이 참담한 감옥에서 20년이 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나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감방에 함께 있던 친구에게도 그런 희망을 선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 해도 “잘 살아 보겠다.”는 그 소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희망을 희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포기하지 맙시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소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단점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왜 나는 이리도 지지리 못났을까? 왜 못생겼을까?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날씬하지 못할까?”

남과 비교하며 결코 자기 학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소망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 절망적인 언어나 부정적인 말을 멈추십시오. 대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시며 외치십시오. “아! 참 잘생겼다. 나는 너무 예뻐, 나는 잘 될꺼야!” 교만은 금물이지만 자존감은 최대한 높이 가져야 합니다. 소원을 성취하시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러하신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말을 바꾸면 인생이 바뀝니다. 말에는 엄청난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입으로 말하면 말의 내용대로 결과가 이루어집니다. 산다고 말하면 살 것이요, 죽겠다고 말하면 죽습니다. 잠언 18: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혀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삽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아담은 동물들을 보자 마자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름대로 미래가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말에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말씀으로 명령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라” 38년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절)고 명령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입을 배의 키에 비유했습니다. (약4:4절) 배의 방향은 배의 키에 달려있듯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말에 달려 있습니다. 입술의 말에 변하면 미래가 변합니다. 말은 산울림과 같아서 말한대로 내게 돌아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도 남을 축복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을 저주하면 곧 기도 내용대로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 말에도 권세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도 또한 우리가 기도한대로, 선포한대로 이루어집니다. 남보다 낫게 살려면 말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말을 바꾸면 인생이 바꾸어집니다. 말이 변하면 나 자신이 달라지고 미래가 말한대로 결정됩니다.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만 보며 남을 헏뜯고 욕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저속해지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모의 재산보다 축복의 말을 더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야곱에게 먼저한 축복을 다시 거둘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결국 이삭이 축복한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어떠합니까? 자녀들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합니까? “에라, 빌어먹을 놈,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 가겠냐?” 팍팍 기죽이는 말을 얼마나 합니까? 자녀들이 이런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자라면 그 말처럼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 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겠네”라는 말 대신에 “주께 있네” “미치겠네”란 말 대신 “주께 미치겠네” “돌겠네”라는 말 대신 “일이 잘 돌아 가고 있네”라고 말해야 합니다. 행여 말로 자신을 저주하지 맙시다.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맙시다.

어느 장로님은 돼지를 기르는데 돼지 우리에 기독교 방송을 틀어 놓고 목사님들의 설교도 듣게 하고 신나는 복음 송을 돼지들에게 들려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장로님네 돼지는 찬송 소리가 나면 흔들흔들 댄스를 한답니다. 그 장로님은 돼지들 세계에도 동물복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란 돼지는 세포나 신경조직이 유연하게 활성화 되면서 고기의 육질도 부드러워 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자란 돼지는 고기도 질기고 맛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기야 짐승이나 사람이나 밥 먹을 때 신경을 건드리면 밥이 잘 넘어 갈 리 없겠지요. 그런 돼지는 스트레스를 받아 매일 긴장하니까 고기 맛이 좋을 리 없습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말로 표현되는 음악의 영향이 어떠함을 증명해 줍니다. 아무튼 은혜로운 찬양과 설교를 듣고 자란 돼지고기의 맛은 다를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생활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제 찬송이 살아있는 교회되게 합시다. 말씀이 은혜로운 교회되게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자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의 수용자세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교회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그런 신앙 태도나 말투를 바라셔야 합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 서로 조심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말들을 조심하고 이제 말의 내용은 물론 말투까지 확 바꿉시다. 말을 바꾸면 인생이 바뀝니다. 소망을 성취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은 해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똑같은 물에 한 컵을 향하여는 긍정적인 말을 들려주고 다른 컵의 물에는 부정적인 낱말을 붙여놓고 계속 그런 말을 2-3일간 들려 준 후 특수 촬영을 했더니 결과가 어떠했다고 했습니까? 물의 입자가 달랐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한 컵의 물은 썩은 물의 입자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실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말의 힘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긍정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무화과나무를 말로 저주했을 때 말라죽었습니다.

여리고성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의 말로 고함을 쳤더니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런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만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며 믿는 사람들의 말에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이 있는가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은 상대방의 삶에 악영향을 주며 나아가 자신이 망가지는 결과가 옵니다.

말 한마디로 매이기도 하고 풀리기도 합니다. 인생살이가 어둡습니까? 무언가에 묶여 있는 것 같습니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말투와 말씨부터 바꾸어 보십시오. 말을 바꾸면 인생이 바뀝니다. 소망하는 것을 성취하고 싶습니까?

먼저 자신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투와 말씨를 바꾸십시오.

금년에 여러분들의 가정과 인생에 형통함이 있을 줄 믿습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합시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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