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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눅13:18-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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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9,216회 작성일 11-06-1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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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불안의 세대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특히 요즈음 우리의 피부에 와 닿습니다. 경제는 흔들려 일자리를 잃고, 교육도 흔들려 밥 벌이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과 공기의 오염은 극심하여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질병은 많아지고,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입학과 취직의 불안은 젊은이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안은 한국의 문제 뿐 아니라 온 세계가 전쟁의 불안, 건강과 각종 위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공통 과제였고 종교가 그 해결책을 내세우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다룬 내용이 바로 오늘의 본문 눅13:18-33절입니다. 예수님의 해답은 “생명의 힘”을 말씀하셨고 인류의 소망이 이 생명 속에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1.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18-21절)에서 물량적으로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많은 식물의 씨 중에서 콧김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장 작고, 한 줌의 누룩은 보기에 허벅허벅 하고 무게가 없는 무능의 상징 같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겨자씨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고 성장하여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한 줌의 누룩이 보잘 것 없는 같으나 그것은 발효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습니다. 별 보잘 것 없는 우리라도 생명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을 때 가치 있는 인간으로,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인간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자라도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진리가 담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집에 태어났느냐? 지금 무엇을 얼만큼 가지고 있느냐? 어느 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분을 따라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와 하나가 되었으면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가난 한 자 같으나 오히려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9-10절)입니다.

과거에 록펠러가 메모지에 사인만 하면 은행은 담보 없이 거금을 내 주었다고 합니다. 잠간 공원에 앉아 연필로 공책 쪽지에 데생(소묘)한 그림도 피카소의 서명이 들어가면 집 한 채 값이 되었답니다.

종이 자체는 별 가치가 없으나 서명한 사람에 따라 엄청난 보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그 가슴속에 서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의 흔적(자국)을 가지고 있다”(갈6:17절)고 했습니다. 어디 바울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피로 새겨주신 그 분의 사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어제의 죄인이 오늘 의인이 되었고, 멸망의 자식이 천국 시민이 되었고, 썩어질 자가 썩지 않을 새 몸을 받는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어 받을 때 초라한 겨자씨 같은 자라도 큰 나무가 되어 모든 사람의 안식처가 됩니다. 인간의 가치를 전환시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이 시작한 누룩 운동 곧 천국운동인 것입니다. 겨자씨의 불안이란 작은 것, 모자라는 것, 희망이 내다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불안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은 겨자씨가 지니는 생명력처럼 작은 것에 성장을 약속하고, 불안을 소망으로 바꾸며, 가치를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실 이 주 예수”(♪93장) 하고 찬송하는 것처럼 예수는 내 생명, 나의 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이란 들어가기 힘든 문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절)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처럼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힘들고 괴로운 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입시, 취업, 고시 등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만큼 고생해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기념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옛날 예수님이 태어난 외양간 자리라는 방으로 들어가는데 문이 몹시 낮았습니다.

고개와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괴로운 만큼 겸손해져야 한다”고 안내자가 한 마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좁은 문은 겸손한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에는 큰 대문이 있고 그 곁에 작은 통용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작은 문의 별명이 “바늘 귀”였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19:24절)고 하신 것은 부자의 천국행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낙타가 예루살렘 통용문을 통과할 때 짐을 진 채로 통과하기는 너무 좁았습니다. 짐을 모두 풀어놓고 맨몸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답니다. 이처럼 좁은 문은 마음도 비우고, 욕심도 비우고, 자기를 부인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괴로운 문이지만, 아프고 쓰라린 문이지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할 문이지만, 아까운 보따리들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문이지만, 영생에 이르는 문이기에 주님의 경고대로 그 문이 닫히기 전에,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 지 모른다”고 주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절) 생명의 문,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겨자씨의 불안을 극복하는 생명력과 좁은 문의 불안을 극복하는 구원의 소망을 말씀하신 뒤에 결론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철학을 선언하셨습니다.

바리세파 사람 몇몇이 예수님을 찾아와 헤롯의 암살 음모를 귀띔해 주었을 때 그리스도는 자기가 사는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33절) 물론 예수님도 암살 음모를 듣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외로웠을 것입니다. 번민스러웠을 것입니다.(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갈보리에서의 고백을 생각 해 보자)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한 좁은 문을 정면으로 돌파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이 땅속에 묻혀 백배의 결실을 하고, 한 알의 겨자씨가 성장하여 큰 나무가 되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계셨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가시밭길을 거침없이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신, 구약 성경에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365회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1년의 날 수와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겨자씨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부활과 성장의 기적이 일어나듯이, 우리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믿음으로 그의 생명을 이어 받으면 염려와 불안을 물리치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신념처럼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고 전진하면 좁은 문도 통과할 수 있고, 험한 길도 돌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The power of faith)이라는 책을 쓴 빈센트 피얼(vincent pierl) 목사님은 “신념을 가진 자가 의심하는 자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산다. 믿음이 확실한 자가 희미하게 믿거나 흔들리는 자보다 더 능력 있고 좋은 결과에 도달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소망이라는 비전과 사랑이라는 추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내 갈 길을 갈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다면 곧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귀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값지고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씨가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이던 가난한 자이던, 잘 나고 못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무한한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이제 예수님 앞에 다 내려놓읍시다. 홀가분하게 좁은 문을 통과합시다.

예수님의 철학처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믿는 자답게 당당하게 살면서 믿음의 길을 따라 계속 힘차게 행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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