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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7:27-44절 치욕적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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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1,097회 작성일 11-04-1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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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하면 대표적인 상징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입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까? 십자가의 형틀이 영원한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예수님이 갈보리 산위에서 처형된 이후의 일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형은 참혹한 사형 수단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가장 치욕스런 죽음이었습니다. 로마당시에도 반역자, 도망간 노예, 흉악한 살인범에게만 집행되는 사형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그 예수님께서 참혹스럽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신명기서 21:22-23절에 보면 모세의 율법에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니 여호와께서 내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않게 당장 나무에서 끌어내려 땅에 묻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은 치욕스런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배반한 아들 압살롬의 죽음이 기억나십니까? 아버지께 반역한 불효막측한 패륜아를 하나님은 땅에서 죽을 가치도 없다고 여기셔서 상수리 나뭇가지에 머리털이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처형은 저주스런 죽음이요, 불명예(disgrace)스러운 그야말로 치욕스런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죄가 없으신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정하신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700여 년 전에 이미 이러한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하였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러한 치욕적인 죽임을 당하신 것은 내 대신 당한 희생의 제물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무엇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까?

1.치욕의 십자가는 영원한 고통의 상징입니다.

헬라어로는 “스타우루오” 혹은 “스타우로스” 라틴어로는 “크룩스”라고 불리우는 이 십자가의 형틀은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처형 수단이었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며 폐지시켜 버릴 때까지 십자가란 형틀은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못을 박는 무서운 형틀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아래는 어떤 광경이 벌어졌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기 위하여 제비를 뽑고 있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고 제사장들까지도 서기관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희롱했습니다.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가는 강도들까지도 욕설을 퍼 부었습니다. 참으로 처참하고 치욕스러운 고통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세 시간 동안(6시부터 9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고(막15:33절) 성소의 휘장이 위 아래로 갈라졌으며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이 일어났습니다.(마27:51-52절) 이 사건은 이처럼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정죄 아래 있는 인류의 구원이 불가능했음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종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죄인들의 형벌을 대신했다는 이 역사적 사실이 기독교 교리의 골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고난의 종교입니다. 고난이 없는 종교, 고난을 모르는 종교, 사랑의 희생이 없는 종교, 그것은 십자가의 종교가 아닙니다. 고난 속에 성장한 것이 인류의 역사라면 기독교는 그 역사를 피로 물들여 놓은 희생과 순교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친히 지신 이 치욕의 십자가는 인류의 역사상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의 상징임과 동시에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심볼(symbol) 인 것입니다.


2. 치욕의 십자가는 축복의 전제(前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로 치욕의 십자가요, 고난의 극치이긴 했지만 그것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의 표징입니다. 죄 값으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던 인간들을 구원하는 방법이 이 한가지 길 밖에 없었던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땅에 보내사 우리 대신 형벌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참다운 가치관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 있었다는 대해 있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은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의논하자 너희 죄가 주홍과 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과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1:18절)고 하신 그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신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 언약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최고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생명을 구원받을 축복의 선물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 받아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행보글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치욕의 십자가는 영원한 사랑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산에서 당하신 그 고난의 십자가! 이 치욕적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보장하시고 확증하신 하나님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는 하는 것은 십자가의 종교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손 양원 목사님이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했기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며 오히려 복을 빌었기에, 기독교 역사를 통해 많은 성도들이 사랑의 생활을 실천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야 할 죄인들을 대신해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 흉악무도한 사형 틀로서 십자가!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그 십자가가 사랑의 표상으로 바꾸어 자기까지는 이와 같은 인류의 죄 짐을 대신지시고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느 시골마을에 얼굴에 흉측한 상처가 있는 어머니를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생각했던지 학교 근처에는 접근도 못하게 했고 집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답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불에 타 죽어가는 자기를 구하려다 입은 상처인 것을 안 후에는 어머니의 얼굴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없었답니다. 그렇습니다. 그처럼 치욕스런 형틀인 십자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제 자랑스러운 사랑의 심볼이요, 구원의 표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의 가슴에는 사랑이 여울지고, 그곳에 녹아있는 주님의 사랑의 피는 우리들의 심령을 정결하게 씻어줍니다. 이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의 꽃이 피어야 합니다. 분열은 사라지고 연합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떼어주시던 떡을 먹으면서도 예수님을 팔 생각을 했던 가룟유다 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다른 생각 있으면 안 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그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이글거리는 불덩이처럼 우리의 가슴에 끓어올라야 하고, 우리들의 피 속에 강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4. 치욕의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골로새서 2:15절에 예수님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십자가로 이기셨다”고 했습니다. 엡2:16절에서는 “모든 원수를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수 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죄악과 무지와 불법으로 지배했던 사탄의 권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貸贖)의 재물이 되어 죽으시던 그 순간에 완전히 파멸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약속이 그 십자가를 보증으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콘스탄틴대제는 312년 동로마 제국과 최후의 결전 때 이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가므로 대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인류의 영원한 승리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가슴에는 어떠한 죄악의 세력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십자가의 깃발입니다. 그래서 모든 승리자의 월계관에는 의례히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5. 치욕의 십자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승리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벧후2:9절)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십자가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깃들일 곳이 없습니다. 가슴에 십자가를 지니고 사는 사람! 그는 평화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가정생활이 십자가 밑에서 이루어질 때 그 가정은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역시 십자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십자가의 제단에서만이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평화, 교회의 평화, 국가 사회의 평화도, 세계의 평화도 예수그리스도가 지신 갈보리 산 위의 십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끝으로 모체(母體)의 고통이 없이 새 생명의 출생이 있을 수 없듯이 십자가 없는 생명의 부활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염되고 멍들고 파괴되어 버린 오늘의 현실이 내일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려면 필연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어둔 것 후에 빛이 오고, 소나기 후에 햇빛이 나듯이, 눈물이 난 다음에 기쁨이 오고, 고독한 후에 사랑이 오듯이”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다음에 부활의 영광도 오는 것입니다. 내일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그가 진정 나의 구주로 믿어질 때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는 주인공들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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