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부활을 믿는가? 요11:17-27절 >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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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을 믿는가? 요11:17-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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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0,987회 작성일 10-04-1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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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깜짝쇼가 아닙니다.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부활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존재하고 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기독교의 복음은 계속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1. 부활은 이미 예고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사건은 이미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 중의 결정적 사건이요, 구원 역사의 절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놀라운 사실은 인류역사에 톱뉴스(Top News)가 아닐 수 없고, 그러기에 복음(福音)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역사의 발생이요, 기원에 관한 기록인 창세기(genesis) 3:15절에 여자의 후손(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분명히 예고(豫告)하셨습니다. 또 민수기 21: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광야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하나님께 불평할 때 불뱀 때가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죽이자 기도하는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했고 그것을 쳐다보자 마자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곳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그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미리 보여준 구원의 암시였던 것입니다. 또 요나서에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사흘 만에 나와 죄악이 관영한 니느웨를 구원한 것도 예수님이 무덤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시어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을 미리 알게 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눅11:29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 한심한 군중들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책망하시며 너희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실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평상시에 사랑했던 나사로가 죽어 나흘 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시어 무덤에서 살려낸 내용입니다. 어떻게 죽은 지 나흘 된 시체가 멀쩡하게 살아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하나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곧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고 나사로를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곧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심을 역력히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25-26절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분명히 질문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려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때 여러분 같으면 믿었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의 고백은 대단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성경전체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누구든지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이 부활 사건은 조금도 놀랄만한 기적도 아니요,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들어있는 자연스런 구원 역사의 절정(絶頂)인 것입니다.


2. 부활 신앙은 크리스챤의 능력입니다.

바울사도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 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5:12-14)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겠습니까? 도덕이나 철학의 선생을 믿으려면 예수님 못지 않는 훌륭한 스승이 역사상에 어찌 많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나를 창조하셨습니다.(창1:27) 다윗임금은 일찍이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서 나를 조직 하셨나이다”(시139:13절)라고 창조의 비밀을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세포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조직 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분이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아이가 땅콩만 하게 활착 되었는데 기계의 계기에 심장의 박동이 울리더랍니다. 생명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떻게 땅콩만한 생명 속에서 심장소리가 울려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신비는 놀랍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창조도 하시고 능히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그러면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나의 부활을 믿으면 나의 부활이 곧 너의 부활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네 속에 부활 신앙이 있으면 그것이 자리서 너에게 영원한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귀한 꿈이요 소망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허덕이다 죽음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요양원에 가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노인들을 보십시오. 곧 내일 모레의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호화롭게 인생을 마칠 것이라는 꿈을 아예 꾸지 마세요. 그 노인들께 잘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은 곧 크리스챤의 능력입니다. 어떤 분이 부인이 죽자 무덤에 호루라기를 넣어주더랍니다. 이유를 물으니 도움이 필요할 때 그것을 불면 달려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스운 것 같지만 그것은 부활신앙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왜 하십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눈동자 같이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우리도 살려 주실 것을 믿읍시다. 기독교는 패배의 종교가 아니라 소망의 종교입니다. 즐기기 위해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 믿는 종교입니다. 불안, 절망, 공포를 무슨 약으로 치료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뿐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능력에서 생깁니다. 자기도 구원 못하고 죽은 사람을 믿어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 부활 신앙이 믿음의 근본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의 믿음위에 집을 짓고, 사업을 경영하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부활 신앙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입니다. 기분 따라 흔들리고 분위기 따라 시들거나 말라 버리고 맙니다. 곧 부활 신앙은 크리스챤의 능력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이 신앙에 뿌리를 둘 때 그 사람의 신앙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형통할 것입니다.(시1:3)


3. 믿는 자들이 왜 낙심합니까?

마가복음 4:3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쩔쩔매며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배에는 예수님도 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모진 풍랑이 몰아닥쳤을까요? 우리들도 간혹 신앙생활 도중에 혹독한 시험을 만나 그 제자들처럼 떨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를 보면 풍랑을 만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반대편으로 갔기 때문에 풍랑을 만났는데 이 제자들은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막4:35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출발했습니다. 더욱이나 그 배안에 예수님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모진풍랑이 일어났고 또 그들은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떨어야 했던 것입니까? 그때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은근히 화가 났었을 지 모릅니다. 왜 늦은 저녁에 호수를 건너가자고 하더니 이 고생을 시킨다고 불평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간혹 신앙생활을 하는 도중 십일조 생활도 잘하고, 주일성수, 봉사 등 충성했는데 갑작스런 재난을 당한다거나, 원치 않는 질병의 습격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실망하기 쉽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나만 고생하면 괜찮은데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가족까지 고생시킬 때 죽을 맛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신앙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요나에게 내린 풍랑과 제자들에게 내린 풍랑은 이유가 다릅니다. 요나에게 내린 풍랑은 잠든 요나를 잠 깨워 일으키려는 풍랑이었고, 여기 제자들에게 내린 풍랑은 그들을 더 높이 띄우기 위한 풍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풍랑을 통하여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만고에 이름이 남을 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업을 경영하면서 아픔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업을 통하여 그 사업이 하나님 것인 것을 알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글을 읽고 연구해서 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체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태풍을 만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깨어나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고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왜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것입니까? 기도하면서도 확신이 없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에 무서워 떨었습니다. 자기들의 힘과 재능으로만 해결하려고 했을 때 절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 부활 신앙이 믿음의 뿌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 신앙이 크리스챤의 능력입니다. 이 믿음은 죽음도 이깁니다.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나시어 그 무서운 노도같은 풍랑을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한마디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잠잠해 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항상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합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게 합니다. 신자들도 풍랑을 만납니다. 잘 믿는 사람도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우리를 더 띄어주고, 더 믿음의 확신을 얻게 하고, 더 큰 축복을 주시려는 싸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살리는 종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여러분의 믿음의 뿌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크리스챤의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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