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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을 체득(體得)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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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0,000회 작성일 09-05-1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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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중에 제일 귀한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은혜란 베풀어 주는 혜택(benefit)을 뜻하는 것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웠을 때 위로를 받았거나 도움을 받고 고마움(gratitude)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직간접적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끼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신세(oblogations)지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마움을 반짝 느끼고 지나쳐 버리거나 마음은 있지만 자기 살기에 바빠 표현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거나 세월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맙니다. 왜 우리는 그러한 아쉬움과 후회의 반복 속에 살아야 합니까? 저는 15일 스승의 날을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일을 보고 돌아오는 도중에 열차를 기다리며 학교 제자들과 교회 제자들 몇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것은 지나온 나의 삶이 허탈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고마움에 보답해 보고 싶은데 은혜를 입었던 스승들이 한 분도 생존 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뒤 늦은 후회나마 전해 드릴 대상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허탈 한지 아십니까? 어느 시인의 고백에 “지나간 인생의 무덤가에서 배회한다”고 표현했던 귀절이 곧 나의 고백으로 마음에 와 다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나와 같은 무상함을 느끼지 않도록 내가 찾아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왜 나는 이제 와서 후회하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요? 나이 들면서 생각하니까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이 얼마나 사랑했었던가를 이제 절절히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때 나를 늘 복도에서 추겨 안고 도시던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것이 너무도 신통해서 군 종합 체육대회 때 만나자 반가워하며 연필과 공책을 사서 쥐어 주셨습니다. 중학교 때는 내가 먼 길을 통학 하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자전거를 닦으라고 책임을 맡겨 주셨던 에코스 수학선생님,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결석했다고 무작정 뺨을 때리시고 눈물을 닦으시던 그 선생님들이 생각나서 속으로 울어봅니다.
그때는 선생님들이 응당 우리에게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고 기뻐만 했지 고마움조차 느끼지 못했던 같습니다. 다 지나놓고 생각하니 아쉬운 일 뿐입니다. 하기야 혼자 사셨던 어머니에게도 효도 못했던 불효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른들이 자주 사람은 “나이가 양반”이라고 하더니 그 깊은 뜻을 이제야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왜 은혜 중에 제일 귀한 은혜가 깨닫는 은혜라고 했겠습니까?
깨달아야 고마움을 알고, 알아야 감사도 하고, 행동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수행하는데도 이치를 알고 하는 사람은 쉽게 해 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왜 장난감 조립품을 사 줍니까? 만지작거리며 이치를 깨닫게 하려는 체험적 교육 방법이 아닙니까? 깨닫는데도 얼마나 심도 깊게 느끼는 문제입니다. 같은 사건도 직접 내가 몸으로 당한 일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체득(getting by experience)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자주 “기적 중에 깜짝 놀랄 기적이 왜 그리스도인들이 변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녔고, 수없이 설교를 듣고, 시간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도 말씨나 행동이 변하지 못합니까? 생각 해 보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거기에는 간단한 이유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기는 알아도 건성으로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태 신앙이라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별로 다른 점이 없습니다. 교회 생활이 습관화 되어 마치 운동 안 하는 날은 몸이 벅적지근한 것처럼 정신적으로 개운치 않는 기분이어서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엡3:14-19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그것이 너무너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올바로 깨닫고 그에 대한 감사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넘쳐나기를 바라는 충심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절) 기도했습니다. 내가 살아온 생활 속에서 어려웠을 때 마음으로 위로 해 주고, 물질적으로 조금 도움을 주었던 분들도 생각하면 너무 너무 고마운데 여러분 생각 해 보십시오. 죽음의 종점으로 어쩔 수 없이 다가가고 있는 우리를 그 죽음의 사선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어찌 우리가 그 주님께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직 젊고, 또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힘들고 바빠서 구원의 은혜를 절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깊은 감사를 모르고 그럭저럭 믿음생활을 유지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감사한 것은 여러분의 의지가 아니라 여러분 마음에 그리스도(성령)가 계시기 때문입니다.(17절) 빨리 그리고 깊이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행복해 지십니다. 하나님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아시는 것만큼 여러분은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사시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우리는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유에 대한 정의를 “최선의 것을 인식하고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챤들의 자유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래서 “진리(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절) 예수님의 사랑을 아시는 만큼 여러분은 자유로워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사랑을 알면 그만큼 행복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인물, 경제, 과학, 지리, 정치, 종교 심지어 심리학까지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어떤 선비가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탔습니다. 그 선비는 노를 젓는 사공에게 자기가 얼마나 박식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물었습니다. 배가 왜 물에 뜨는 이치를 아는가? 왜 사철의 변화가 오는 것을 아는가? 사공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천자문을 배웠나? 안 배웠습니다. 그래 아는 것이 없네 그려! 하면서 선비가 거드름을 피울 때 물이 돌아가는 여울에서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사공은 “선비님, 배가 엎어질 것 같습니다. 헤엄칠 줄 아십니까?” 사공이 묻자 “아니 헤엄칠 줄 모른다네, 어쩌면 좋노?” 라고 얼굴이 새파래졌답니다. 여러분, 그러한 위기에 정치, 경제, 인문, 지리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다 알아야 하되 사람은 결정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죽어서 지옥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능력을 깨달은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 않습니까?  그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진정 복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체득할 수 있습니까? 성경말씀으로 체득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보고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뜻이 영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된 내용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의지요, 하나님 자신의 계시입니다. 계시란 우리가 볼 수 없고 알 수 없었던 것을 열어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의지(will) 자체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믿고 행하면 그 말씀대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우리 몸으로 경험한 깨달음이 곧 체득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분 한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또 로마서 8:32절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아니하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마다 모두 구원하십니다. 믿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허성도씨가 지은 “금붕어를 키우는 사람”을 읽고 깊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금붕어가 알을 낳으면 수 백 마리의 새끼가 부화된 답니다. 보통 사람은 새끼 금붕어를 보고 발견할 수 없는 이상(異狀)을 금붕어를 기르는 사람은 그 수많은 새끼 중에서 골라내어 다른 어항에 넣고 치료를 하여 준 답니다. 그때 드는 시약 값이 그 금붕어 수 십 배의 비용이 들고 또 이만 저만 정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것을 보고 곁에 사람이 얼마나 비경제적이고 시간 낭비냐고 지적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금붕어를 기르는 사람의 감정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금붕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수많은 금붕어 속에서도 병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요, 금붕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돈이 들고 시간이 소요되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여러분에 대하여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여러분을 살피시며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생활 속에서 이것을 친히 몸으로 느끼시면 그 하나님에게 충성, 봉사, 헌신하지 말라고 해도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가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도록 땀 흘려 번 돈을 주님 사업을 위해 선뜻 내 놓을 수없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만이 깨달은 만큼 감사하고 말씀을 지키므로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봄이 가고 여름이 왔으니 교회 생활 충실히 합시다. 말씀을 많이 읽고 타자도 칩시다. 말씀을 듣고 보되 뼈 깊이 사무치도록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함이니라”(딤전5:16-17)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몸으로 체득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비는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제발 건성으로 신앙생활하지 맙시다. 더더욱 기분과 감정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성령)가 여러분 속에 계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16절) 터가 굳어지십시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여러분 모두가 충만해 지시기를 축원합니다.(17-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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