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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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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9,649회 작성일 09-01-10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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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학교 공민 사회 과목에서 종교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납니다. 유교는 인(仁, 어짐), 불교는 자비, 기독교는 박애(博愛)의 종교라는 것이었습니다. 박애란 곧 깊고 넓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실제 생활은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교회 내에서 서로 비난하고 헐뜯고 불평하며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에게 사랑의 자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입은 셔츠에 보면 거의 “God is love"(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차에도 그렇게 써 가지고 다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고 구원하여 주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거의 암송하고 있는 요한복음 3:16절에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계속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고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해 보려는 안간힘을 써 보내는 사실 잘 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랑이 없다고 비난을 받습니다. 사랑을 강조하는 곳에서 사랑의 충족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교회에서 잘못 가르친 교육의 맹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의 자본은 없는데 사랑하라고만 하니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타고난 사랑에 그치고 맙니다. 본능적으로 타고난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뿐이므로 자기나 사랑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 또 생색내는 일에나 사랑하는 체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사랑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그 사랑을 밑천으로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농축(濃縮)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음으로 거듭난다고 했습니다.(중생 곧 회심, 벧전1:23절) 그러나 바울사도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랑의 핵폭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우리 속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 속에 사랑이 충만해지고 그때 우리는 그 사랑의 잔을 들고 남에게 부어주고 주님을 찬송하게 된다고 했습니다.(롬5:6, 시116:13절)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핵인 말씀만 받아 거듭났지 아직 그 핵이 성령의 불로 폭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는 알아도 이웃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이 없으니 주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나 먹을 것 마저 없는 사람이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색한 부잣집이라도 그 집 쓰레기통을 뒤져야 찌꺼기라도 나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은 어떻습니까?
아가페 사랑입니다. 헬라어에서 말하는 에로스(이성적사랑), 스톨게(우정) 그리고 필리아(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를 실천하려면 이런 사랑을 근본 인간들이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품이 고운 사람들은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며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아가페(절대적 사랑, 희생적 사랑)적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속죄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1서4:10절)고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 21:15절 이하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 것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을 때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끝까지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에 불에 의하여 그 속에 있던 사랑의 핵(말씀)이 폭발하게 되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신 사랑은 물론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성령)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13절 롬5:5절) 성령을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은 내 노력으로,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가페 사랑이 성령에 의해 내게 주어졌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은 아가페입니다. 아직도 성령으로 내 속에 있는 말씀이 폭발되지 못하면 에로스나, 스톨게, 필리아의 사랑은 가능하지 마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아가페적 서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교인들에게 억지를 씁니다. 왜 세상 사람들보다도 사랑이 없느냐고 투정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맞받아치면 안 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이 없어서 못 주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은 사랑에 굶주려 마른 논 바닥과 같습니다. 주어도 주어도 갈증을 느끼는 것이 세상입니다. 해결 방법은 교회가 성령 충만 받아 펑펑 사랑의 물이 솟아올라야 합니다. 우리 기도하면서 사랑의 저수지를 깊이깊이 파 봅시다.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요구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가 남에게 베풀 수 없을까를 생각하며 고민하는 크리스천들이 되어 봅시다. 목회자의 고충을 아십니까? 몸이 하나인데 요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할 일은 많은데 손과 발이 각각 둘 뿐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나대로 아픈 사람들과 새신자들을 그래도 돌아본다고 하는데 뒷전에서는 말이 많은 것도 압니다. 나는 주보원고를 쓰느라고 밤잠을 못잡니다. 왜 그런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안쳐주고 공무원들 같으면 퇴근 시간이 넘어 건강을 위해 탁구 좀 치는 것 가지고도 헐뜯는 것을 생각하면 야속하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요, 건강하여 20대 같이 보여도 내 나이 이제 68세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을 베풀었으니 나도 이제 사랑 좀 받아 보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으니 서로 사랑합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무덤에 갈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또 힘이 다 할 때까지 교회를 사랑하고 일할 것입니다. 게으름 안 부릴테니 기도하시며 밀어주세요. 교회 위해서 내 돈쓰며 연합 사업에 참여했지 정치한 것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재정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고 안간힘을 써 왔지 한 푼도 낭비 안 했습니다.  오죽하면 새벽차를 직접 몰고 있겠습니까?  그런 시간은 왜 노동시간으로 안쳐주고 비난거리만 찾습니까? 요양원이나 어린이집. 공부방은 공부방대로 더 접촉 안 해준다고 투정부리고 교회에서 이해 해 줄만한 분들은 더 집요하게 자기들만 미워한다고 사랑이 미움이 되어 되돌아 올 때 약간 피곤하며 허탈 할 때가 많습니다. 목회자라고 신이 아니며 철인(鐵人)이 아니라는 것을 좀 이해 해 주세요. 여러분! 사랑해요 더 사랑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9년도는 서로 사랑만 합시다. 나의 허물이 있다면 항상 직접 지적해 주시고 용서해 주세요.

3. 우리 서로 사랑의 실천자가 됩시다.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주려고 해도 줄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고 해서 없는 것을 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성전 미문에게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행3:6절) 했습니다. 물이 없는 저수지는 물을 공급해 줄 수 없습니다. 앞 못 보는 소경이 어찌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자만이 줄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에게 사랑의 포로가 되어 세계 모든 민족에게 그 아가페적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처럼 느껴져서 그냥 있지 못했습니다.(고전9:1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영안(靈眼)을 밝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누구든지 이 속죄의 사랑을 받게 되면 자기 안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함께 계심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자연히 밖으로 그 사랑이 베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향수병에서  향수 냄새가 새어 나오듯 사랑이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마음이 왜 하트(♥)인지 아십니까? 사람이 처음 났을 때의 마음은 네모랍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네모난 모서리 때문에 주위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남을 아프게도 합니다. 그 후 자라면서 차츰 깎이고 닳아져서 동그라미가 된답니다. 이때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 하지요,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는 둥근 맘, 그러다가 사랑을 하게 되면, 둥근 마음은 변한답니다. 어떤 때는 그리움에 부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토라져서 삐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동그라미가 하트 모양이 된답니다. 그래서 그 모서리로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트를 자세히 보세요. 뾰족한 부분이 있는 반면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움푹 들어간 부분으로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기에 사랑하는 마음이 하트 모양이랍니다. 여러분! 금년에는 움푹 들어간 공간으로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나눕시다. 남에게 불평하고 성질내기 전에 그 사람을 먼저 이해해 주어 보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사랑입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에, 성도와 성도 간에 신자와 불신자간에, 가족과 가족 간에 이러한 사랑이 풍성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끝으로 지난 금요일 철야 기도회 때 당회를 하다가 늦어져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불안해 죽겠는데 장로님들이 식사만 하러 가자고 하여 식사하는 동안도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전도사님들까지 한 분은 꼭 긴요한 가정에 심방가고, 한분은 아파서 참석을 못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알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교인들 먼저 생각하지 못했던 목회자인 제가 미웠습니다. 이 시간을 빌어 용서를 빕니다. 우리 서로 오해하지 말고 제발 사랑합시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돌아보는 사랑도 일종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사랑만 있고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감사만 있고 불평은 없어야 합니다. 남에게 받으려고 하기 전에 베푸는 사랑으로 승화된 크리스천들이 다 됩시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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