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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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8:1-3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300명의 군사로 135,000 의 미디안 군대 중 십이만을 죽인 기드온의 군대는 나머지 만오천의 잔당들을 쫓고 있었습니다.
미디안의 잔당들은 에브라임의 영토로 도망하였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은 도망하는 미디안 잔당들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미디안의 지도자 오렙과 스엡을 처치하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기드온과 300 용사들을 도와 준 것은 좋은데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드온에게 화를 냈습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미디안 잔당들을 추격하고 있는데 에브라임의 사사로운 시비가 반가울리 없습니다.
135,000의 미디안의 군대 앞에서는 제대로 큰 소리도 내지 못하던 에브라임이 이제와서 자신들을 뒤로 뺏다고 화를 내는 기가 막히는 적반하장 앞에서 기드온은 그래도 참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에브라임과 다투는 동안 미디안의 잔당들은 더 멀리 도망갈 것입니다.
기드온은 포도의 비유를 들어 에브라임과 다투는 대신 그들을 추켜 세워주었습니다.
끝물 포도는 맏물 포도보다 더 시고 당도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더 낫다는 절묘한 비유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제대로 먹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들의 말도 안되는 시비와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게 합니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정서적 고통이 커짐에 따라 사람들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무조건 참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과 다투는 것보다 더욱 큰 일이 있습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가 미디안의 잔당들을 추격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절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공연한 다툼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더욱 생각해야 합니다.
말도 안되는 억지 앞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절묘한 비유는 진정한 여유이자 인격입니다.
인격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더욱 확고히 부여잡는 사람만이 이러한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초한지의 한신은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영웅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고향 회음에서 길거리 깡패가 가랭이 사이로 기어가라는 시비를 참고 견뎌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었던 한신은 지금 길거리 깡패와의 다툼으로 소사에 연루되어 큰 뜻을 펼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수모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포도의 비유를 통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임으로 에브라임의 노여움이 풀렸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노여움은 숨과 호흡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길게 호흡하면 끝나는 것이 노여움입니다.
여기에 가치를 두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영원한 가치입니다.
한 번 내쉬면 끝나는 노여움 따위에 하나님의 사명을 방해받아서는 안됩니다.
:4-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기드온과 300 용사들은 에브라임을 지나 숙곳과 브누엘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그들은 숙곳과 브누엘의 갓 자손들에게 먹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숙곳과 브누엘의 갓 자손들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일원이며 기드온과 한 민족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 같이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식량 지원은 당연히 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드온을 놀리며 기껏 300의 숫자로 어떻게 미디안 적장, 세바와 살문나가 네 손에 있나며 조롱하였습니다.
섣불리 기드온을 도와주었다가 나중에 미디안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하는 비겁한 모습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의 시비는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던 기드온이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숙곳과 브니엘 사람들에게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고픈 배를 부여잡고 미디안의 잔당 만오천을 쳐부수고 적장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하여 숙곳과 브니엘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고한대로 숙곳 사람들과 브니엘 사람들을 응징하였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자존심 싸움을 벌였지만 최소한 미디안 잔당들을 공격하였고 나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숙곳과 브니엘의 갓 자손들은 미디안의 잔당들을 두려워하여 동족 이스라엘을 돕지 않는 반민족적인 배반행위, 이적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기드온은 우리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는 교회를 예표합니다.
교회는 숫자를 자랑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적은 숫자로 큰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교회에 모인 같은 교인들 가운데 기드온과 300 용사와 같은 사람들, 에브라임 사람들, 그리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서로 모여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히 붙잡은 사람들에게 자존심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자존심과 노여움은 긴 호흡 한 번이면 해결되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내버리고 세상의 능력과 다수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배신행위입니다.
숫자를 보고 규모를 보고 약하고 힘 없는 자들을 무시하는 모습이 내게도 있지 않은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멸망당할 세상 사람들이야 이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사람 자체로 봐야하는데 돈으로 사람을 보고 차로 사람을 보고 옷차림으로 사람을 보는 우리나라 민족의 특성은 우리가 평생 동안 일생의 적으로 삼고 경계해야하는 대상입니다.
요한1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동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항은 약한 개체를 무자비하게 짓밟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현대의 인간 사회에서도 단지 나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미워하고 학대하고 괴롭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규모와 숫자를 보면 언제나 비겁해 질 뿐이며 약한 자와 소수에게 잔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더욱 투철하게 부여잡읍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약한 자, 없는 자, 사회적 소수에게 보였던 비겁함과 무례함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반성합시다. 아멘.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300명의 군사로 135,000 의 미디안 군대 중 십이만을 죽인 기드온의 군대는 나머지 만오천의 잔당들을 쫓고 있었습니다.
미디안의 잔당들은 에브라임의 영토로 도망하였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은 도망하는 미디안 잔당들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미디안의 지도자 오렙과 스엡을 처치하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기드온과 300 용사들을 도와 준 것은 좋은데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드온에게 화를 냈습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미디안 잔당들을 추격하고 있는데 에브라임의 사사로운 시비가 반가울리 없습니다.
135,000의 미디안의 군대 앞에서는 제대로 큰 소리도 내지 못하던 에브라임이 이제와서 자신들을 뒤로 뺏다고 화를 내는 기가 막히는 적반하장 앞에서 기드온은 그래도 참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에브라임과 다투는 동안 미디안의 잔당들은 더 멀리 도망갈 것입니다.
기드온은 포도의 비유를 들어 에브라임과 다투는 대신 그들을 추켜 세워주었습니다.
끝물 포도는 맏물 포도보다 더 시고 당도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더 낫다는 절묘한 비유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제대로 먹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들의 말도 안되는 시비와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게 합니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정서적 고통이 커짐에 따라 사람들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무조건 참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과 다투는 것보다 더욱 큰 일이 있습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가 미디안의 잔당들을 추격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절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공연한 다툼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더욱 생각해야 합니다.
말도 안되는 억지 앞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절묘한 비유는 진정한 여유이자 인격입니다.
인격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더욱 확고히 부여잡는 사람만이 이러한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초한지의 한신은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영웅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고향 회음에서 길거리 깡패가 가랭이 사이로 기어가라는 시비를 참고 견뎌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었던 한신은 지금 길거리 깡패와의 다툼으로 소사에 연루되어 큰 뜻을 펼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수모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포도의 비유를 통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임으로 에브라임의 노여움이 풀렸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노여움은 숨과 호흡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길게 호흡하면 끝나는 것이 노여움입니다.
여기에 가치를 두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영원한 가치입니다.
한 번 내쉬면 끝나는 노여움 따위에 하나님의 사명을 방해받아서는 안됩니다.
:4-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기드온과 300 용사들은 에브라임을 지나 숙곳과 브누엘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그들은 숙곳과 브누엘의 갓 자손들에게 먹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숙곳과 브누엘의 갓 자손들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일원이며 기드온과 한 민족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 같이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식량 지원은 당연히 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드온을 놀리며 기껏 300의 숫자로 어떻게 미디안 적장, 세바와 살문나가 네 손에 있나며 조롱하였습니다.
섣불리 기드온을 도와주었다가 나중에 미디안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하는 비겁한 모습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의 시비는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던 기드온이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숙곳과 브니엘 사람들에게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고픈 배를 부여잡고 미디안의 잔당 만오천을 쳐부수고 적장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하여 숙곳과 브니엘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고한대로 숙곳 사람들과 브니엘 사람들을 응징하였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자존심 싸움을 벌였지만 최소한 미디안 잔당들을 공격하였고 나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숙곳과 브니엘의 갓 자손들은 미디안의 잔당들을 두려워하여 동족 이스라엘을 돕지 않는 반민족적인 배반행위, 이적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기드온은 우리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는 교회를 예표합니다.
교회는 숫자를 자랑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적은 숫자로 큰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교회에 모인 같은 교인들 가운데 기드온과 300 용사와 같은 사람들, 에브라임 사람들, 그리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서로 모여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히 붙잡은 사람들에게 자존심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자존심과 노여움은 긴 호흡 한 번이면 해결되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내버리고 세상의 능력과 다수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배신행위입니다.
숫자를 보고 규모를 보고 약하고 힘 없는 자들을 무시하는 모습이 내게도 있지 않은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멸망당할 세상 사람들이야 이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사람 자체로 봐야하는데 돈으로 사람을 보고 차로 사람을 보고 옷차림으로 사람을 보는 우리나라 민족의 특성은 우리가 평생 동안 일생의 적으로 삼고 경계해야하는 대상입니다.
요한1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동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항은 약한 개체를 무자비하게 짓밟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현대의 인간 사회에서도 단지 나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미워하고 학대하고 괴롭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규모와 숫자를 보면 언제나 비겁해 질 뿐이며 약한 자와 소수에게 잔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더욱 투철하게 부여잡읍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약한 자, 없는 자, 사회적 소수에게 보였던 비겁함과 무례함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반성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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