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향유옥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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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6-10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요한복음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나중에 쓰여진 책으로서 사도 요한이 기존의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보충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마태복음이 거론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드러내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사순절 5번째 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마지막 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머무시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곳 베다니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구원자 메시아로서 세상에 선포하실 곳을 베다니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다니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3km 쯤에 위치한 빈민촌이었습니다.
이 곳에는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 시몬을 비롯한 각종 병자들과 고아들, 과부들, 사회적 도태자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매일 싸움과 범죄가 끊이질 않고 여인들의 곡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절기를 지키시기위해 일 년 중 세 번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마다 계시던 곳이 베다니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부유촌에 유하시기를 마다하시고 가난한 빈민촌 베다니를 좋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단지 취향의 문제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취향이 달라서 고급 아파트 단지, 최상급 학군, 신도시를 선호한다고 그러려니 해서는 안됩니다.
베다니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취향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의 문제였습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조차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곳,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들의 응어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인 곳,
이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두시고 만나러 오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고급주택에서 머무실 능력이 안되서 베다니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엔 예수님께서 한 두번은 예루살렘 고급 주택에서 초청받으셨던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꼬박 일주일 동안 걸으시면서 피곤해진 몸을 이끄시고 예루살렘의 높은 고관의 집에 도착하셨을 것입니다.
입구부터 잘 꾸며진 정문을 통과하면서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들에게 방문자 등록 후 방문증을 교부받아 멋진 공용 정원길을 따라 해당 동의 전자식 버튼을 눌러 주인을 호출하신 후 최고급 식재료로 요리된 일품요리를 드시고 깨끗한 침실과 침대에서 푹 쉬셨던 경험이 없을리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튼 날 일어나셔서 "아 참 잘잤다, 다음에 또 와야지" 라고 하셨을까요?
마태복음 8:19-20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정치 경제의 중심 예루살렘에서 느꼈던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외로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소속감' '안도감' '편안함' 을 느끼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베다니 나사로의 집은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는 불편하고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때나 예고없이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그들이 먹던 반찬에 수저하나 얹으시고 그들이 눕던 침상 옆에 담요하나 더 깔고 주무셨습니다.
가시던 길에 싸구려 돼지 뒷다리 고기 한 덩이만 들고가셔도 언제나 환영받는 나사로의 집에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며 함께 드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이 가득하셨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편안히 휴식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다니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일부러 청소도 하지말고 더럽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낮추라는 말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언제나 환영받는 곳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복음의 핵심가치를 꽉 붙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흙탕물에 구정물 묻은 베다니의 아이들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고 품어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힘있는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힘이 없고 어려운 사람을 향한, 아프고 외롭고 가난한 영혼을 향한 조건없는 뜨거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물질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구제는 복음의 핵심이지만 갈 수록 교회에서 구제가 증가하는 대신 줄어들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은 이스라엘 백성의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팽배와 그에 따른 빈부격차와 양극화로부터 왔다고 배웠습니다.
빈부격차, 소득격차, 수도권 지방의 격차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에 무관심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영적 타락의 증거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하면 가진 자, 강한 자에게 빌붙고 약한 자, 가난한 자를 무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다니 정신을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회복합시다.
좀 적게 먹고 덜 편하더라도 다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구제의 정신, 이웃 사랑의 정신을 회복합시다.
그런데 한 여인, 요한복음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큰 사고를 칩니다.
마리아가 깨뜨려 예수님께 바친 향유기름은 300 데나리온, 노동자의 300일 일당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발라드리기위해 3,000만원 상당의 거액을 한 방에 쓴 것입니다.
가롯 유다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한 방에 3,000만원을 날리느냐, 이걸로 베다니의 굶주린 사람들을 도왔으면 얼마나 좋겠나며 분노했습니다.
저 또한 이 구절에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여지껏 소박하고 검소하셨던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설명했는데 한 방에 기름 3,000만원어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을 좀 더 깊숙히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평소 취향에 대한 더 큰 확신을 얻게되었습니다.
사이비 종교 총수들은 가난한 자들의 지갑을 털어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현혹된 사람들은 사이비 총수들의 비상식적인 호사를 오히려 찬양하고 동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평소의 청렴 검소하셨던 모습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펄펄 날뛰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검소하심이 더욱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향유옥합을 통해 자신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대관식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기름부음을 거행하셨습니다.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이스어로 '기름부은 받은 자'라는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아무나 기름부음 받지 않습니다.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만이 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적은 본문의 사건 딱 한 번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되시고 사흘 후 막달라 마리아가 기름을 가지고 갔지만 정작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오늘 마리아의 향유옥합 사건은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기름부음이 된 것입니다.
허름한 빈민촌 베다니의 한 나병환자의 집에서,
빈민촌의 여인 마리아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으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실 왕이자, 대제사장, 선지자 바로 그리스도 메시아 구원자의 대관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할 때마다 누가 기름부었는가라는 답의 주인공은 바로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기름부음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것입니다.
3,000만원이 작은 금액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이익을 크게 남긴 투자였다는데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운이 좋아서 이런 행운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실은 마리아보다 앞서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 19장의 젊은 부자였습니다.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자 청년은 가장 큰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전 재산을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고아인 마리아가 모은 3,000만원 상당의 향유옥합은 마리아의 전재산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생계의 밑천이자 노후의 자본이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구제는 내게 여유가 있을 때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구제는 세상의 구제와 다릅니다.
내 전부, 내 인생을 바치는 마음으로 나누고 구제하는 것입니다.
미친 짓 같아 보이지만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이익이 숨어있는 기회입니다.
99세의 일기로 별세한 장응복 온누리교회 장로님은 전 재산 113억을 한동대학교에 기부하셨습니다.
저는 고 장장로님도 대단하시지만 그의 자녀들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 장장로님께 99세라는 건강과 장수 뿐만 아니라 귀한 자녀분들까지 선물로 주셨는데 113억이 아니라 천백억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다니 정신, 내 전부를 바치는 향유 옥합 정신이라야 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최우선 정신입니다.
바칠 것이 적다구요?
오히려 더 좋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기왕 바칠 것 마리아처럼 시원하게 바칩시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염려, 내 걱정 시원하게 깨뜨리고 예수님께 부어드립시다.
상상도 못할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요한복음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나중에 쓰여진 책으로서 사도 요한이 기존의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보충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마태복음이 거론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드러내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사순절 5번째 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마지막 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머무시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곳 베다니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구원자 메시아로서 세상에 선포하실 곳을 베다니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다니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3km 쯤에 위치한 빈민촌이었습니다.
이 곳에는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 시몬을 비롯한 각종 병자들과 고아들, 과부들, 사회적 도태자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매일 싸움과 범죄가 끊이질 않고 여인들의 곡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절기를 지키시기위해 일 년 중 세 번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마다 계시던 곳이 베다니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부유촌에 유하시기를 마다하시고 가난한 빈민촌 베다니를 좋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단지 취향의 문제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취향이 달라서 고급 아파트 단지, 최상급 학군, 신도시를 선호한다고 그러려니 해서는 안됩니다.
베다니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취향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의 문제였습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조차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곳,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들의 응어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인 곳,
이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두시고 만나러 오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고급주택에서 머무실 능력이 안되서 베다니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엔 예수님께서 한 두번은 예루살렘 고급 주택에서 초청받으셨던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꼬박 일주일 동안 걸으시면서 피곤해진 몸을 이끄시고 예루살렘의 높은 고관의 집에 도착하셨을 것입니다.
입구부터 잘 꾸며진 정문을 통과하면서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들에게 방문자 등록 후 방문증을 교부받아 멋진 공용 정원길을 따라 해당 동의 전자식 버튼을 눌러 주인을 호출하신 후 최고급 식재료로 요리된 일품요리를 드시고 깨끗한 침실과 침대에서 푹 쉬셨던 경험이 없을리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튼 날 일어나셔서 "아 참 잘잤다, 다음에 또 와야지" 라고 하셨을까요?
마태복음 8:19-20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정치 경제의 중심 예루살렘에서 느꼈던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외로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소속감' '안도감' '편안함' 을 느끼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베다니 나사로의 집은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는 불편하고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때나 예고없이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그들이 먹던 반찬에 수저하나 얹으시고 그들이 눕던 침상 옆에 담요하나 더 깔고 주무셨습니다.
가시던 길에 싸구려 돼지 뒷다리 고기 한 덩이만 들고가셔도 언제나 환영받는 나사로의 집에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며 함께 드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이 가득하셨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편안히 휴식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다니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일부러 청소도 하지말고 더럽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낮추라는 말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언제나 환영받는 곳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복음의 핵심가치를 꽉 붙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흙탕물에 구정물 묻은 베다니의 아이들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고 품어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힘있는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힘이 없고 어려운 사람을 향한, 아프고 외롭고 가난한 영혼을 향한 조건없는 뜨거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물질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구제는 복음의 핵심이지만 갈 수록 교회에서 구제가 증가하는 대신 줄어들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은 이스라엘 백성의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팽배와 그에 따른 빈부격차와 양극화로부터 왔다고 배웠습니다.
빈부격차, 소득격차, 수도권 지방의 격차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에 무관심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영적 타락의 증거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하면 가진 자, 강한 자에게 빌붙고 약한 자, 가난한 자를 무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다니 정신을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회복합시다.
좀 적게 먹고 덜 편하더라도 다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구제의 정신, 이웃 사랑의 정신을 회복합시다.
그런데 한 여인, 요한복음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큰 사고를 칩니다.
마리아가 깨뜨려 예수님께 바친 향유기름은 300 데나리온, 노동자의 300일 일당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발라드리기위해 3,000만원 상당의 거액을 한 방에 쓴 것입니다.
가롯 유다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한 방에 3,000만원을 날리느냐, 이걸로 베다니의 굶주린 사람들을 도왔으면 얼마나 좋겠나며 분노했습니다.
저 또한 이 구절에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여지껏 소박하고 검소하셨던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설명했는데 한 방에 기름 3,000만원어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을 좀 더 깊숙히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평소 취향에 대한 더 큰 확신을 얻게되었습니다.
사이비 종교 총수들은 가난한 자들의 지갑을 털어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현혹된 사람들은 사이비 총수들의 비상식적인 호사를 오히려 찬양하고 동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평소의 청렴 검소하셨던 모습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펄펄 날뛰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검소하심이 더욱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향유옥합을 통해 자신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대관식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기름부음을 거행하셨습니다.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이스어로 '기름부은 받은 자'라는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아무나 기름부음 받지 않습니다.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만이 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적은 본문의 사건 딱 한 번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되시고 사흘 후 막달라 마리아가 기름을 가지고 갔지만 정작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오늘 마리아의 향유옥합 사건은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기름부음이 된 것입니다.
허름한 빈민촌 베다니의 한 나병환자의 집에서,
빈민촌의 여인 마리아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으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실 왕이자, 대제사장, 선지자 바로 그리스도 메시아 구원자의 대관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할 때마다 누가 기름부었는가라는 답의 주인공은 바로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기름부음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것입니다.
3,000만원이 작은 금액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이익을 크게 남긴 투자였다는데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운이 좋아서 이런 행운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실은 마리아보다 앞서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 19장의 젊은 부자였습니다.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자 청년은 가장 큰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전 재산을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고아인 마리아가 모은 3,000만원 상당의 향유옥합은 마리아의 전재산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생계의 밑천이자 노후의 자본이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구제는 내게 여유가 있을 때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구제는 세상의 구제와 다릅니다.
내 전부, 내 인생을 바치는 마음으로 나누고 구제하는 것입니다.
미친 짓 같아 보이지만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이익이 숨어있는 기회입니다.
99세의 일기로 별세한 장응복 온누리교회 장로님은 전 재산 113억을 한동대학교에 기부하셨습니다.
저는 고 장장로님도 대단하시지만 그의 자녀들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 장장로님께 99세라는 건강과 장수 뿐만 아니라 귀한 자녀분들까지 선물로 주셨는데 113억이 아니라 천백억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다니 정신, 내 전부를 바치는 향유 옥합 정신이라야 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최우선 정신입니다.
바칠 것이 적다구요?
오히려 더 좋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기왕 바칠 것 마리아처럼 시원하게 바칩시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염려, 내 걱정 시원하게 깨뜨리고 예수님께 부어드립시다.
상상도 못할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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