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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무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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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순복
댓글 0건 조회 6,789회 작성일 22-06-1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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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3:1-5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온 룻은 먹고 살기위해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습니다.

보리 추수기간이어서 보리를 거둘 때 땅에 흘려지는 낱알을 줍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낱알 한 알 한알을 줍는다고 그냥이 많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소득원이자 생명유지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율법에 의해 낱알 줍는 사람들을 위해 추수꾼들이 밭의 네 귀퉁는 거두지 말고 남겨두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삭줍기는 당시 이스라엘의 최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장치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마저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삭줍기 권리를 사고 팔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이삭줍기 권리를 여러개 사서 다른 사람들에게 팔거나 하청을 주는 일마저 생겼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베들레헴 보아스네 밭에서는 누구나 보리 이삭을 주울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보리 낱알을 줍는 룻이 보아스의 눈에 띄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런 룻이 기특하여 물을 마시게 하고 일꾼들이 먹는 새참을 함께 먹도록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베푼 친절과 은혜를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전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그 순간 딱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오래전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도 없이 홀로사는 보아스가 자신의 가까운 친족임을 알고 있는 나오미였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아스야말로 자신의 가문의 기업을 무를 적격자임을 깨달았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목욕단장하고 몰래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가 모압 이방인 룻을 받아들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에게 분명한 촉이 왔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주신 영적 감각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이런 말도 안되는 파격적인 명령을 며느리 룻은 말씀대로 다 행하겠노라 순종하였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영이 며느리 룻에게도 임하여 전에 없던 과감함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의 작전은 일단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은 과감하게 보아스의 이불 한 구석에 몰래 누웠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용기를 내었지만 룻의 심정은 얼마나 떨렸을지요.

보아스가 깰 때까지 '이건 미친 짓이다, 관두고 몰래 빠져나가자' 라는 생각이 없을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명령이었기기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혜를 믿었기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바라보는 보아스의 친절한 눈빛에서 뭔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으로 룻은 끝까지 버텼고 보아스에게 과감하게 기업 무를 의무를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보아스가 오히려 룻이 자신에게 인애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룻이 자신에게 부탁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아침이 되자마자 실행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업 무를 자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레위기 25:23-28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스라엘의 토지제도는 영구히 토지를 팔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더라도 그 거래를 무효화하고 팔았던 토지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업을 무른다'라고 표현합니다.

팔았던 토지를 되찾을 수 있는 '기업 무를 수 있는 권리' 는 단지 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토지를 팔았던 본인이거나 아니면 본인과 가까운 친족만이 팔았던 토지를 되살 수 있었습니다.

본인에게 돈이 없으면 본인과 가장 가까운 형제가 토지를 되살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제도 돈이 없다면 두 번째로 가까운 형제에게로 그 순번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토지를 되살 수 있는 형제가 전혀 없다면 그 때부터는 아무나 그 토지를 살 수 있었습니다.

이 내용인 26-27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마다 토지의 소유권은 맨 처음 소유자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을 희년이라고 합니다.

토지를 다시 찾아줄 가까운 형제들이 없다면 50년 째는 하나님께서 되찾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가까울 수록 땅값은 내려갑니다.

얼마 안있으면 소유권이 원주인에게 넘어가니까요.

그러다가 희년이 막 지나면 다시 땅값은 최고치를 찍게됩니다.

소유할 기간이 많아지니까요.

그런데 보아스는 안타깝게도 기업 무를 자 일순위가 아니었습니다.

보아스 말고 다른 한 사람이 나오미와 더 가까운 일순위 친족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일순위 친족을 만나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자신에게 양보하도록 하기위해 이른 아침부터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만난 일순위 친족에게 보아스는 나오미에게 팔린 땅이 있음을 알려주고 그 땅을 되사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일순위 친족은 나오미가 나이가 이미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땅을 되사주겠다고 기업 무르 자의 의무를 지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나오미를 도와주기위해서가 아닙니다.

나이 많은 나오미가 얼마 안가 죽으면 나오미의 땅은 결국 자동적으로 자기 땅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일순위 친족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며느리가 있어서 나오미의 땅을 되찾아 준다면 그 땅은 며느리 룻과 룻의 자녀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보아스가 그 사실을 알려주자 일순위 친족은 그 즉시 발을 빼며 기업 무를 권리를 보아스에게 양보하였습니다.

기업 무를 권리를 양보받은 보아스는 즉시 나오미가 팔았던 땅을 되찾아 주고 룻과 결혼하였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보아스는 다윗왕의 증조할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보아스의 조상 베레스는 아브라함의 아들 유다가 며느리였던 가나안 이방여인 다말을 통해 얻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 또한 아버지 살몬과 여리고성에서 구원받은 기생 라합과 결혼하여 태어난 자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참여하는 세 이방 여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룻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인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단순히 땅을 판 것이 무슨 큰 죄인가 싶지만 구약에서 죄는 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을 판 것과 죄를 지은 것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 안식처를 잃었듯 자신의 땅을 판 사람은 안식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로만 따졌을 경우일 뿐입니다.

보다 더 근복적인 땅을 판 것과 죄를 지은 것의 공통점은 '돌이킬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어려운 말로 '비가역적'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같이 소득원이 다양한 시대에서 땅을 파는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서 땅은 유일한 소득원입니다.

땅이 없으면 소득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땅이 생명이며 심지어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남의 땅에서 일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가정을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무슨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인지 땅을 팔았다면 그 땅을 다시 되살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라는 것입니다.

죄도 이와 같이 '비가역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가역적이라는 것이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플라스틱들은 녹이면 다시 틀에 넣어 똑같이 만들 수 있지만 어떤 플라스틱들은 녹이려고 하면 타기만 할 뿐 입니다.

녹여서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가역적, 안되는 것은 비가역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재활용은 가역적인 플라스틱과 비가역적인 스트로폼을 서로 구분하도록 합니다. 

죄의 패악성은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죄의 참혹함은 '비가역성'에 있습니다.

20년 30년 전에 잠시 바람을 핀 남편을 마치 엇그제 일처럼 부르르 떨며 분노하는 할머니들의 마음의 흉터는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술중독에 빠진 아버지의 구타로 인해 구겨진 자아는 대를 이어 자녀에게 똑같이 반복되는 아이러니를 낳습니다.

가슴을 후빈 말 한마디 표정하나가 한 사람의 남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나라를 팔고 양심을 판 자들의 후손과 그의 민족들은 조상들의 죄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절제없이 살다가 나이들어 후회하지만 결코 돌이킬 수 없기에 후회도 비가역적입니다. 

엎지른 우유도 다시 담을 수 있고 깨진 유리병도 다시 붙일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죄가 남긴 상처와 흉터는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죄는 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야 맙니다. 

죄를 돌이키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마치 구약시대 땅을 팔아버리고 다시 사려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비가역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기업 무르는 자'입니다.

대신 땅 값을 치뤄 되찾아주는 사람입니다.

죄로 인해 잃어버린 안식처를 되찾아 주는 사람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죄로 잃어버렸던 우리의 안식처, 하나님을 우리에게 다시 되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업 무를 자입니다.

구원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원래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로마서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4절을 속량 또는 구속
25절을 구원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구속과 구원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속은 'redemption' "사서 되찾아주다" 구속자는 'redeemer' "사서 되찾아주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atonement'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으로 '화목'을 뜻합니다.

대신 값을 치뤄주는 구속과 하나가 된다는 구원이 두 가지가 우리가 알고있는 구원의 뜻입니다.

구속과 구원을 합쳐서 구원이라고 부르는데 구속은 원인이고 구원은 결과를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지은 죄를 돌이킬 수 없다고 자신을 탓하고 시간을 탓하고 하나님을 탓하는 원망의 굴레를 던져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지은 죄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죄로부터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되찾아 주기위해 아침부터 성문에 나갔던 것처럼 우리를 구속하시기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며 지금도 쉬지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최선을 다해 낱알을 주웠던 룻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최선을 다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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