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불쌍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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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4:1-6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2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3 일찍이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6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삼촌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암살당하자 허수아비 왕이었던 이스보셋은 이미 기가 꺽여버렸습니다.
다윗의 선처를 바라는 평화협정을 출구전략으로 세워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절에 바아나와 레갑이라는 형제가 딴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을 죽여 다윗에게 투항하면 높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2절 3절에 보면 이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서 이스보셋과 혈연지간이며 동시에 가장 신임을 얻는 군지휘관들이었습니다.
5절 6절을 보면 그들은 평소에도 이스보셋과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기에 아무도 그들을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틈에 그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 밤새도록 달려와 다윗에게 자신들의 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윗은 포상은 커녕 손발을 잘라 나무에 매달아 버렸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을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다윗의 편에 서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의도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편이 되는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편에 서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이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편이 되려면 첫 번째 하나님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바아나와 레갑은 대세가 다윗에게 넘어간 것은 알았지만 다윗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보고한 아말렉 청년을 처형하고
아브넬을 암살한 요압을 공개비판한 다윗의 성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논리가 전부인 권력다툼의 경쟁 속에서 성공과 승리에 눈이 멀어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편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고 말씀대로 믿어야 진짜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스스로 짐작 또는 상상하는 하나님은 실상 자신이 욕심이 투영된 결과이며 신명기에 나오는 '바알브올' '나만의 하나님' 이라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열심히 살았다는 것만으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7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8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7절에 아라바길은 이스보셋의 본거지 마하나임으로부터 다윗이 있는 헤브론까지의 95km 길입니다.
사무엘하 2장에서 아브넬의 군대가 기브온전투에서 패하고 밤새도록 기브온에서 마하나임까지 걸었던 그 길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이 밤새도록 95km 의 길을 걸었던, 아니 달려야만 했던 여러 이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왕을 암살하였기에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거니와 혹시 모를 추격대를 뿌리치기 위해 그들은 시속 5km 이상의 빠른 속도로 걸었, 아니 밤새 달려 헤브론에 다달았습니다.
그들의 체력과 정신력 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열정만큼은 악인들도 더하면 더하지 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그들은 다윗에게 자신들의 행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입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벌린 일이었다면 백번 칭찬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행했던 행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붙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게으르고 나태한 것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열심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도입니다.
내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열심인가,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나오는 열심인가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바아나와 레갑처럼 자신의 열심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행위는 오늘날 너무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비춰지는 신앙적 헌신이나 금욕, 봉사와 기부마저도 얼마든지 자신의 욕심으로 변질 될 위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완전한 항복, 온전한 의탁만이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입니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갑자기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나왔다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저는 이 또한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므비보셋은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전쟁에서 블레셋에 패한 후 유모가 안고 도망가다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절음발이라는 장애로는 절대로 나라의 왕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다윗을 그토록 사랑했던 요나단의 아들인데 하나님도 잔인하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므비보셋을 찾기위해 전국을 수배하여 간신히 찾아내어 극진히 보살피고 자신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였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므비보셋이 다윗의 편이 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므비보셋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오직 자신이 사랑했던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아마도 요나단이 살아있었다면 그토록 아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편이 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갑니다.
므비보셋은 오히려 다윗에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면 죽임을 당할 것으로 여기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윗은 다리조차 온전치 못한 므비보셋을 보고 마음이 펄펄 끓었을 것입니다.
이 쯤해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고 아버지의 노예라도 되고자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맨 발로 달려와 입맞추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내는 모범생 첫째 아들도 생각해 봅시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생각해 봅시다.
다리를 절은 므비보셋이 아니라, 바아나와 레갑, 첫째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다윗의 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하나님의 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열심은 도움은 커녕 멸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절어 왕이 될 수 없었던 절음발이 므비보셋의 이름은 '부끄러움을 없애는 자'입니다.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은 장애인이었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다윗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움을 없애는 자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은 노력과 열심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저 불쌍하고 사랑스러워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뭘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라는 사실 하나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바아나와 레갑처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22장에서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에게 빚지고, 억울하고, 환난을 당한 자들이 저절로 몰려들었습니다.
대략 400명인데 누구하나 뽑혀서 온 사람은 없고 갈데가 없어서 다윗이 받아준 사람들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과 함께 이리저리 도망다니느라 녹록치 않은 삶이었을텐데 숫자가 줄기는커녕 나중에 600명까지 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받은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았기에 몸은 힘들어도 이 곳 만큼 더 좋은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편이 갈리고 분열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서 다윗이 머물던 시글락에 다윗이 없던 틈을 타 아말렉이 쳐들어와 사람들과 재산 가축들을 약탈했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추격하여 빼앗겼던 가족과 재산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같이 추격에 나섰던 사람들이 되찾은 재산을 추격하지 않은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장에 갔던 사람이나 안 갔던 사람이나 동일하게 분배하라고 법으로 정함으로 소동은 진정되었습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오갈데 없어서 다윗에게 의탁하였을 때 세상 누구보다도 더 감사하였습니다.
다윗 덕택에 사람 소리 듣게되고 사람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덕택에 전장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 교만 자기 욕심이 틈을 파고 들었습니다.
자기 것을 주장하고 타인을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개구리 올챙이 시절만큼이나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공을 세울 수 있지만 이조차도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을 세워 하나님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몸부림이라고 치는 이유는 공을 세워 칭찬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님이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헌금이나 봉사를 지시하거나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헌금이나 봉사를 안 시켜서 복 받을 기회를 없앴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을 세워 하나님의 편이 되거나 복을 받는다면 그 누구보다도 여러분을 닥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을 세우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곳에서 위로를 받고 안식을 얻는 아둘람 동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지 않아도 되니 무리하게 사람 끌어오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이 행복하고 위로를 얻으면 사람들은 여러분을 보고 저절로 이 곳으로 옵니다.
여러분을 교회 성장의 소모품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목적 그 자체입니다.
다만 제가 죽을 때까지 노력하고 열심을 내고자 하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나게 하려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고 닥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치여 살면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내가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구나' 매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공을 세우려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 있는 그대로의 모습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2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3 일찍이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6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삼촌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암살당하자 허수아비 왕이었던 이스보셋은 이미 기가 꺽여버렸습니다.
다윗의 선처를 바라는 평화협정을 출구전략으로 세워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절에 바아나와 레갑이라는 형제가 딴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을 죽여 다윗에게 투항하면 높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2절 3절에 보면 이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서 이스보셋과 혈연지간이며 동시에 가장 신임을 얻는 군지휘관들이었습니다.
5절 6절을 보면 그들은 평소에도 이스보셋과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기에 아무도 그들을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틈에 그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 밤새도록 달려와 다윗에게 자신들의 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윗은 포상은 커녕 손발을 잘라 나무에 매달아 버렸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을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다윗의 편에 서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의도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편이 되는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편에 서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이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편이 되려면 첫 번째 하나님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바아나와 레갑은 대세가 다윗에게 넘어간 것은 알았지만 다윗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보고한 아말렉 청년을 처형하고
아브넬을 암살한 요압을 공개비판한 다윗의 성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논리가 전부인 권력다툼의 경쟁 속에서 성공과 승리에 눈이 멀어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편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고 말씀대로 믿어야 진짜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스스로 짐작 또는 상상하는 하나님은 실상 자신이 욕심이 투영된 결과이며 신명기에 나오는 '바알브올' '나만의 하나님' 이라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열심히 살았다는 것만으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7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8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7절에 아라바길은 이스보셋의 본거지 마하나임으로부터 다윗이 있는 헤브론까지의 95km 길입니다.
사무엘하 2장에서 아브넬의 군대가 기브온전투에서 패하고 밤새도록 기브온에서 마하나임까지 걸었던 그 길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이 밤새도록 95km 의 길을 걸었던, 아니 달려야만 했던 여러 이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왕을 암살하였기에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거니와 혹시 모를 추격대를 뿌리치기 위해 그들은 시속 5km 이상의 빠른 속도로 걸었, 아니 밤새 달려 헤브론에 다달았습니다.
그들의 체력과 정신력 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열정만큼은 악인들도 더하면 더하지 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그들은 다윗에게 자신들의 행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입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벌린 일이었다면 백번 칭찬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행했던 행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붙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게으르고 나태한 것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열심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도입니다.
내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열심인가,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나오는 열심인가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바아나와 레갑처럼 자신의 열심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행위는 오늘날 너무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비춰지는 신앙적 헌신이나 금욕, 봉사와 기부마저도 얼마든지 자신의 욕심으로 변질 될 위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완전한 항복, 온전한 의탁만이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입니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갑자기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나왔다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저는 이 또한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므비보셋은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전쟁에서 블레셋에 패한 후 유모가 안고 도망가다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절음발이라는 장애로는 절대로 나라의 왕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다윗을 그토록 사랑했던 요나단의 아들인데 하나님도 잔인하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므비보셋을 찾기위해 전국을 수배하여 간신히 찾아내어 극진히 보살피고 자신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였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므비보셋이 다윗의 편이 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므비보셋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오직 자신이 사랑했던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아마도 요나단이 살아있었다면 그토록 아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편이 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갑니다.
므비보셋은 오히려 다윗에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면 죽임을 당할 것으로 여기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윗은 다리조차 온전치 못한 므비보셋을 보고 마음이 펄펄 끓었을 것입니다.
이 쯤해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고 아버지의 노예라도 되고자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맨 발로 달려와 입맞추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내는 모범생 첫째 아들도 생각해 봅시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생각해 봅시다.
다리를 절은 므비보셋이 아니라, 바아나와 레갑, 첫째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다윗의 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하나님의 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열심은 도움은 커녕 멸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절어 왕이 될 수 없었던 절음발이 므비보셋의 이름은 '부끄러움을 없애는 자'입니다.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은 장애인이었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다윗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움을 없애는 자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은 노력과 열심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저 불쌍하고 사랑스러워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뭘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라는 사실 하나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바아나와 레갑처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22장에서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에게 빚지고, 억울하고, 환난을 당한 자들이 저절로 몰려들었습니다.
대략 400명인데 누구하나 뽑혀서 온 사람은 없고 갈데가 없어서 다윗이 받아준 사람들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과 함께 이리저리 도망다니느라 녹록치 않은 삶이었을텐데 숫자가 줄기는커녕 나중에 600명까지 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받은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았기에 몸은 힘들어도 이 곳 만큼 더 좋은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편이 갈리고 분열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서 다윗이 머물던 시글락에 다윗이 없던 틈을 타 아말렉이 쳐들어와 사람들과 재산 가축들을 약탈했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추격하여 빼앗겼던 가족과 재산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같이 추격에 나섰던 사람들이 되찾은 재산을 추격하지 않은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장에 갔던 사람이나 안 갔던 사람이나 동일하게 분배하라고 법으로 정함으로 소동은 진정되었습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오갈데 없어서 다윗에게 의탁하였을 때 세상 누구보다도 더 감사하였습니다.
다윗 덕택에 사람 소리 듣게되고 사람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덕택에 전장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 교만 자기 욕심이 틈을 파고 들었습니다.
자기 것을 주장하고 타인을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개구리 올챙이 시절만큼이나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공을 세울 수 있지만 이조차도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을 세워 하나님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몸부림이라고 치는 이유는 공을 세워 칭찬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님이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헌금이나 봉사를 지시하거나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헌금이나 봉사를 안 시켜서 복 받을 기회를 없앴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을 세워 하나님의 편이 되거나 복을 받는다면 그 누구보다도 여러분을 닥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을 세우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곳에서 위로를 받고 안식을 얻는 아둘람 동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지 않아도 되니 무리하게 사람 끌어오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이 행복하고 위로를 얻으면 사람들은 여러분을 보고 저절로 이 곳으로 옵니다.
여러분을 교회 성장의 소모품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목적 그 자체입니다.
다만 제가 죽을 때까지 노력하고 열심을 내고자 하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나게 하려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고 닥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치여 살면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내가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구나' 매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공을 세우려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 있는 그대로의 모습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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