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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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2-15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난다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이 벌린 대국민 사기쇼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했으며 심지어 많은 목사들도 이에 휩쓸렸습니다.
공영방송까지 동원되어 휴거 예정일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0월 28일 자정을 앞두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더욱 날뛰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자정, 카운트다운.... 땡!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울며 부르짖던 소리가 일제히 잠잠해 졌습니다.
그런데 한 구석이 시끌벅적해 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곳을 주목했습니다.
나방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방을 따라 점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도망치듯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천국이 아닌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듯 10월 29일의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뉴스거리가 된 다미선교회의 종말론 소동은 자신들의 사이비조직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들에게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 우리들을 다미선교회 광신자들과 별 다른 것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종 병을 즉시 고치셨던 예수님의 이적들도 부활의 사건과 함께 모두 허구로 매도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몇 십년도 지나지 않은 본문의 시대에서조차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교회 안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안았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에야 부활 사건은 얼마나 황당하게 여겨질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황당한 일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요 기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안 믿고,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일부 또한 믿지 못하는 부활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믿고 있는가 돌아보는 계기를 삼았으며 합니다.
부활사건을 실제 사건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타적인 정신이 중요하지 굳이 부활하셨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또다른 미신을 만들지 말자는 주장입니다.
사랑과 용서, 이타적인 정신이 중요하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
다른 훌륭한 성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특히 인간의 죄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결국엔 죽음의 문제 앞에서 모든 숭고한 것들도 다 허무하게 됩니다.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 인간들이 인간성을 잃고 비참하게 사는 이유는 배움이 부족하거나 기본 소양과 교육, 철학의 부재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
사망의 공포는 모든 것을 왜곡시켰으며 사람들은 일단 살아남기위해 자기 중심적이되고, 자연히 그들의 욕망은 비틀졌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바랬지만 과학 스스로가 이는 불가능함을 증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만이 의미가 있다고 쾌락을 쫓았지만 오히려 쾌락 자체가 죽음을 더욱 앞당기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친구로 여기고 '무' 로 돌아가면 참된 평안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미선교회 대국민 사기쇼보다 더 가증스러운 사기극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왜 두렵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부활을 탈출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팍팍한 인생, 괴로운 삶을 벗어나기 위해 부활을 피난처로 여기고 일상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자신이 만든 가상의 도피처를 부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까짓거 이번 인생은 어차피 버렸으니 부활에 올인하자라는 생각은 불교, 힌두교의 윤회사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휴거에 열광했던 다미선교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말만 거창한 부활이지 '다음 생', '휴거' 와 같이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만든 이상향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우리는 부활을 성경을 통해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구약 성경을 통해 250번 이상 예언되었습니다.
우연히 일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비하신 구속사의 중심주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배웠듯이 구약의 절기들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다시 오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여러 번 예고하셨으며 제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250번 이상 증명되고 언급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요 사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성령을 통해 믿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성경을 읽는다고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부활이 믿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목격했던 제자들이 즉시 변화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졌던 도마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였던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조차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변화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오십일 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자 비로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군인들이 무서워 골방으로 숨었던 그들이 세상으로 뛰쳐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외쳤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죽음을 당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은 바울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는데 가장 앞장 섰습니다.
부활을 성령으로 믿는 사람들은 부활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과 달랐습니다.
부활을 성령으로 믿는 사람과 부활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과의 차이는 '열매' 입니다.
부활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들은 '거짓된 휴거'와 '윤회'를 믿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고립적이고, 이기적이고 단기적이며 쾌락을 절대가치로 여기며 탐욕스럽습니다.
다미선교회의 사기극으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 당시 잘못된 종말론에 사로잡혔던 한 목사는 '휴거'를 예상하고 여러 신도들을 미혹하여 성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인도를 비롯한 불교 힌두교권 국가들의 극에 달한 빈부격차와 이기주의, 사기행위는 이번 생은 버렸다는 생명을 경시하는 '윤회사상'의 폐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성령으로 믿으면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유, 예언, 투시 같은 신비한 능력이 아닙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성품을 바꾼다는 것은 죽었다 살아나도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살로니가 전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성품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사람들과의 관계,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 직장 동료, 교인들과의 관계를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성령의 열매, 즉 성품의 변화입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아무리 가스라이팅으로 쇄뇌시켜도 예수님의 부활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성품이 성령님을 통해 변화될 때, 우리 주변의 관계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능력이 비로소 증명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됩시다.
성령님의 성품으로 열매 맺읍시다. 아멘.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난다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이 벌린 대국민 사기쇼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했으며 심지어 많은 목사들도 이에 휩쓸렸습니다.
공영방송까지 동원되어 휴거 예정일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0월 28일 자정을 앞두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더욱 날뛰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자정, 카운트다운.... 땡!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울며 부르짖던 소리가 일제히 잠잠해 졌습니다.
그런데 한 구석이 시끌벅적해 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곳을 주목했습니다.
나방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방을 따라 점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도망치듯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천국이 아닌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듯 10월 29일의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뉴스거리가 된 다미선교회의 종말론 소동은 자신들의 사이비조직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들에게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 우리들을 다미선교회 광신자들과 별 다른 것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종 병을 즉시 고치셨던 예수님의 이적들도 부활의 사건과 함께 모두 허구로 매도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몇 십년도 지나지 않은 본문의 시대에서조차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교회 안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안았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에야 부활 사건은 얼마나 황당하게 여겨질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황당한 일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요 기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안 믿고,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일부 또한 믿지 못하는 부활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믿고 있는가 돌아보는 계기를 삼았으며 합니다.
부활사건을 실제 사건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타적인 정신이 중요하지 굳이 부활하셨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또다른 미신을 만들지 말자는 주장입니다.
사랑과 용서, 이타적인 정신이 중요하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
다른 훌륭한 성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특히 인간의 죄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결국엔 죽음의 문제 앞에서 모든 숭고한 것들도 다 허무하게 됩니다.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 인간들이 인간성을 잃고 비참하게 사는 이유는 배움이 부족하거나 기본 소양과 교육, 철학의 부재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
사망의 공포는 모든 것을 왜곡시켰으며 사람들은 일단 살아남기위해 자기 중심적이되고, 자연히 그들의 욕망은 비틀졌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바랬지만 과학 스스로가 이는 불가능함을 증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만이 의미가 있다고 쾌락을 쫓았지만 오히려 쾌락 자체가 죽음을 더욱 앞당기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친구로 여기고 '무' 로 돌아가면 참된 평안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미선교회 대국민 사기쇼보다 더 가증스러운 사기극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왜 두렵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부활을 탈출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팍팍한 인생, 괴로운 삶을 벗어나기 위해 부활을 피난처로 여기고 일상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자신이 만든 가상의 도피처를 부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까짓거 이번 인생은 어차피 버렸으니 부활에 올인하자라는 생각은 불교, 힌두교의 윤회사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휴거에 열광했던 다미선교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말만 거창한 부활이지 '다음 생', '휴거' 와 같이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만든 이상향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우리는 부활을 성경을 통해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구약 성경을 통해 250번 이상 예언되었습니다.
우연히 일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비하신 구속사의 중심주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배웠듯이 구약의 절기들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다시 오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여러 번 예고하셨으며 제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250번 이상 증명되고 언급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요 사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성령을 통해 믿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성경을 읽는다고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부활이 믿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목격했던 제자들이 즉시 변화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졌던 도마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였던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조차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변화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오십일 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자 비로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군인들이 무서워 골방으로 숨었던 그들이 세상으로 뛰쳐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외쳤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죽음을 당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은 바울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는데 가장 앞장 섰습니다.
부활을 성령으로 믿는 사람들은 부활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과 달랐습니다.
부활을 성령으로 믿는 사람과 부활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과의 차이는 '열매' 입니다.
부활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들은 '거짓된 휴거'와 '윤회'를 믿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고립적이고, 이기적이고 단기적이며 쾌락을 절대가치로 여기며 탐욕스럽습니다.
다미선교회의 사기극으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 당시 잘못된 종말론에 사로잡혔던 한 목사는 '휴거'를 예상하고 여러 신도들을 미혹하여 성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인도를 비롯한 불교 힌두교권 국가들의 극에 달한 빈부격차와 이기주의, 사기행위는 이번 생은 버렸다는 생명을 경시하는 '윤회사상'의 폐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성령으로 믿으면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유, 예언, 투시 같은 신비한 능력이 아닙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성품을 바꾼다는 것은 죽었다 살아나도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살로니가 전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성품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사람들과의 관계,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 직장 동료, 교인들과의 관계를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성령의 열매, 즉 성품의 변화입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아무리 가스라이팅으로 쇄뇌시켜도 예수님의 부활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성품이 성령님을 통해 변화될 때, 우리 주변의 관계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능력이 비로소 증명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됩시다.
성령님의 성품으로 열매 맺읍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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