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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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3:10-11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요즘 에스겔을 읽고 있는데 성도 여러분들의 고충이 많을 것입니다.
역사서나 신약성경은 읽을만 하지만 요즘 읽는 에스겔서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해석이 어려운 예언서는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고 위협 겁박하고자하는 이단들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에스겔서를 읽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에스겔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에스겔서를 완전히 이해하기위해라기보다 일단 전체 그림을 보기위해 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불교의 반야심경처럼 뜻을 전혀 모른체 '읽으면 복이와요' 식의 막연한 낭송이 아닙니다.
불교 경전에 비하면 성경의 예언서들은 실제적이며 실체적입니다.
불교 경전은 분석이 불가능하며 애초에 분석이 목적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시어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하시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들은 현대시대의 기록물 창작물들과 별다른 차이없이 사람들에게 읽히고 이해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논쟁 대부분은 기록된 사실과 내용의 진위여부에 관한 것이며 성경의 문맥이나 문장, 그리고 문자의 해독 자체가 논쟁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현대 이스라엘 어린이가 읽어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충 뜻을 알 수 있으며 그리이스어 신약성경도 현대 그리이스 어린이조차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를 초월한 성경의 전달력과 접근성은 그 자체로 기적입니다.
문자를 읽을 줄만 알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문자적 해석 이라고 하며 성경을 대하는 자신감이 더욱 생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성경이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에스겔을 비롯한 여러 예언서들은 기록된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문자적 해석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많은 부분은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해야합니다.
이것을 영적인 의미를 찾는다고해서 영적 해석이라고도 하는데 영적인 것이 무조건 좋다고 문자적 해석보다 더 좋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부분과 비유적으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을 나누어야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의 시작이 됩니다.
본문의 에스겔 성전 또한 실재 존재하는 성전이라는 문자적인 해석과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영적인 해석이냐라는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판단하기 어려운 논쟁 앞에서 우리들에게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는 것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신학자들과 주석가들, 유명한 목사님들의 견해를 알아보고 참고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참고만 해야합니다.
이 방식 또한 자칫 잘못하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따라가는 건성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이냐 영적 해석이냐 라는 논쟁은 무엇이 옳으냐라는 진위여부가 목적이지만 실은 이 논쟁을 통해 여러 득과 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발흥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모호성으로인해 읽고자하는 마음을 접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읽기 쉬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성경이 완벽하게 해석되면 많은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을 믿을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지만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가 있습니다.
현대 수학자들에 의해 1+1=2 가 완벽하게 증명되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참이지만 도저히 수학적으로 증명이 안되는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학이 망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참이냐 거짓이냐 진위에 모든 것을 걸었던 때와는 달리 결과보다는 조건 자체를 연구하고 수학 자체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 수학의 가능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현대 컴퓨터 이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완전한 수학과는 달리 성경은 완전하며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며 우리는 불완전하며 상대적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성을 발견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한계도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에스겔 성전 또한 실재 존재하는 성전이라는 문자적인 해석과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영적인 해석이냐라는 진위 여부를 명확히 밝힐 수 없다는 한계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남겨진 몫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되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앞으로 펼쳐질 이상적인 교회 실재적인 교회라고도 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취를 통해 이미 완성된 교회라고도 봅니다.
어떤 입장이든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반드시 발견해야할 메세지가 있습니다.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의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모세에게 성막을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바로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된 성도들이라는 완전한 교회인 것입니다.
모세의 성막을 통해서 완전한 율례와 법도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법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교회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안식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우리가 하는 착각은 율례와 법도가 완전하므로 그것을 따르는 우리도 완전하다는 착각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진리를 발견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더욱 알고 겸손히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내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율법에 비해 아주 쉽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광야의 초막보다 더 정교하고 복잡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알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자세가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메세지입니다.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요즘 에스겔을 읽고 있는데 성도 여러분들의 고충이 많을 것입니다.
역사서나 신약성경은 읽을만 하지만 요즘 읽는 에스겔서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해석이 어려운 예언서는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고 위협 겁박하고자하는 이단들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에스겔서를 읽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에스겔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에스겔서를 완전히 이해하기위해라기보다 일단 전체 그림을 보기위해 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불교의 반야심경처럼 뜻을 전혀 모른체 '읽으면 복이와요' 식의 막연한 낭송이 아닙니다.
불교 경전에 비하면 성경의 예언서들은 실제적이며 실체적입니다.
불교 경전은 분석이 불가능하며 애초에 분석이 목적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시어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하시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들은 현대시대의 기록물 창작물들과 별다른 차이없이 사람들에게 읽히고 이해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논쟁 대부분은 기록된 사실과 내용의 진위여부에 관한 것이며 성경의 문맥이나 문장, 그리고 문자의 해독 자체가 논쟁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현대 이스라엘 어린이가 읽어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충 뜻을 알 수 있으며 그리이스어 신약성경도 현대 그리이스 어린이조차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를 초월한 성경의 전달력과 접근성은 그 자체로 기적입니다.
문자를 읽을 줄만 알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문자적 해석 이라고 하며 성경을 대하는 자신감이 더욱 생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성경이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에스겔을 비롯한 여러 예언서들은 기록된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문자적 해석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많은 부분은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해야합니다.
이것을 영적인 의미를 찾는다고해서 영적 해석이라고도 하는데 영적인 것이 무조건 좋다고 문자적 해석보다 더 좋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부분과 비유적으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을 나누어야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의 시작이 됩니다.
본문의 에스겔 성전 또한 실재 존재하는 성전이라는 문자적인 해석과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영적인 해석이냐라는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판단하기 어려운 논쟁 앞에서 우리들에게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는 것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신학자들과 주석가들, 유명한 목사님들의 견해를 알아보고 참고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참고만 해야합니다.
이 방식 또한 자칫 잘못하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따라가는 건성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이냐 영적 해석이냐 라는 논쟁은 무엇이 옳으냐라는 진위여부가 목적이지만 실은 이 논쟁을 통해 여러 득과 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발흥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모호성으로인해 읽고자하는 마음을 접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읽기 쉬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성경이 완벽하게 해석되면 많은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을 믿을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지만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가 있습니다.
현대 수학자들에 의해 1+1=2 가 완벽하게 증명되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참이지만 도저히 수학적으로 증명이 안되는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학이 망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참이냐 거짓이냐 진위에 모든 것을 걸었던 때와는 달리 결과보다는 조건 자체를 연구하고 수학 자체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 수학의 가능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현대 컴퓨터 이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완전한 수학과는 달리 성경은 완전하며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며 우리는 불완전하며 상대적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성을 발견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한계도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에스겔 성전 또한 실재 존재하는 성전이라는 문자적인 해석과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영적인 해석이냐라는 진위 여부를 명확히 밝힐 수 없다는 한계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남겨진 몫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되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앞으로 펼쳐질 이상적인 교회 실재적인 교회라고도 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취를 통해 이미 완성된 교회라고도 봅니다.
어떤 입장이든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반드시 발견해야할 메세지가 있습니다.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의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모세에게 성막을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바로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된 성도들이라는 완전한 교회인 것입니다.
모세의 성막을 통해서 완전한 율례와 법도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법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교회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안식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우리가 하는 착각은 율례와 법도가 완전하므로 그것을 따르는 우리도 완전하다는 착각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진리를 발견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더욱 알고 겸손히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내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율법에 비해 아주 쉽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광야의 초막보다 더 정교하고 복잡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알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자세가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메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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