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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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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순복
댓글 0건 조회 5,722회 작성일 23-01-22 09:08

본문

사무엘상 28:3-7
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5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7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규모에 놀라 두려워 하나님께 방책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하 5장에서 블레셋 군대를 앞둔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던 것과 대조됩니다.

사무엘상 전체를 볼 때 하나님과 사울의 소통이 막힌 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차츰차츰 멀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라고 나옵니다.

사무엘상을 둘러보면 사울이 꿈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내가 필요한 때에 불러내는 점술과 같지않습니다.

매일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평소 하나님과 만나는 습관이 없으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울은 자신의 죄로 인해 더욱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본문의 '우림' 은 제사장의 옷에 달린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도구입니다.

사무엘상 22장에서 제사장들을 학살한 사울을 피해 제사장 아비아달이 우림을 가지고 다윗에게 도망갔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복사품 우림을 급히 만들었을텐데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리 만무합니다.

죄의 나쁜 점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죄는 하나님과 자신을 멀어지게하고 결국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맙니다.


세 번째 하나님과의 소통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질 때와는 달리 노년의 사무엘 선지자를 홀대하였습니다.

그로인해 선지자들이 사울을 피해 다윗에게 모여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나 혼자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들과 교제해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으로 혼자 예배드린다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차선책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뿐만 아니라 성도의 교제도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단절은 사울 스스로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자초한 것입니다.

이 후 본문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힌 사울이 얼마나 바닦으로 떨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8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9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10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본문 3절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박멸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자 자신이 박멸했던 대상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10절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접한 여인에게 맹세하는 사울의 모습에서 양심이 굳어 말라 비틀어진 인간의 진면목을 보게됩니다.

신앙의 양심이 말라 비틀어지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없이도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신앙 양심 불량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다음 구절은 많은 논란이 있는 구절입니다.

11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마틴 루터와 칼빈 등 대부분의 정통 신학자들은 본문의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거짓영으로 보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신접한 자를 극히 혐오하신 것은 신접의식이 본래 귀신의 사기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12:7 에서 죽은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신약에서도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죽은 사람의 영이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 때에 이러한 신접행위를 비롯한 귀신들의 현혹이 더욱 횡횡할 것이라고 마태복음 7:22절과 데살로니가후서 2:9, 요한계시록 13, 14, 16 장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만적 간계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어책은 성경의 진리들로 마음을 잘 방비하여 변장한 유혹자를 분간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4절에 사울은 사무엘을 가장한 거짓 영에게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귀신을 경배하는 기괴한 상황입니다.

16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20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사무엘 선지자로 가장한 거짓영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신접행위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자 먼저 신접행위를 동원한 쪽은 사울입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울의 나락을 보여주시기위해 거짓영을 이용하신 특별한 경우일 뿐입니다.

정상적인 믿음의 성도들에게 더러운 신접행위로 소통하실리 없습니다.

더구나 예언의 내용 또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미 악령을 통해 사울에게 여러번 확인된 형벌의 선포일 뿐입니다.


구정 설을 맞아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인 차례 제사를 말씀을 통해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유한 전통이며 문화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효도하면 복 받는다고 성경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상의 영을 소환해서 밥 먹이고 국 먹인다고 효도가 아닙니다.

살아계실 때 잘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교회는 우리나라의 전통을 고려하여 제사 대신 추도식을 제안합니다.

고인이 남긴 사랑과 교훈을 다시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추도식도 적합한 명칭이 아닙니다.

따를 추, 슬퍼할 도 인데 우리는 천국의 소유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영생의 소망을 가진 이들이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를 추, 그리워할 모 이렇게 추모식으로 불러야 합니다.

21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가 심히 고통 당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사오니
22  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하니
23  사울이 거절하여 이르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24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가져다가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25  사울 앞에와 그의 신하들 앞에 내놓으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신접한 여인은 자신의 공로를 곁들인 인간적인 호소로 사울의 기력 회복을 권하였습니다.

23절에 사울의 신하들도 그 여인과 동조하여 사울을 강권하였습니다.

사울은 그들의 말을 듣고 먹고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아쉽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만에 하나, 사울이 기왕 굶은 것 반쯤 죽을 때까지 굶고 하나님 앞에서 고통스러워했다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24절의 여인의 집에 있던 살진 송아지가 정당한 노동의 댓가로 얻은 것일리 없습니다.

신접 사기행위로 얻은 고기를 먹고 힘을 얻는 대신 죽기 직전까지 굶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사울은 망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사람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사울의 고통스러워함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암담한 현재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비통함일 뿐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영화에서 연합군에게 패망을 앞둔 히틀러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자살하는 장면에서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마일지라도 안타까운 연명이 느껴집니다.

사울이나 히틀러 같은 자도 진심으로 반성하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에 걸쳐 형성된 죄악의 습관으로 인해 자신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만 결국엔 죄가 사람을 다스립니다.

살다보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오래 걸리면 걸릴 수록 다시 돌아오는데도 더 오래 걸립니다.

본문의 사울의 최후를 보면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건성으로라도 매일 읽는 말씀과 형식적인 것 같더라도 매일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우리를 바꾸고 움직이는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습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습관을 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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