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냐 아기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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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7:1-4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전에도 다윗은 21장에서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피신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미친 사람 흉내를 내어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그 때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다윗의 비겁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전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다는 사실을 블레셋 사람들도 다 아는바라 다윗이 자신들에게 망명하여 사울에 대항하여 싸워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그러나 29장에서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앞두고 다윗의 참전을 반대하였음을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입니다.
그에 반해 2절의 가드 왕 아기스과 다윗은 원래 서로 적이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특별한 사이임을 사무엘상 29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29:6에 가드왕 아기스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는 표현을 통해 다윗의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가드왕 아기스가 사울에 쫓기는 다윗을 아끼는 차원에서 다윗을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였달라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다윗 또한 가드왕 아기스가 적이지만 그릇이 크고 현명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며 사울로 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4절에서 가드로 도망간 다윗을 사울이 더 이상 추격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가드왕 아기스의 세력이 막강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다윗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가드왕 아기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드왕 아기스를 세상을 의미합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궁극적으로 볼 때 세상은 냉혹하고 살벌합니다.
그러나 드물지만 때로는 세상은 친절하고 믿음직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1절의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앞으로의 미래가 불안해지고 더욱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그럴 때 가드왕 아기스와 같이 비록 세상에 속해있지만 믿음직하고 영향력있는 존재에 의지하게 됩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요청에 따라 시글락이라는 변방에서 다윗과 일행들이 머물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블레셋에서 거주한 기간을 명확히 기재하고 있습니다.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16개월 동안 다윗의 블레셋 거주를 성경은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셨지만 최소한 다윗은 16개월 동안 사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는 멀어졌지만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던 때보다는 형편이 나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가드왕 아기스를 의지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안타깝게도 유효기간이 짧았습니다.
다윗의 경우 16개월이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이 편협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이 꼭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더우기 가드왕 아기스처럼 세상에 속했지만 하나님을 존중해주는 사람들과도 척을 져야하는지 의문입니다.
모든 것을 둘로 나누는 것을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밤과 낮, 음과 양, 영과 육,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좌파 우파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0에서 49 퍼센트는 무조건 0 이고 51퍼센트부터 100 퍼센트까지는 무조건 100 퍼센트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냐 가드왕 아기스냐 무조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은 이원론적인 태도로 보입니다.
본문을 통해 오늘 설교의 주제는 무조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만 속하라고 마무리해도 당연한 듯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하는 것은 이원론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해도 이 설교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드왕 아기스와 같은 세상에 의지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게 됨을 보여줍니다.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10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다윗과 수하들은 시글락에 정착하여 어떻게 먹고 살까 궁리하던 중 주변의 약탈을 일삼는 아말렉 족속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인의 적인 아말렉 족속을 응징하면서 그들의 약탈물을 탈취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기가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거기에 멈추지않고 아기스 왕의 신임까지도 얻을 수 있는 일석삼조의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아말렉 족속을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11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을 살려두지 않고 모두 죽여 이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아기스를 속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니 다윗처럼 거짓말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듯 사람의 거짓말도 힘이 있습니다.
내가 한 거짓말이 남을 속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바꿉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16개월 동안의 거짓말로 인해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성경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29장
6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8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9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10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11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16개월 동안 다윗은 차마 이스라엘 동족들을 죽이지 못하고 아말렉 족속을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속였던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듭 블레셋에 충성을 맹세하고 아기스를 주라고 칭하였습니다.
거짓말이 습관이 되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거짓말이 나를 조종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거짓말은 결국에 남이 아닌 나를 파괴하고 맙니다.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오면서 거짓말로 아기스를 완전히 속이고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 다윗에게 거짓말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30장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아말렉 족속을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속였던 다윗이 이번에는 도리어 아말렉 족속에게 당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거짓말로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얻은 약탈물들 모두와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아말렉 족속에게 약탈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거짓말로 흥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실리가 없습니다.
거짓말로 흥한 자 거짓 말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한 자의 두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은 거짓말로 얻었던 불안한 성공에 언제나 마음이 뒤숭숭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거짓말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 다윗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회초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픈 회초리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는 또 다른 확신을 얻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1년 4개월 동안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 가드왕 아기스에게 의지하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집 나간 탕자처럼 하나님을 떠나 가드왕 아기스에게 갔던 다윗은 16개월 만에 돌아와서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이전보다 더 큰 확신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최악의 순간에 좌절하고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결론)
밤과 낮이 있지만 오전과 오후도 있습니다.
좌파 우파가 나뉘어 싸우지만 선거 결과는 중도가 결정합니다.
탕수육도 찍먹과 부먹으로 갈리지만 결국 소스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중심은 결국엔 둘 중 하나,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결코 나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중심 만큼은 이원론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가드왕 아기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직하고 영향력있는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고 어울릴 수 있지만 그들을 의지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사람에게 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 관계유지를 위해 거짓말해야하고 그들을 주로 섬겨야 하고 누군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종이 되고 맙니다.
마음에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아무리 마음에 들고 뜻이 맞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내려놓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가드왕 아기스가 사람이 아닌, 어떤 가치나 사상, 또는 체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나 과학 기술, 예술, 또는 스포츠 등도 마음의 중심이 거기에 있다면 얼마든지 가드왕 아기스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나 과학 기술, 예술, 또는 스포츠 등과 같은 여러 분야들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유일한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의 중심인 하나님으로부터 나뉠 수도 공유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한 분 독점체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마음의 중심이 다른 곳에 있으면 불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원래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즉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존재인 것입니다.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죄짓고 거짓말해야 한다면 오늘 본문을 깊이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거짓말은 없습니다. 그에 따른 책임만 커질 뿐입니다.
불안한 세상과의 어정쩡한 동거는 그만 접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전에도 다윗은 21장에서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피신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미친 사람 흉내를 내어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그 때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다윗의 비겁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전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다는 사실을 블레셋 사람들도 다 아는바라 다윗이 자신들에게 망명하여 사울에 대항하여 싸워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그러나 29장에서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앞두고 다윗의 참전을 반대하였음을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입니다.
그에 반해 2절의 가드 왕 아기스과 다윗은 원래 서로 적이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특별한 사이임을 사무엘상 29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29:6에 가드왕 아기스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는 표현을 통해 다윗의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가드왕 아기스가 사울에 쫓기는 다윗을 아끼는 차원에서 다윗을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였달라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다윗 또한 가드왕 아기스가 적이지만 그릇이 크고 현명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며 사울로 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4절에서 가드로 도망간 다윗을 사울이 더 이상 추격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가드왕 아기스의 세력이 막강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다윗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가드왕 아기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드왕 아기스를 세상을 의미합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궁극적으로 볼 때 세상은 냉혹하고 살벌합니다.
그러나 드물지만 때로는 세상은 친절하고 믿음직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1절의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앞으로의 미래가 불안해지고 더욱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그럴 때 가드왕 아기스와 같이 비록 세상에 속해있지만 믿음직하고 영향력있는 존재에 의지하게 됩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요청에 따라 시글락이라는 변방에서 다윗과 일행들이 머물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블레셋에서 거주한 기간을 명확히 기재하고 있습니다.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16개월 동안 다윗의 블레셋 거주를 성경은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셨지만 최소한 다윗은 16개월 동안 사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는 멀어졌지만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던 때보다는 형편이 나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가드왕 아기스를 의지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안타깝게도 유효기간이 짧았습니다.
다윗의 경우 16개월이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이 편협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이 꼭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더우기 가드왕 아기스처럼 세상에 속했지만 하나님을 존중해주는 사람들과도 척을 져야하는지 의문입니다.
모든 것을 둘로 나누는 것을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밤과 낮, 음과 양, 영과 육,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좌파 우파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0에서 49 퍼센트는 무조건 0 이고 51퍼센트부터 100 퍼센트까지는 무조건 100 퍼센트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냐 가드왕 아기스냐 무조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은 이원론적인 태도로 보입니다.
본문을 통해 오늘 설교의 주제는 무조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만 속하라고 마무리해도 당연한 듯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하는 것은 이원론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해도 이 설교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드왕 아기스와 같은 세상에 의지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게 됨을 보여줍니다.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10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다윗과 수하들은 시글락에 정착하여 어떻게 먹고 살까 궁리하던 중 주변의 약탈을 일삼는 아말렉 족속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인의 적인 아말렉 족속을 응징하면서 그들의 약탈물을 탈취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기가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거기에 멈추지않고 아기스 왕의 신임까지도 얻을 수 있는 일석삼조의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아말렉 족속을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11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을 살려두지 않고 모두 죽여 이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아기스를 속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니 다윗처럼 거짓말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듯 사람의 거짓말도 힘이 있습니다.
내가 한 거짓말이 남을 속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바꿉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16개월 동안의 거짓말로 인해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성경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29장
6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8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9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10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11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16개월 동안 다윗은 차마 이스라엘 동족들을 죽이지 못하고 아말렉 족속을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속였던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듭 블레셋에 충성을 맹세하고 아기스를 주라고 칭하였습니다.
거짓말이 습관이 되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거짓말이 나를 조종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거짓말은 결국에 남이 아닌 나를 파괴하고 맙니다.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오면서 거짓말로 아기스를 완전히 속이고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 다윗에게 거짓말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30장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아말렉 족속을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속였던 다윗이 이번에는 도리어 아말렉 족속에게 당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거짓말로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얻은 약탈물들 모두와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아말렉 족속에게 약탈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거짓말로 흥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실리가 없습니다.
거짓말로 흥한 자 거짓 말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한 자의 두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은 거짓말로 얻었던 불안한 성공에 언제나 마음이 뒤숭숭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거짓말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 다윗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회초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픈 회초리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는 또 다른 확신을 얻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1년 4개월 동안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 가드왕 아기스에게 의지하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집 나간 탕자처럼 하나님을 떠나 가드왕 아기스에게 갔던 다윗은 16개월 만에 돌아와서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이전보다 더 큰 확신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최악의 순간에 좌절하고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결론)
밤과 낮이 있지만 오전과 오후도 있습니다.
좌파 우파가 나뉘어 싸우지만 선거 결과는 중도가 결정합니다.
탕수육도 찍먹과 부먹으로 갈리지만 결국 소스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중심은 결국엔 둘 중 하나,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결코 나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중심 만큼은 이원론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가드왕 아기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직하고 영향력있는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고 어울릴 수 있지만 그들을 의지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사람에게 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 관계유지를 위해 거짓말해야하고 그들을 주로 섬겨야 하고 누군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종이 되고 맙니다.
마음에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아무리 마음에 들고 뜻이 맞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내려놓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가드왕 아기스가 사람이 아닌, 어떤 가치나 사상, 또는 체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나 과학 기술, 예술, 또는 스포츠 등도 마음의 중심이 거기에 있다면 얼마든지 가드왕 아기스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나 과학 기술, 예술, 또는 스포츠 등과 같은 여러 분야들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유일한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의 중심인 하나님으로부터 나뉠 수도 공유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한 분 독점체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마음의 중심이 다른 곳에 있으면 불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원래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즉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존재인 것입니다.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죄짓고 거짓말해야 한다면 오늘 본문을 깊이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거짓말은 없습니다. 그에 따른 책임만 커질 뿐입니다.
불안한 세상과의 어정쩡한 동거는 그만 접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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