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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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4:1-4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첩보를 듣고 삼천 명의 수색대를 이끌고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엔게디 광야의 뜨거운 열기와 험준한 산세에 지친 사울은 시원한 굴 속에 들어가 쉬다 잠간 잠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굴 속에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라며 사울을 죽이자고 다윗을 재촉하였습니다.
이런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만 죽으면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를 면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잠든 사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선 다윗은 한 칼에 사울을 죽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윗의 마음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그의 옷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의 마음이 찔린 것은 사울의 옷을 벤 행위 자체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람들의 말에 잠시나마 흔들려 사울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의 마음 자체에 가책을 느꼈던 것입니다.
:6-7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은 자신 대신 사울을 죽이겠다고 나서는 부하들을 엄히 금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된 사울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구약의 의롭다는 말은 '공정' '올바른' '정정당당함' 으로 쓰입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은 다윗만 의롭고 다윗의 사람들은 반드시 불의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먼저 사울이 아무런 죄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니 '자기방어권' '정당방위' 에 의거 사울을 죽이는 것은 충분히 '의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의로움' 은 저마다의 상황과 견해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의로움'은 달랐습니다.
구약의 의로움은 반드시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의롭다라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옳다라는 말이 됩니다.
인간적인 명분이나 사회적 통념, 도덕적 상식에 비추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아무리 악하여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이므로 사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다툼과 갈등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의하고 다른 한 쪽은 의로워서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들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서로 조금의 양보도 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4:1에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엄청난 확신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오늘 다윗처럼 자신의 사람들에 의해 잠시 흔들렸지만 다시 하나님께 기준을 맞추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인간은 '믿음'을 가져야 진정한 잠재력이 터져 나옵니다.
다윗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준을 맞추자 자신도 모르는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8-10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굴에서 나가는 사울을 굳이 불러서 자신을 드러내는 다윗의 행동은 본인의 목숨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수하들 수백명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무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힘을 얻은 다윗은 사울에게 과감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기개 앞에 삼천을 거느린 사울도 기에 눌려 다윗에게 사과하고 물러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울의 삼천 군사들을 물리친 이는 다윗 한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은 얼마나 오래 교회다니고 헌금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한다고 수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믿음이 더 크냐 작냐 비교할 대상도 아닙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들로 믿음을 축적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느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자신의 정당함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사울은 하나님 마저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버렸습니다.
믿음은 의로움의 기준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반대로 죄는 구약에 522번 사용된 '챠타' 라고 해서 '표적을 벗어난' 이라는 신약의 하말타노와 같은 의미입니다.
얼마나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노력했느냐가 의로움이 아닙니다.
나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기준을 맞추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 나의 의로움에 비해 하나님의 기준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나의 의로움이라면 한 방에 사울을 죽이고 쉽게쉽게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니 사울을 죽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또 오랜 시간 고생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맞추다보면 그에 따른 결과로 원하든 원치 않든 수고와 노력이 저절로 따라오기에 믿음을 수고와 노력으로 착각합니다.
무엇인가 꾸준히 노력하고 수고해서 자신의 믿음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고민과 생각없는 반복적인 육체적 수고를 믿음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매 순간 고민하며 이것은 나의 의로움인가 하나님의 기준인가 갈등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하는 확률을 높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실은 내가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 충만해지고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셔서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성령님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선택이며 궁극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진짜 믿음을 가집시다. 아멘.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첩보를 듣고 삼천 명의 수색대를 이끌고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엔게디 광야의 뜨거운 열기와 험준한 산세에 지친 사울은 시원한 굴 속에 들어가 쉬다 잠간 잠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굴 속에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라며 사울을 죽이자고 다윗을 재촉하였습니다.
이런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만 죽으면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를 면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잠든 사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선 다윗은 한 칼에 사울을 죽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윗의 마음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그의 옷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의 마음이 찔린 것은 사울의 옷을 벤 행위 자체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람들의 말에 잠시나마 흔들려 사울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의 마음 자체에 가책을 느꼈던 것입니다.
:6-7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은 자신 대신 사울을 죽이겠다고 나서는 부하들을 엄히 금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된 사울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구약의 의롭다는 말은 '공정' '올바른' '정정당당함' 으로 쓰입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은 다윗만 의롭고 다윗의 사람들은 반드시 불의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먼저 사울이 아무런 죄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니 '자기방어권' '정당방위' 에 의거 사울을 죽이는 것은 충분히 '의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의로움' 은 저마다의 상황과 견해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의로움'은 달랐습니다.
구약의 의로움은 반드시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의롭다라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옳다라는 말이 됩니다.
인간적인 명분이나 사회적 통념, 도덕적 상식에 비추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아무리 악하여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이므로 사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다툼과 갈등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의하고 다른 한 쪽은 의로워서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들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서로 조금의 양보도 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4:1에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엄청난 확신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오늘 다윗처럼 자신의 사람들에 의해 잠시 흔들렸지만 다시 하나님께 기준을 맞추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인간은 '믿음'을 가져야 진정한 잠재력이 터져 나옵니다.
다윗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준을 맞추자 자신도 모르는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8-10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굴에서 나가는 사울을 굳이 불러서 자신을 드러내는 다윗의 행동은 본인의 목숨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수하들 수백명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무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힘을 얻은 다윗은 사울에게 과감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기개 앞에 삼천을 거느린 사울도 기에 눌려 다윗에게 사과하고 물러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울의 삼천 군사들을 물리친 이는 다윗 한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은 얼마나 오래 교회다니고 헌금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한다고 수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믿음이 더 크냐 작냐 비교할 대상도 아닙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들로 믿음을 축적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느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자신의 정당함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사울은 하나님 마저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버렸습니다.
믿음은 의로움의 기준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반대로 죄는 구약에 522번 사용된 '챠타' 라고 해서 '표적을 벗어난' 이라는 신약의 하말타노와 같은 의미입니다.
얼마나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노력했느냐가 의로움이 아닙니다.
나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기준을 맞추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 나의 의로움에 비해 하나님의 기준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나의 의로움이라면 한 방에 사울을 죽이고 쉽게쉽게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니 사울을 죽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또 오랜 시간 고생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맞추다보면 그에 따른 결과로 원하든 원치 않든 수고와 노력이 저절로 따라오기에 믿음을 수고와 노력으로 착각합니다.
무엇인가 꾸준히 노력하고 수고해서 자신의 믿음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고민과 생각없는 반복적인 육체적 수고를 믿음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매 순간 고민하며 이것은 나의 의로움인가 하나님의 기준인가 갈등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하는 확률을 높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실은 내가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 충만해지고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셔서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성령님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선택이며 궁극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진짜 믿음을 가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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