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픔을 아시나요
페이지 정보
본문
금주는 고난주간입니다. 기독교에서 왜 고난주간으로 지키는 것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분과 나를 대신하여 죄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 아닌 죄수가 되어 해골 곳이라는 갈보리 언덕 그 십자가 위에서 그 모진 고통을 참아가며 대신 죽으신 그 성 금요일이 들어있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요 1년에 단 한번 지키는 기독교에서는 뜻 깊고 가장 의미 있는 주간입니다. 적어도 믿음이 있는 크리스챤이라면 이 갈보리 언덕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가슴이 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모진 세파에 다 말라 버렸다고 해도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애처로운 그 마음을 생각하면 아직 뼈속에라도 남아있는 진한 눈물방울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눈시울을 적시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도 버리는 세상입니다. 6.25 당시 저희 집안 형님 한분이 뒤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안고 가던 딸아이를 눈 속에 던져 버리고 도망간 이야기가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 살기가 좀 힘들어도 부모도 자식도 다 팽개쳐 버리는 비정한 세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낙원의 주인이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도록 만(萬)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않았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난 사특한 마귀의 말을 더 믿고 단 한 가지 이것만은 안 된다고 경계하신 금단의 실과마저 따먹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배은망덕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 아담의 후예인 우리는 미운 짓만 골라서 하며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창조해 주신 산이나, 바다나 나무나, 돌멩이를 오히려 신으로 만들어 그것들에게 복을 달라고 빌고 섬길 정도로 그렇게 유치해 져 버린 인간들을 그래도 버리지 않고 구원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매세지를 주셨습니까? 온갖 자연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啓示)하고,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있는 감정과 영성을 자극하여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그 깊고 넓은 한없는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도 안타깝고 애처로워 끝내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인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직접 내려 보내시어 최종적인 구원의 수단을 강구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 주일학생들도 줄줄 암송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입으로 백 천번 줄줄 외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슴으로 느끼고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그처럼 사랑하시어 하나밖에 없는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이 땅에 보내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어 죽게 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대신 치루게 하여 주셨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귀한 줄 모르겠습니까? 아이들을 열 명 낳아 기르는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님 부부에게 친구 목사님이 보기가 딱해서 한 아이를 양자로 달라고 했더니 입도 덜고 그 아이에게 배불리 먹고 살게 하게하고 싶어서 목사님이 선뜻 대답했답니다. 그러나 밤에 사모님과 그 문제를 놓고 의논하다 그 자식 얼굴을 보니 너무도 가슴이 아파 죽어도 같이 살자고 목사님 부부가 서로 손을 붙잡고 흐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처럼 비참하게 죽게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소설 이야기가 아닙니까? 수천 년 역사를 두고 사람들은 죄를 범했을 때 갖가지 의식(依式)으로 제물을 드려 그때그때마다 일시적 속죄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피해를 준 사람에게는 상응한 돈과 물질로 죄값을 치루었고 하나님에게는 소나 양같은 짐승을 대신 잡아 피를 흘리게 하고 각을 떠서 제물을 드림으로 속죄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그러한 모든 제사행위 뒤에는 장차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시어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치루시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마지막 제사가 곧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구약시대에 행했던 그러한 제사를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중보자 그 예수그리스도의 피공로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 감옥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 떨고 있던 간수장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고 당당하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소설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인류 역사이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고민과 아픔이 실현된 사건입니다. 장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죽게 해야 할 가슴 찢어지는 아픔으로 고민하시던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하나님의 쓰린 마음을 다소나마 알려주고 싶어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사건인 것입니다.
적어도 인류역사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역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그 아픔을 맛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75세, 부인 사라가 65세 되던 해에 아들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나도록 그 약속은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25년후에 100세된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기다리다 낳은 아들이기에 그만큼 귀하게 느끼지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때에야 낳게 하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시는 능치 못한일이 없는 전능자이심을 분명히 확신케 해 주시려는 깊으신 뜻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낳은 외아들 이삭은 건강하게, 총명하게, 귀공자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밑도 끝도 없이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까무라 쳤을 것입니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다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학교에 있다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없어졌다는 지점을 빙빙 돌며 목메어 불러보는데 점점 어두워져가는 시간이 그렇게 공포스러웠습니다. 그 또래 아이만 보아도 다 지선이 같이 보였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의 그 아프고 쓰린 심정을 다소나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앞세우고 사흘 길 되는 모리아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등에 장작을 지우고 자기는 큰 칼을 든 체 멋모르고 좋아 껑충껑충 뛰어가는 그 이삭을 바라볼 때 아브라함은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게 하여 100세에 낳은 아들을 다 키워 놓으니까 내 손으로 죽여 각을 떠서 장작 더미위에 태워 제사를 지내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무조건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 아브라함이고 해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다리가 떨려 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삭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은 아브라함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스스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하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지정된 장소까지 간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화목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 이삭의 목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신앙도 좋고, 순종도 좋지만 어찌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낳지 못할 자식을 낳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고 싶고 자신의 팔을 자르거나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묶여 누워 있지만 꼭 이렇게 나를 죽여야 합니까? 애원하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는 이삭의 목을 찌르려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의 죽음은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다고 하지 않습니까? 야곱의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 버리고 난 후 요셉의 옷에 숫염소 피를 묻혀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 같다고 거짓말로 고했을 때 야곱이 그 요셉의 옷을 끌어안고 어떤 통곡을 했습니까?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통곡하며 야곱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다고 했습니다.(창37:33-34) 또 자식들이 위로할 때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이 죽음을 당한 부모의 아픔이요 쓰라림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혹독한 시험을 주셨던 것입니까? 그것은 장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죽게 해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적어도 믿음으로 통하여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한 아브라함에게 만분의 일이라도 느껴보게 하시기 위한 묵시적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픔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만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우리가 멸망의 심판을 당하지 않고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에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타락성을 아셨기에 창조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아픔이요, 구원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의 형틀에 양손과 양발이 못 박혀 죽어가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계셨을 하나님의 아픔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이삭처럼 순종하고 참고 죽어가던 그 예수님의 아픔이 어떠했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마지막이요, 최후의 제물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이 출생된 예수그리스도를 구약의 마지막 제물로 사용하셨고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 값을 한꺼번에 치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이요 하나님 사랑의 폭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하실 때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아팠으면 3시간 동안이나 온 땅이 어두움으로 캄캄하게 했겠습니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굴으시고 가슴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는 것 아닙니까? 그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신 마지막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니 마지막 희생의 제물이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절을 앞두고 이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독일의 진센돌프 백작처럼 그 희생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예수님은 부활하셔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 무엇을 부탁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 놀라운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능력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고난절을 보내면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을 생각합시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속량의 제물로 그처럼 처참하게 죽게 하신 그 하나님의 쓰리고 아픔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분과 나를 대신하여 죄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 아닌 죄수가 되어 해골 곳이라는 갈보리 언덕 그 십자가 위에서 그 모진 고통을 참아가며 대신 죽으신 그 성 금요일이 들어있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요 1년에 단 한번 지키는 기독교에서는 뜻 깊고 가장 의미 있는 주간입니다. 적어도 믿음이 있는 크리스챤이라면 이 갈보리 언덕의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가슴이 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모진 세파에 다 말라 버렸다고 해도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애처로운 그 마음을 생각하면 아직 뼈속에라도 남아있는 진한 눈물방울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눈시울을 적시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도 버리는 세상입니다. 6.25 당시 저희 집안 형님 한분이 뒤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안고 가던 딸아이를 눈 속에 던져 버리고 도망간 이야기가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 살기가 좀 힘들어도 부모도 자식도 다 팽개쳐 버리는 비정한 세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낙원의 주인이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도록 만(萬)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않았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난 사특한 마귀의 말을 더 믿고 단 한 가지 이것만은 안 된다고 경계하신 금단의 실과마저 따먹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배은망덕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 아담의 후예인 우리는 미운 짓만 골라서 하며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창조해 주신 산이나, 바다나 나무나, 돌멩이를 오히려 신으로 만들어 그것들에게 복을 달라고 빌고 섬길 정도로 그렇게 유치해 져 버린 인간들을 그래도 버리지 않고 구원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매세지를 주셨습니까? 온갖 자연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啓示)하고,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있는 감정과 영성을 자극하여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그 깊고 넓은 한없는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도 안타깝고 애처로워 끝내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인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직접 내려 보내시어 최종적인 구원의 수단을 강구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 주일학생들도 줄줄 암송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입으로 백 천번 줄줄 외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슴으로 느끼고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그처럼 사랑하시어 하나밖에 없는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이 땅에 보내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어 죽게 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대신 치루게 하여 주셨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귀한 줄 모르겠습니까? 아이들을 열 명 낳아 기르는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님 부부에게 친구 목사님이 보기가 딱해서 한 아이를 양자로 달라고 했더니 입도 덜고 그 아이에게 배불리 먹고 살게 하게하고 싶어서 목사님이 선뜻 대답했답니다. 그러나 밤에 사모님과 그 문제를 놓고 의논하다 그 자식 얼굴을 보니 너무도 가슴이 아파 죽어도 같이 살자고 목사님 부부가 서로 손을 붙잡고 흐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처럼 비참하게 죽게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소설 이야기가 아닙니까? 수천 년 역사를 두고 사람들은 죄를 범했을 때 갖가지 의식(依式)으로 제물을 드려 그때그때마다 일시적 속죄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피해를 준 사람에게는 상응한 돈과 물질로 죄값을 치루었고 하나님에게는 소나 양같은 짐승을 대신 잡아 피를 흘리게 하고 각을 떠서 제물을 드림으로 속죄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그러한 모든 제사행위 뒤에는 장차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시어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치루시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마지막 제사가 곧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구약시대에 행했던 그러한 제사를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중보자 그 예수그리스도의 피공로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 감옥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 떨고 있던 간수장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고 당당하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소설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인류 역사이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고민과 아픔이 실현된 사건입니다. 장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죽게 해야 할 가슴 찢어지는 아픔으로 고민하시던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하나님의 쓰린 마음을 다소나마 알려주고 싶어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사건인 것입니다.
적어도 인류역사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역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그 아픔을 맛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75세, 부인 사라가 65세 되던 해에 아들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나도록 그 약속은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25년후에 100세된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기다리다 낳은 아들이기에 그만큼 귀하게 느끼지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때에야 낳게 하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시는 능치 못한일이 없는 전능자이심을 분명히 확신케 해 주시려는 깊으신 뜻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낳은 외아들 이삭은 건강하게, 총명하게, 귀공자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밑도 끝도 없이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까무라 쳤을 것입니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다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학교에 있다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없어졌다는 지점을 빙빙 돌며 목메어 불러보는데 점점 어두워져가는 시간이 그렇게 공포스러웠습니다. 그 또래 아이만 보아도 다 지선이 같이 보였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의 그 아프고 쓰린 심정을 다소나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앞세우고 사흘 길 되는 모리아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등에 장작을 지우고 자기는 큰 칼을 든 체 멋모르고 좋아 껑충껑충 뛰어가는 그 이삭을 바라볼 때 아브라함은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게 하여 100세에 낳은 아들을 다 키워 놓으니까 내 손으로 죽여 각을 떠서 장작 더미위에 태워 제사를 지내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무조건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 아브라함이고 해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다리가 떨려 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삭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은 아브라함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스스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하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지정된 장소까지 간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화목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 이삭의 목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신앙도 좋고, 순종도 좋지만 어찌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낳지 못할 자식을 낳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고 싶고 자신의 팔을 자르거나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묶여 누워 있지만 꼭 이렇게 나를 죽여야 합니까? 애원하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는 이삭의 목을 찌르려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의 죽음은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다고 하지 않습니까? 야곱의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 버리고 난 후 요셉의 옷에 숫염소 피를 묻혀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 같다고 거짓말로 고했을 때 야곱이 그 요셉의 옷을 끌어안고 어떤 통곡을 했습니까?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통곡하며 야곱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다고 했습니다.(창37:33-34) 또 자식들이 위로할 때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이 죽음을 당한 부모의 아픔이요 쓰라림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혹독한 시험을 주셨던 것입니까? 그것은 장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죽게 해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적어도 믿음으로 통하여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한 아브라함에게 만분의 일이라도 느껴보게 하시기 위한 묵시적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픔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만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우리가 멸망의 심판을 당하지 않고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에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타락성을 아셨기에 창조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아픔이요, 구원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의 형틀에 양손과 양발이 못 박혀 죽어가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계셨을 하나님의 아픔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이삭처럼 순종하고 참고 죽어가던 그 예수님의 아픔이 어떠했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마지막이요, 최후의 제물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이 출생된 예수그리스도를 구약의 마지막 제물로 사용하셨고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 값을 한꺼번에 치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이요 하나님 사랑의 폭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하실 때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아팠으면 3시간 동안이나 온 땅이 어두움으로 캄캄하게 했겠습니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굴으시고 가슴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는 것 아닙니까? 그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신 마지막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니 마지막 희생의 제물이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절을 앞두고 이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독일의 진센돌프 백작처럼 그 희생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예수님은 부활하셔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 무엇을 부탁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 놀라운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능력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고난절을 보내면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을 생각합시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속량의 제물로 그처럼 처참하게 죽게 하신 그 하나님의 쓰리고 아픔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