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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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톱 밥 더미에서 작고 값진 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시계를 찾아주면 후한 상급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 조금만 아이가 들어가더니 간단히 찾아가지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기하여 “어떻게 찾았느냐?” 묻자 소리를 듣고 찾았지요.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이 엄청난 성경이라는 진리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터치(touch)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건드리시고, 생활의 지혜를 일깨워 주시고, 성공의 첩경을 제시해주시는 하나님의 영음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덕성과 관용을 배웁시다.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하나님이 사랑의 음성을 들읍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영안의 귀가 열려서 심령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계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은 어떤 관계입니까? 롯은 아브라함의 셋째 동생 하란의 아들로 아버지 하란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큰 아버지 아브라함이 어렸을 때부터 친 아들처럼 기르고 살림을 차려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소유가 풍부해 지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종들 간에 자주 다툼이 벌어지자 자연히 주인들까지 속상할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8-9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참으로 큰 바다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마음입니다. 여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화평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 꽃피어야 할 마음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괘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오셔서 실컷 고생하시면서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해 주시고 죽은 자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떠나갔고 군중들은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무작정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얼마나 억울하고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을 원수나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까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오늘날도 그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사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너그러움의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이 있었습니다.
1. 사람을 골육으로 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골육이란 골육지친의 준말로 뼈와 살의 관계란 뜻입니다. 8절에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했습니다. 주변 사람을 골육으로 보는 마음이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뼈와 살이 싸워 보아야 서로 손해만 봅니다. 뼈없는 살이나 살없는 뼈를 우리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인류 모두는 다 친척이요, 골육지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핏줄입니다. 모두 친척관계입니다. 김씨, 이씨, 박씨; 다 따져 올라가면 결국 한 할아버지 후손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우리는 모두 피를 나눈 형제 자매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네 골육입니다” 누가 뼈요, 살인지 모르지만 아브라함 같은 그러한 마음을 가집시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구원받은 한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만나면 더 반갑습니다. “예수를 믿겠다”. 는 사람만 만나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처음에 좋았으면 끝까지 좋아야 합니다. 형제는 영원한 형제인 것입니다.
2. 아브라함에게는 다투지 않고 참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 아브라함은 서로 다투지 않고 참으려는 마음을 가슴 깊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큰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길에 올랐습니다. 자식의 구데타라 그 처량함은 더 심했을 것입니다. 이때 다윗 아래서 록을 먹고 살았던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계속 따라오며 먼지까지 날리며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신하 장군이 “저 죽은 개같은자가 왕을 저주하니 목을 베게 해 주십시요”라고 흥분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를 시켜 나를 책망하심이니 어찌 그리하겠느냐?”고 오히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을 인정하고 참으면서 다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궁정에 있을 때 자기 백성이 학대당하는 장면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렇게 다혈질이던 모세가 나중에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할 정도로 온유해졌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응지 양지 다 겪어 보고 나이가 들어가니까 지난날의 생활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때 왜 내가 더 참지 못했을까? 왜 그런말을 했을까? 왜 다투었을까? 그래서 내가 무슨 이익을 보았던가?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패가름 했던 일이나 언쟁했던 일들이 지금 생각하면 가소롭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 너그러워집니다. 한발자국씩만 물러나서 생각합시다. 알렉산더 대왕은 술에 만취된 후 홧김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창을 던져 죽였습니다. 친구도 죽고 그 뒤 자신도 파멸되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 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새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19-27) 솔로몬의 잠언서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다투지 않으려는 관용하는 마음의 소유자들이 다 됩시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 아브라함에게는 남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좋은 곳을 먼저 네가 선택하라, 나쁜 땅은 내가 갖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너그러운 마음입니까?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정이 넘치고 너그럽습니까?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잘못되고 롯만 부자가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더 큰 부자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심성을 하나님은 다 아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마음이 통하니 좋아하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라고까지 부르셨습니다.
4. 아브라함은 희생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롯에게 좋은 땅을 갖게 해 주고 아브라함은 척박한 헤브론 산지를 택하였습니다. 그 땅은 물이 없는 땅, 목초가 없는 땅, 높은 고원지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싸움에 질 것 같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땅을 고를 줄 몰라 그런 것도 아닙니다. 롯을 위해 양보 해준 것입니다. 자기가 더 희생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롯을 척박한 곳으로 가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다운 관용이 있습니다. 양보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양보하는 것이 진짜 양보입니다.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포기하는 것이 진짜 포기입니다.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양보하는 것은 패배이지 양보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양보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양보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 오히려 양보하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져 줄 이유도 없고, 질 수도 없지만 그래도 저 주는 사람이 사실상 이긴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승자들이 다 됩시다. 내가 못나서 졌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며 양보하고 희생하는 진정한 승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아브라함은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좋은 땅을 차지한다고 꼭 부자가 되고 축복 받는 것도 아닙니다. 나쁜 땅을 갖게 되었다고 저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렸다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하여 떠나는 롯을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흐뭇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성공을 빌었습니다. 우리는 실컷 양보하고 죄 지으면 안 됩니다. 또 양보 받은 사람은 더욱 겸손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너그러운 마음, 하나님과 통하는 마음을 가졌더니 결국 어떠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엄청난 물질 축복도 받았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자녀들이 창성했습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사람들을 모두 골육지친으로 여기고, 다투지 아니하며 남 잘 되기를 바랍시다. 서로 희생하며 양보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한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모습이며 그 생활이 예수님을 증명하는 편지입니다. 나 때문에 부흥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내가 곧 교회 부흥이 주인공이 됩시다.
1. 사람을 골육으로 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골육이란 골육지친의 준말로 뼈와 살의 관계란 뜻입니다. 8절에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했습니다. 주변 사람을 골육으로 보는 마음이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뼈와 살이 싸워 보아야 서로 손해만 봅니다. 뼈없는 살이나 살없는 뼈를 우리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인류 모두는 다 친척이요, 골육지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핏줄입니다. 모두 친척관계입니다. 김씨, 이씨, 박씨; 다 따져 올라가면 결국 한 할아버지 후손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우리는 모두 피를 나눈 형제 자매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네 골육입니다” 누가 뼈요, 살인지 모르지만 아브라함 같은 그러한 마음을 가집시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구원받은 한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만나면 더 반갑습니다. “예수를 믿겠다”. 는 사람만 만나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처음에 좋았으면 끝까지 좋아야 합니다. 형제는 영원한 형제인 것입니다.
2. 아브라함에게는 다투지 않고 참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 아브라함은 서로 다투지 않고 참으려는 마음을 가슴 깊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큰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길에 올랐습니다. 자식의 구데타라 그 처량함은 더 심했을 것입니다. 이때 다윗 아래서 록을 먹고 살았던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계속 따라오며 먼지까지 날리며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신하 장군이 “저 죽은 개같은자가 왕을 저주하니 목을 베게 해 주십시요”라고 흥분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를 시켜 나를 책망하심이니 어찌 그리하겠느냐?”고 오히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을 인정하고 참으면서 다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궁정에 있을 때 자기 백성이 학대당하는 장면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렇게 다혈질이던 모세가 나중에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할 정도로 온유해졌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응지 양지 다 겪어 보고 나이가 들어가니까 지난날의 생활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때 왜 내가 더 참지 못했을까? 왜 그런말을 했을까? 왜 다투었을까? 그래서 내가 무슨 이익을 보았던가?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패가름 했던 일이나 언쟁했던 일들이 지금 생각하면 가소롭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 너그러워집니다. 한발자국씩만 물러나서 생각합시다. 알렉산더 대왕은 술에 만취된 후 홧김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창을 던져 죽였습니다. 친구도 죽고 그 뒤 자신도 파멸되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 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새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19-27) 솔로몬의 잠언서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다투지 않으려는 관용하는 마음의 소유자들이 다 됩시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 아브라함에게는 남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좋은 곳을 먼저 네가 선택하라, 나쁜 땅은 내가 갖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너그러운 마음입니까?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정이 넘치고 너그럽습니까?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잘못되고 롯만 부자가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더 큰 부자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심성을 하나님은 다 아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마음이 통하니 좋아하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라고까지 부르셨습니다.
4. 아브라함은 희생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롯에게 좋은 땅을 갖게 해 주고 아브라함은 척박한 헤브론 산지를 택하였습니다. 그 땅은 물이 없는 땅, 목초가 없는 땅, 높은 고원지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싸움에 질 것 같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땅을 고를 줄 몰라 그런 것도 아닙니다. 롯을 위해 양보 해준 것입니다. 자기가 더 희생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롯을 척박한 곳으로 가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다운 관용이 있습니다. 양보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양보하는 것이 진짜 양보입니다.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포기하는 것이 진짜 포기입니다.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양보하는 것은 패배이지 양보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양보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양보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 오히려 양보하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져 줄 이유도 없고, 질 수도 없지만 그래도 저 주는 사람이 사실상 이긴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승자들이 다 됩시다. 내가 못나서 졌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며 양보하고 희생하는 진정한 승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아브라함은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좋은 땅을 차지한다고 꼭 부자가 되고 축복 받는 것도 아닙니다. 나쁜 땅을 갖게 되었다고 저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렸다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하여 떠나는 롯을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흐뭇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성공을 빌었습니다. 우리는 실컷 양보하고 죄 지으면 안 됩니다. 또 양보 받은 사람은 더욱 겸손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너그러운 마음, 하나님과 통하는 마음을 가졌더니 결국 어떠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엄청난 물질 축복도 받았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자녀들이 창성했습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사람들을 모두 골육지친으로 여기고, 다투지 아니하며 남 잘 되기를 바랍시다. 서로 희생하며 양보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한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모습이며 그 생활이 예수님을 증명하는 편지입니다. 나 때문에 부흥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내가 곧 교회 부흥이 주인공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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