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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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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3,459회 작성일 08-02-20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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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뜯어보니 “사람, 사람, 사람” 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내심 약간 불쾌 했답니다. “내가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하니까 충고하느라고 이런 편지를 보냈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편지를 보낸 친구를 만났는데 “여보게,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내가 너무도 자네에게 사람 노릇을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파서 그런 편지를 보냈네” 하더랍니다. 우리는 간혹 내 생각만 하고 오해 할 때가 많습니다. 나도 2007년도를 맞아 여러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신자, 신자, 신자”라고 쓰고 싶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신자면 신자냐 신자답게 살아야 신자지?” 라 는 뜻이 아니고 제가 신자답게 살다가 신자답게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쓰고 싶다는 뜻입니다. 금년에도 “잘 살아야 할 텐데” 어쩐지 가슴이 떨리고 울렁거립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각오가 단단해야 합니다. 무엇을 보고 누구를 본받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다나엘 호오돈이 쓴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납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난 마을 앞산 큰 바위에 사람의 얼굴 형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장차 이 마을에서 저 바위 얼굴 같은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누가 그런 인물일까?” 잔뜩 기대하면서 그런 사람이 나오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을 출신인 “큰 부자가 그 사람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인색하고 거만한 그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진 것은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사람이 누구일까? 그러한 꿈을 가지고 장성했던 그 아이가 바로 큰 바위 얼굴 같은 인물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금년에도 잘 살고 싶으십니까? 신자다운 신자답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닮고 싶은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름지기 기독교 신자라면 우리는 자나 깨나 예수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생각 해 봅시다.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의 성화에 못 이겨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저녁내 심문하며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가시면류관을 씌운 후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온갖 모욕을 다한 후 군중들 앞으로 데리고 나와 “이 사람을 보라(Behold the man)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금년에 누구를 바라보며 사시겠습니까? 누구를 기준삼고 사시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했습니다. 우리는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고 한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1.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보여 준 그 예수님의 모습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을 것입니다. 끝에 뼛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으로 저녁내 얻어 맞으셨습니다. 탱자나무 가시보다도 더 가늘고 질긴 가시덩쿨로 만든 면류관을 머리에 씌었습니다. 거기에다 거짓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님을 모욕하기 위해 자색 옷까지 입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얼굴이며 온 몸은 피범벅이 되어 붉디붉은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한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러한 망신을 당해야 했습니까? 왜 얻어맞고 피를 흘려야 했습니까? 그것은 곧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내 대신 죽으시기 위해 흘리신 피였던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백성들이 너무 거짓말만하여 평화로운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왕이 누구든지 거짓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기둥에 묶어 놓고 채찍으로 쳐 죽이겠다고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왕의 어머니가 제일 먼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라 안은 시끌시끌 했습니다. “어머니를 안 죽이면 왕도 거짓말쟁이다. 아니야, 왕이 어머니를 죽인다면 사랑이 없는 불효자식이다” 뻔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쑥덕쑥덕 했겠습니까? 목회자가 조금만 쉬면 “게으르다. 일을 열심히 하면 교인들 사정은 모르고 돈만 쓴다. 누구 살리려고 그런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교회에서도 말이 많은데 더욱이나 거짓말 때문에 골치 아픈 그 나라에서 얼마나 말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왕은 단호 했습니다. 어머니를 기둥에 묶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어머니를 감싸고 채찍으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왕은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주고 대신 어미만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가 보여준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그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 신자, 신자” 신자면 다 신자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살아야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전혀 희생하지 않고 나는 전혀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어른 대우만 받으려고 하고 권리를 주장하려는 그런 예수꾼 되지 말고 금년은 신자, 신자, 신자답게 살아봅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신자가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자란 바로 그런 자랑스런 크리스챤이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요즈음 새삼스럽게 개척교회 일이 생각납니다. 천막을 쳐 놓고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몸부림칠 때 눈 쌓인 천막 속에서 새벽에 기도하면 갑자가 십자가가 큰 기둥처럼 확대되어 눈앞으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그때는 성령님이 용기를 주시려고 그러는 줄만 알았더니 “요즈음은 십자가를 바라보라, 너도 그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나이가 들면서 목회생활이 좀 편해져야 할 텐데 어쩐지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몸으로 힘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크게 보여주셨던 주님의 깊으신 뜻을 언뜻 언뜻 생각하면서 힘을 내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7년도에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승리를 합시다. 피투성이가 된 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2. 묵묵부답하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 죄가 있으시다면 전혀 죄가 없는 것이 죄였습니다. 도둑들은 정직한 사람을 바보 같다고 합니다. 깡패들은 싸우지 않으려는 사람, 순진한 사람을 미워하고 때립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있으셨다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병자들을 치료 해준 죄밖에 없습니다. 불의한 사람들, 착취하는 사람들,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책망한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예수님, 죄 없는 예수님은 죽어가면서도 한마디 변명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계셨습니다. 심문은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계속 되었지만 침묵만 지키셨습니다. 3시간 내내 유대인들은 큰 소리로 떠들었고, 빌라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을 정도로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꼭 한마디 하셨습니다.(11절)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피고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막강한 권력자인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담담하셨고 당당하셨습니다. 언제나 옳은 일을 하고 명분 있는 일을 하고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말을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심문하는 빌라도가 초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위압에 두려워했습니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든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보다도 안하는 사람들이 말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니 내용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한 고문을 받으시면서도 확실한 의지와 목표가 있기에 묵묵히 자신의 갈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의연한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금년에 믿음의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말 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실한 신앙인들이 다 되십시다. 말을 적게 하고 일은 많이 하는 그러한 신자, 그러한 교회가 됩시다.

3. 예수님의 목표는 너무도 확실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압력과 굴욕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표는 능력입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폴 마이어 교수는 “목표 설정은 인생가운데서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성공과 자기 실현을 잡아당기는 방아쇠다. 목표를 정해놓고 덤비는 자에게는 목표 쪽에서 다가오게 마련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표는 능력입니다. 1926년이 되도록 도우버 해협을 수영으로 건넌 사람은 한명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최초로 19세된 처녀 겔트루드 에델라가 건넜는데 그것은 어떤 회사가 선전하기 위해 도우버해협을 수영으로 건넌 사람에게는 고급승용차 한 대와 상급2,500$(당시는 큰 돈)을 주겠다고 했답니다. 많은 사람이 도전 했으나 에델라만 건넜는데 왜 포기하지 않았느냐? 고 물으니 자동차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때마다 새 힘이 솟구쳤다고 합니다. 목표는 이와 같이 능력인 것입니다. 맥스웰 마크라는 심리학자도 “활동하면서 사람은 자전거와 같아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진하지 않으면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곧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목표가 분명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묵묵히 변명 한마디 없이 의지를 굽히지 않으셨던 그 예수님의 그 두터운 입술을 주목합시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이 목표이셨습니다. 그래서 묵묵히 그곳을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빌라도가 “Behold the man, 이 사람을 보라”고 외쳤던 그 예수를 바라보며 금년 한해도 신자의 길을 바로 갑시다. 차 한 대가 눈에 아른거려서 목숨을 걸고 도우버 해협을 건넌 여자도 있는데 하물며 영원한 천성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야 얼마나 목표가 분명합니까? 작은 일이던 큰일이던 목표를 세우셨으면 곧바로 나갑시다. 최선을 다 합시다. 목표는 능력입니다. 새 힘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의 목표는 성령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영이 강력히 후원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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