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바로 알아야 예수를 바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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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유명한 말이 무엇이지요? “네 자신을 알라” 여러분은 모두 자기 자신을 알고 계십니까? 몰라요? 그러면 안 되는데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남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즈음 대선 주자들을 보면 남을 잘 알더라구요? 어디서 남의 약점과 비밀을 그렇게도 자세히 캐내었는지 마치 그것을 총알처럼 사용해서 상대편을 마구 공격합디다. 그것 잘 하면 대통령 됩니다. 그러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대통령되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페르시아의 한 독재군주가 어떤 노인에게 “그대의 나이는 몇 살인고?”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의 왕이시여! 저의 나이 겨우 네 살입니다” 노인의 대답은 참 기이했습니다. “제 나이 84세이오나 지나간 80년은 제게 있어서 살았으나 헛되게 산 해에 불과했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온 지는 이제 겨우 4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보충설명을 하더랍니다. 여러분도 이 노인의 말에 공감이 가십니까? 자신은 몇 살이나 된 것 같습니까? 저는 몇 살 정도로 보이십니까? 저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대기(待期) 인생 같습니다. 그 노인은 84년 평생에 80년 동안은 인생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살아왔다는 고백이고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적대로 그때까지 자기를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의 고백을 듣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누구입니까?(바울) 하나님에게 영감을 받아 성경을 열세권이나 기록했고 당시 대 석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최고의 명문 다소 대학을 나왔던 천재급에 속한 바울이 이 고백이 나오기 전까지는 엉터리 인생을 살았습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갔었습니다. 자기는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깨닫고 보니 죄악 속에 헤맸다고 했습니다. 내 잘난 맛에 살고 있었다고 통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과거에 어떤 존재였다고 고백했습니까?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7:8) 죄는 살아나고 바울은 죽었다고 했습니다.(7:9) 정통 유태인으로서 생명처럼 여겼던 율법이 도리어 자기를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나는 착하고 선하게 산다고 자부하는 양심이나 지식이 알고 보면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했습니다.(7:1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도다” 그것은 바로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 자신은 “죄의 법아래 내가 사로잡혀 있었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리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하고 자신의 상태를 통탄했습니다. 실로 인생 패배자의 한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비참한 비명소리는 분명히 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성장한 천재급이었던 다소 사람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이 이러한 통탄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로마서 7장에서 죽음, 죄, 율법, 육체, 악, 곤고, 사망 등에 포로가 되어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상태를 숨김없이, 기탄없이, 체면도 염치도 생각 않고 자기 있는 그대로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 탄식은 남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원망도 불평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의 문제였습니다. 이 고백과 탄식은 언제 나온 것입니까? 바울이 회심하고 사도가 되어 주님을 따라가는 위대한 십자가의 노정(路程)에서 터져 나온 자기 탄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존재의 인물이었습니까?
1. 이중성(二重性)이 있었습니다
자기 속에 두 개의 자기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7:19절을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선을 행하려는 나는 이상적(理想的)인 나를 말합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려는 나는 현실적(現實的)인 나인 것입니다. 곧 바울에게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내가 극적으로 나누어진 분열 상태에서 계속 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바 행하고저 했던 선은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쫓아 살려는 새 사람 바울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악을 행하게 종용하는 힘은 사단의 조종을 받는 옛 사람 바울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에게는 이중성이 있었습니다. 두 바울이 있었습니다. 선한 바울과 함께 악한 바울이 있었습니다. 영인 바울과 함께 육의 바울이 있었습니다. 속사람 바울과 함께 겉 사람 바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겨하는 바울과 죄의 법을 따르려는 바울이 함께 있었습니다. 진짜인 바울과 가짜인 바울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가진 분열의 진상(眞像)입니다. 믿고 바로 살아보려는 나에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하려는 나에게 불순종하는 내가 생겨납니다. 하늘을 향하고자 하는 나에게 땅을 향하고자 하는 내가 있습니다. 이렇게 두 극단의 “나” “싸우는 나” “탄식하는 나” “낭패와 실망으로 우는 나” 그래서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믿을까? 말까? 교회에 갈까? 말까? 망설임 속에서 갈등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진상(眞像)입니다.
2. 바울 속에는 죄가 거(居)하고 있었습니다
7:20절을 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심각한 분열의 비극을 일으키는 정체가 「죄」라고 폭로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가 하나님과 자기를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또 이웃과 분열시켰고, 자연과의 관계도 분열시켰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 속에 인격적 혼란과 대립까지 일으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분열의 씨입니다. 죄는 분열의 근원입니다. 바울 속에 있던 죄라는 뭉치는 곧 불신앙, 불법,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암적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언제 이러한 비탄과 고백을 하였습니까? 바울은 사도행전 9장에서 회심했는데 그때가 AD 35년경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할 당시는 AD 57년경이니 벌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22년 이상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 로마에 보낸 서신은 그 동안 고린도 에베소, 갈라디아, 마게도니야 전 선교지역을 3차나 두루 돌면서 복음전파를 한 후에 투신했던 바울입니다. 이미 3차 선교여행을 끝마치고 헬라에 머물러 있으면서(행20:3) 여집사 뵈뵈를 통하여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미 이 편지를 쓰던 당시는 열렬한 크리스챤이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바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갈등이 있었음을 고백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까? 구원은 받았지만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갈등이 이따금씩 그를 아프게 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다 천사이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완전히 거룩하지 못하다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사건을 생각 해 보세요. 여덟 식구가 방주에 들어감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1년 10일 동안 방주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물론 방주밖에 있는 사람들은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주 안에서 성별된 생활을 하였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후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천사 같고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바울은 분명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여전히 세상이란 육성이 있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고 성화의 단계를 향하여 계속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단면만 보고 함부로 평하고 공격하지 말고 서로 그 약점을 이해하고 보완해 주며 천성을 향해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던 위대한 바울에게도 날마다 날마다 죄악된 “나”로 인하여 쓰린 아픔이 있었고, 자신과의 끝임 없는 싸움을 해야만 했던 고백을 여러분의 삶에 접목시켜 위로와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3. 진정한 해방자 예수
본문 7:24절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자신을 탄식했습니다. 이 고백은 철저한 패잔병의 비명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다른 한 법이 대치하여 자신을 자꾸만 죄의 법 아래로 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22-23절) 바울은 마음의 전쟁터에서 사경(死境)을 겪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간다는 것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습니다. 완전한 절망과 체념이요, 자유를 말살당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사망으로 끌려가는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곤고(困苦) 한 사람으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24절)고 절망어린 절규를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망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간절하게 해방 자, 구원자를 찾아보지만 탈출구가 없습니다. 어떤 구원해 줄자도 없습니다. 이럴 때 어찌해야 합니까? 이대로 죽고 말 수는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바울은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가 필요합니다. 절대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구원자가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체를 바로 알지 못한 사람은 신을 찾지 않습니다. 구원의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도 말합니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시고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이 사랑하시며 귀히 여기시는 그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주가 쏟아져 내려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은혜를 받은 바울은 로마서 8: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신자를 뜻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해방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탄생된 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갈등과 분열이 사라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나를 책임지시고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에게 승리의 절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8:31절)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할렐루야! 이제 어떤 역경도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죄의 법이 자기를 사망으로 끌어내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실체를 바로 알았기에 구원자 예수를 더욱 믿고 절대 의지함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습니다. 잘 싸우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실체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구원자를 찾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닻줄을 던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후에도 과거 400년간 노예 생활 속에서 습관화된 불평과 원망을 뚝하면 터뜨렸던 것처럼 우리도 습관화된 구습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 중에 귀한 은혜는 무엇입니까?(깨닫는 것) 깨달을 때부터 크리스챤의 나이는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몇 살입니까?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죄성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 무엇이었던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망의 공포가 어디에서 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악된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어 몸부림치는 자신의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해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구원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십시오. 12년간 혈루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처럼 결사적으로 예수님께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사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지 말고 영의 생각을 하십시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롬8:6) 이제는 해방된 바울처럼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롬7:25절) 자신을 바로 알아야 예수님을 바로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믿읍시다.
1. 이중성(二重性)이 있었습니다
자기 속에 두 개의 자기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7:19절을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선을 행하려는 나는 이상적(理想的)인 나를 말합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려는 나는 현실적(現實的)인 나인 것입니다. 곧 바울에게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내가 극적으로 나누어진 분열 상태에서 계속 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바 행하고저 했던 선은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쫓아 살려는 새 사람 바울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악을 행하게 종용하는 힘은 사단의 조종을 받는 옛 사람 바울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에게는 이중성이 있었습니다. 두 바울이 있었습니다. 선한 바울과 함께 악한 바울이 있었습니다. 영인 바울과 함께 육의 바울이 있었습니다. 속사람 바울과 함께 겉 사람 바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겨하는 바울과 죄의 법을 따르려는 바울이 함께 있었습니다. 진짜인 바울과 가짜인 바울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가진 분열의 진상(眞像)입니다. 믿고 바로 살아보려는 나에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하려는 나에게 불순종하는 내가 생겨납니다. 하늘을 향하고자 하는 나에게 땅을 향하고자 하는 내가 있습니다. 이렇게 두 극단의 “나” “싸우는 나” “탄식하는 나” “낭패와 실망으로 우는 나” 그래서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믿을까? 말까? 교회에 갈까? 말까? 망설임 속에서 갈등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진상(眞像)입니다.
2. 바울 속에는 죄가 거(居)하고 있었습니다
7:20절을 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심각한 분열의 비극을 일으키는 정체가 「죄」라고 폭로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가 하나님과 자기를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또 이웃과 분열시켰고, 자연과의 관계도 분열시켰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 속에 인격적 혼란과 대립까지 일으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분열의 씨입니다. 죄는 분열의 근원입니다. 바울 속에 있던 죄라는 뭉치는 곧 불신앙, 불법,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암적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언제 이러한 비탄과 고백을 하였습니까? 바울은 사도행전 9장에서 회심했는데 그때가 AD 35년경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할 당시는 AD 57년경이니 벌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22년 이상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 로마에 보낸 서신은 그 동안 고린도 에베소, 갈라디아, 마게도니야 전 선교지역을 3차나 두루 돌면서 복음전파를 한 후에 투신했던 바울입니다. 이미 3차 선교여행을 끝마치고 헬라에 머물러 있으면서(행20:3) 여집사 뵈뵈를 통하여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미 이 편지를 쓰던 당시는 열렬한 크리스챤이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바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갈등이 있었음을 고백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까? 구원은 받았지만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갈등이 이따금씩 그를 아프게 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다 천사이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완전히 거룩하지 못하다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사건을 생각 해 보세요. 여덟 식구가 방주에 들어감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1년 10일 동안 방주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물론 방주밖에 있는 사람들은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주 안에서 성별된 생활을 하였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후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천사 같고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바울은 분명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여전히 세상이란 육성이 있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고 성화의 단계를 향하여 계속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단면만 보고 함부로 평하고 공격하지 말고 서로 그 약점을 이해하고 보완해 주며 천성을 향해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던 위대한 바울에게도 날마다 날마다 죄악된 “나”로 인하여 쓰린 아픔이 있었고, 자신과의 끝임 없는 싸움을 해야만 했던 고백을 여러분의 삶에 접목시켜 위로와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3. 진정한 해방자 예수
본문 7:24절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자신을 탄식했습니다. 이 고백은 철저한 패잔병의 비명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다른 한 법이 대치하여 자신을 자꾸만 죄의 법 아래로 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22-23절) 바울은 마음의 전쟁터에서 사경(死境)을 겪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간다는 것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습니다. 완전한 절망과 체념이요, 자유를 말살당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사망으로 끌려가는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곤고(困苦) 한 사람으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24절)고 절망어린 절규를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망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간절하게 해방 자, 구원자를 찾아보지만 탈출구가 없습니다. 어떤 구원해 줄자도 없습니다. 이럴 때 어찌해야 합니까? 이대로 죽고 말 수는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바울은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가 필요합니다. 절대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구원자가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체를 바로 알지 못한 사람은 신을 찾지 않습니다. 구원의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도 말합니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시고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이 사랑하시며 귀히 여기시는 그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주가 쏟아져 내려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은혜를 받은 바울은 로마서 8: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신자를 뜻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해방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탄생된 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갈등과 분열이 사라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나를 책임지시고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에게 승리의 절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8:31절)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할렐루야! 이제 어떤 역경도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죄의 법이 자기를 사망으로 끌어내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실체를 바로 알았기에 구원자 예수를 더욱 믿고 절대 의지함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습니다. 잘 싸우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실체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구원자를 찾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닻줄을 던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후에도 과거 400년간 노예 생활 속에서 습관화된 불평과 원망을 뚝하면 터뜨렸던 것처럼 우리도 습관화된 구습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 중에 귀한 은혜는 무엇입니까?(깨닫는 것) 깨달을 때부터 크리스챤의 나이는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몇 살입니까?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죄성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 무엇이었던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망의 공포가 어디에서 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악된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어 몸부림치는 자신의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해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구원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십시오. 12년간 혈루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처럼 결사적으로 예수님께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사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지 말고 영의 생각을 하십시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롬8:6) 이제는 해방된 바울처럼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롬7:25절) 자신을 바로 알아야 예수님을 바로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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