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는 어찌됨이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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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이스라엘의 제1대 왕으로 취임한 후에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 제1호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삼상15:3)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던 그 어려운 시절에 그들의 행군을 가로막고 괴롭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말렉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힐 화근(禍根)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생활에 화근이 되는 것은 일찍이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축복을 가로막는 마귀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철저히 제거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사탄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의용군 21만 명을 모집하여(4절) 아말렉 진멸의 길에 올랐습니다. 진멸(盡滅)이란 남김없이 다 멸하여 없애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멸했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눈멀고 파리한 짐승은 용감하게 진멸하였지만 살찐 짐승은 슬슬 뒤로 빼돌렸습니다.(9절) 우양이 흑사임(牛羊이 黑士心)이라고 소와 양이 사울왕의 마음을 흐리게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 세운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여 화근을 제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 한 사울왕의 검은 심보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회 하신다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울왕의 불순종한 죄 문제로 후회하심을 안 사무엘은 근심하며 온 밤을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소위 왕이란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후회거리요 선지자에게는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혹시 우리는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후회하시지 않게 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교역자의 철야 기도 감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잘 하였다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라고 칭찬받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그때 어떠했습니까? 사울왕의 죄악을 가슴아파하며 철야기도를 한 후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갔더니 사울왕은 엉뚱한 행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전승기념비를 세우기 위하여 갈멜에서 길갈로 동분서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때문에 후회하시고 선지자는 사울 때문에 철야기도에 밤잠을 못 잤는데 대체 자기가 무엇을 잘했다고 기념비 타령입니까? 설령 잘했다고 하더라도 기념비가 그렇게 급한 것이었습니까?
환갑이 되어도 철이 들지 않는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은 기가 막히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사무엘을 만나자 “내가 여호와의 명을 행하였나이다”(13절하) 보고가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은 다 저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해도 너무 뻔뻔스러웠습니다. 우리들도 간혹 그러한 착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나 때문에 부흥되고, 여러운 일은 내가 다 특허 받은 것처럼 잘난 체하고 우쭐대지만 실상 나야 말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교회에 욕을 돌리며 뜻있는 분들을 실망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고 완전 범죄는 없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잘해서 전쟁에 이겼고 하나님 명령을 제대로 행했다고 자랑하고 있을 바로 그때 사울의 뒷마당에서 진멸하지 않고 아말렉에서 끌어온 양과 소의 울음소리가 음매! 음무! 하고 들렸습니다. 이 무슨 낭패입니까? 하필이면 그때 울게 뭡니까? 그렇습니다. 죄도 엉뚱한 곳에서 불거져 나오는 것입니다. 버스 터미널에서 어떤 집사를 만났는데 인사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얼굴이 찌그러지면서 인상을 썼습니다. 알고 보니 뒤에 감춘 담뱃불에 손을 데운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겠어요.
그러기 전에 나는 먼저 알았습니다. 연기가 꽁무니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뒷마당을 가리키면서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나이까?” 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문제는 뒷마당입니다. 승전한 것처럼, 거룩한 것처럼, 청렴한 것처럼, 잘 믿는 것처럼, 신자처럼, 숙녀처럼 바깥마당이야 멀쩡하게 정숙하게 꾸밀 수가 있지만 뒷마당에서 터져 나오는 짐승의 소리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담배를 숨겼어도 연기는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건물은 크고 멀쩡해도 속이 부패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나와야 할 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들려주어야 할 소리를 들려주지 못할 때 그것은 사울의 영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승전을 했다면 감사하는 기도와 찬송소리와 나와야 했을 것입니다. 군사들이 훈련받고 사기가 충천해야 할 영문에 짐승소리만 들렸으나 어찌 하나님께서 후회하고 선지자가 근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해답은 나왔지만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 해 봅시다.
1. 죽어야 할 것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열렸던 제1차 WCC회의는 개회식에 앞서서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누구의 장례식인가를 궁금해 하는 회원들에게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서 관속의 시체를 확인하도록 했습니다. 관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놀랍고 침통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누구의 시체일까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던 사람들은 관 바닥에 깔아놓은 거울에 바로 자기의 모습이 비쳤던 것입니다.
곧 그 장례식은 각자 자기 자신의 장례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각국 대표들은 민족 감정도, 적개심도, 우월감도, 열등감도 자신과 함께 모두 장사지내 버리고 모두가 하나 되어 세계 크리스챤 여성 클럽은 그렇게 출범했다고 합니다.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있으면 모이나 헤어지나 사고요, 가정이나 교회나 문제입니다. 죽이지 못한 혈기 때문에, 물욕 때문에, 정욕 때문에 짐승의 소리가 터져 나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 짐승 떼를 진작 아말렉에서 진멸하여 버렸다면 오늘 이 사단이 벌어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살아있을 때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교훈 삼으시기 바랍니다.
2. 끌어들여서는 안 될 것을 끌여 들였기 때문입니다
영문 안에는 들어올 만한 것도 있고 들어와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입초병이 문밖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이나 아무 물 건이나 함부로 들어 와서는 큰 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적병이나 간첩이 들어와서도 안 되고 창기가 들어와도 안 되고 시한폭탄이 들어와도 안됩니다. 소떼나 양떼가 사울의 영문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물욕이 군대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돈 맛을 알고 물욕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날은 그 나라가 망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영문과 같습니다. 모든 출입이 강력하게 통제되어야 하고 철저하게 감시되어야 합니다. 들어와야 할 보급이 끊어져도 안 되지만 들어와서는 안 될 이단 불순분자가 들어와도 안 됩니다. 요즈음 환절기여서 음식을 먹는데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먹다가 배탈 나고 생고생합니다. 교회도 함부로 잡된 것들을 끌어 들여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이라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받아들이고 조금 아는 것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함부로 가르쳐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울왕은 군인들이 포진하고 훈련받아야 할 병영 안에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끌어들이지 않아야 할 짐승들을 끌어들였기에 죽어라고 고생하고 목숨 바쳐 싸웠으면서도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수고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심에만 취하여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끝에 가서 망쳐 버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방심하면 안 됩니다. 특히 섰다 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만하면 됐다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겼다고 생각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고전10:12) 근신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마26:41)
3. 바쳐야 할 것들을 바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부하들이 끌고 온 짐승이라고 사울은 해명하였지만 이것은 거짓에다가 책임 전가까지 시도한 지도자답지 않은 처신이었습니다. 설령 그 말을 진정이라고 인정합시다. 그러면 진작 제물로 바쳐 버릴 일이지 무엇 때문에 차일피일 지금까지 미루어 왔단 말인가?
바빴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이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갈멜에서 길갈로 동분서주하고 다닐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물욕 때문이었다는 것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믿고 있으며 이 청지기 신앙을 봉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봉헌의 표준은 재물의 경우는 1/10이요, 시간의 경우는 1/7입니다. 이것은 청지기 된 자가 마땅히 바쳐야 할 몫입니다. 아깝고 인색하여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 쌓아두면 거기에서 터져 나올 부작용은 뻔합니다. “이것이 웬일이냐? 이것이 어찌된 소리이냐?”고 가슴을 치게 되는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또 요리 저리 합리화 하고 핑계 쳐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나는 십일조는 안 드려도 더 많이 구제하고 봉사한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부와 개신교 목사와 유대교 랍비가 하나님께 바치는 문제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 신부는 원을 그려 놓고 돈을 하늘로 날려서 원안에 들어온 것만 바친다고 했습니다. 개신교 목사는 자기는 원 밖으로 나간 액수만 드린다고 했습니다. 유대교 랍비는 그렇게 드리면 되느냐?
나는 하늘로 던져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 몫으로 드린다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제발 성경말씀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임직자 피택을 하게 될 것인데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투표하실 분들도, 피택받을 분들도 기도 많이 하세요. 이번은 자원하신 분들만 피택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억지로 권면하지 않습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뿐 아니라 매사에 모범이 되시는 분들을 하나님께서는 세우실 것입니다. 10월에 있을 27주년 창립예배와 임직식 또 부흥집회를 앞에 두고 우리는 지금 특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울처럼 때늦은 변명이나 핑계하는 성도가 되지 맙시다. 이미 알아차려서 하나님의 몫을 그에게 드려야 합니다. 행여나 내속에서나 내 가정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합시다. 교회 안에 비진리 비신앙적인 요소나 이단 잡동사니가 들어오지 않도록 우리 서로가 모두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사울왕 같은 일꾼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의 종을 나 때문에 근심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나도 여러분도 교회 전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복에 복을 쏟아 부어 주시는 역사가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후회 하신다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울왕의 불순종한 죄 문제로 후회하심을 안 사무엘은 근심하며 온 밤을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소위 왕이란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후회거리요 선지자에게는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혹시 우리는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후회하시지 않게 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교역자의 철야 기도 감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잘 하였다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라고 칭찬받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그때 어떠했습니까? 사울왕의 죄악을 가슴아파하며 철야기도를 한 후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갔더니 사울왕은 엉뚱한 행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전승기념비를 세우기 위하여 갈멜에서 길갈로 동분서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때문에 후회하시고 선지자는 사울 때문에 철야기도에 밤잠을 못 잤는데 대체 자기가 무엇을 잘했다고 기념비 타령입니까? 설령 잘했다고 하더라도 기념비가 그렇게 급한 것이었습니까?
환갑이 되어도 철이 들지 않는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은 기가 막히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사무엘을 만나자 “내가 여호와의 명을 행하였나이다”(13절하) 보고가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은 다 저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해도 너무 뻔뻔스러웠습니다. 우리들도 간혹 그러한 착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나 때문에 부흥되고, 여러운 일은 내가 다 특허 받은 것처럼 잘난 체하고 우쭐대지만 실상 나야 말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교회에 욕을 돌리며 뜻있는 분들을 실망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고 완전 범죄는 없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잘해서 전쟁에 이겼고 하나님 명령을 제대로 행했다고 자랑하고 있을 바로 그때 사울의 뒷마당에서 진멸하지 않고 아말렉에서 끌어온 양과 소의 울음소리가 음매! 음무! 하고 들렸습니다. 이 무슨 낭패입니까? 하필이면 그때 울게 뭡니까? 그렇습니다. 죄도 엉뚱한 곳에서 불거져 나오는 것입니다. 버스 터미널에서 어떤 집사를 만났는데 인사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얼굴이 찌그러지면서 인상을 썼습니다. 알고 보니 뒤에 감춘 담뱃불에 손을 데운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겠어요.
그러기 전에 나는 먼저 알았습니다. 연기가 꽁무니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뒷마당을 가리키면서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나이까?” 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문제는 뒷마당입니다. 승전한 것처럼, 거룩한 것처럼, 청렴한 것처럼, 잘 믿는 것처럼, 신자처럼, 숙녀처럼 바깥마당이야 멀쩡하게 정숙하게 꾸밀 수가 있지만 뒷마당에서 터져 나오는 짐승의 소리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담배를 숨겼어도 연기는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건물은 크고 멀쩡해도 속이 부패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나와야 할 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들려주어야 할 소리를 들려주지 못할 때 그것은 사울의 영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승전을 했다면 감사하는 기도와 찬송소리와 나와야 했을 것입니다. 군사들이 훈련받고 사기가 충천해야 할 영문에 짐승소리만 들렸으나 어찌 하나님께서 후회하고 선지자가 근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해답은 나왔지만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 해 봅시다.
1. 죽어야 할 것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열렸던 제1차 WCC회의는 개회식에 앞서서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누구의 장례식인가를 궁금해 하는 회원들에게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서 관속의 시체를 확인하도록 했습니다. 관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놀랍고 침통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누구의 시체일까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던 사람들은 관 바닥에 깔아놓은 거울에 바로 자기의 모습이 비쳤던 것입니다.
곧 그 장례식은 각자 자기 자신의 장례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각국 대표들은 민족 감정도, 적개심도, 우월감도, 열등감도 자신과 함께 모두 장사지내 버리고 모두가 하나 되어 세계 크리스챤 여성 클럽은 그렇게 출범했다고 합니다.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있으면 모이나 헤어지나 사고요, 가정이나 교회나 문제입니다. 죽이지 못한 혈기 때문에, 물욕 때문에, 정욕 때문에 짐승의 소리가 터져 나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 짐승 떼를 진작 아말렉에서 진멸하여 버렸다면 오늘 이 사단이 벌어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살아있을 때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교훈 삼으시기 바랍니다.
2. 끌어들여서는 안 될 것을 끌여 들였기 때문입니다
영문 안에는 들어올 만한 것도 있고 들어와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입초병이 문밖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이나 아무 물 건이나 함부로 들어 와서는 큰 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적병이나 간첩이 들어와서도 안 되고 창기가 들어와도 안 되고 시한폭탄이 들어와도 안됩니다. 소떼나 양떼가 사울의 영문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물욕이 군대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돈 맛을 알고 물욕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날은 그 나라가 망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영문과 같습니다. 모든 출입이 강력하게 통제되어야 하고 철저하게 감시되어야 합니다. 들어와야 할 보급이 끊어져도 안 되지만 들어와서는 안 될 이단 불순분자가 들어와도 안 됩니다. 요즈음 환절기여서 음식을 먹는데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먹다가 배탈 나고 생고생합니다. 교회도 함부로 잡된 것들을 끌어 들여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이라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받아들이고 조금 아는 것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함부로 가르쳐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울왕은 군인들이 포진하고 훈련받아야 할 병영 안에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끌어들이지 않아야 할 짐승들을 끌어들였기에 죽어라고 고생하고 목숨 바쳐 싸웠으면서도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수고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심에만 취하여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끝에 가서 망쳐 버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방심하면 안 됩니다. 특히 섰다 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만하면 됐다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겼다고 생각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고전10:12) 근신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마26:41)
3. 바쳐야 할 것들을 바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부하들이 끌고 온 짐승이라고 사울은 해명하였지만 이것은 거짓에다가 책임 전가까지 시도한 지도자답지 않은 처신이었습니다. 설령 그 말을 진정이라고 인정합시다. 그러면 진작 제물로 바쳐 버릴 일이지 무엇 때문에 차일피일 지금까지 미루어 왔단 말인가?
바빴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이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갈멜에서 길갈로 동분서주하고 다닐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물욕 때문이었다는 것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믿고 있으며 이 청지기 신앙을 봉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봉헌의 표준은 재물의 경우는 1/10이요, 시간의 경우는 1/7입니다. 이것은 청지기 된 자가 마땅히 바쳐야 할 몫입니다. 아깝고 인색하여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 쌓아두면 거기에서 터져 나올 부작용은 뻔합니다. “이것이 웬일이냐? 이것이 어찌된 소리이냐?”고 가슴을 치게 되는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또 요리 저리 합리화 하고 핑계 쳐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나는 십일조는 안 드려도 더 많이 구제하고 봉사한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부와 개신교 목사와 유대교 랍비가 하나님께 바치는 문제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 신부는 원을 그려 놓고 돈을 하늘로 날려서 원안에 들어온 것만 바친다고 했습니다. 개신교 목사는 자기는 원 밖으로 나간 액수만 드린다고 했습니다. 유대교 랍비는 그렇게 드리면 되느냐?
나는 하늘로 던져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 몫으로 드린다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제발 성경말씀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임직자 피택을 하게 될 것인데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투표하실 분들도, 피택받을 분들도 기도 많이 하세요. 이번은 자원하신 분들만 피택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억지로 권면하지 않습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뿐 아니라 매사에 모범이 되시는 분들을 하나님께서는 세우실 것입니다. 10월에 있을 27주년 창립예배와 임직식 또 부흥집회를 앞에 두고 우리는 지금 특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울처럼 때늦은 변명이나 핑계하는 성도가 되지 맙시다. 이미 알아차려서 하나님의 몫을 그에게 드려야 합니다. 행여나 내속에서나 내 가정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합시다. 교회 안에 비진리 비신앙적인 요소나 이단 잡동사니가 들어오지 않도록 우리 서로가 모두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사울왕 같은 일꾼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의 종을 나 때문에 근심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나도 여러분도 교회 전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복에 복을 쏟아 부어 주시는 역사가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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