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왜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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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왜 예수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아마도 많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믿음에 대하여 한마디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5절)고 설명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power)을 갖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무더운 날 사람 만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음악을 감상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돈이 생기기 때문에 오셨습니까? 행여나 잠자려 오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왔습니다. 바울의 설명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가지고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 2년 반 동안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지낼 때 자기도 약하여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것을 너희도 잘 알 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4절)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온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란 어떤 것입니까?
1. 바울의 증언에서 그 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8:31절 이하에 유명한 승리의 개가를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까지 내어 주신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겠느뇨?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1-39절) 여기에서 바울은 세상의 힘보다 더 강한 내적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간증하면서 이것은 자기뿐 아니라 믿음을 가지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힘은 세상의 모든 힘보다 더욱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내적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실증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 메이슨 이란 마을에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가 총을 듣고 디그라핀리드씨의 집에 침입했습니다. 남편 나단은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 루이스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운 손님처럼 대하여 주었습니다. “무거운 총을 들고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아요, 내가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며 콧노래로 찬송까지 부르면서 식사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탈옥수는 이상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루이스는 자기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믿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로 시작하여 예수 믿는 기쁨과 새로운 인생을 그 죄수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이야기 했습니다. 새벽 3시에 침범하여 오전 10시가 되기까지 그 집에 머물렀는데 불과 일곱 시간 사이에 탈옥수는 자기 발로 교도소에 돌아갔다는 실화를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컨트롤(조종, 제압, control)과 파워(능력, power)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영적능력은 죽음을 이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의 힘이란 바로 컨트롤(제압)을 뜻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인 힘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세기 역사는 컨트롤 보다 내적 능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류에 입증해 주었습니다.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국수적 민족주의 등 모두가 국민이나 이웃나라들을 컨트롤 하려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적 힘이 있는 민주주의가 더 강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승리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란 이 내적 힘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이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입니다. 예수는 대 로마제국의 독수리 깃발 아래 벌레처럼 약해 보였으나 로마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예수의 능력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선채가 약할 때 “예수의 사랑의 능력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요”하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2. 그러면 복음서에서 주장하는 능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점심식사를 하고 열두광주리가 남은 기사가 나옵니다. 디베랴 호숫가 넓은 초장에 배고픈 무리 5천명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점심을 먹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두 제자 빌립과 안드레의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빌립은 “2백 데나리온(한화 약2,000만원)을 가지고도 부족하다”고 계산에 근거해서 불가능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군중속에서 어떤 소년 하나가 지참해 온 도시락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예수께 드리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것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5천명은 일대 천(1:1000)의 엄청난 차이지만 안드레는 예수의 잠재적인 능력에서 작은 믿음을 걸어 본 것입니다. 이때 정말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potential)을 믿는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디베랴 초원에는 계산기 대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능력 주시는 예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수, 주홍같은 죄로 눈같이 희게 할 수 있는(사1:18)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리오 질라드(Leo szilard)는 유태계 헝가리인으로 이론 물리학자였습니다. 1933년 그는 런던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9월12일 신문을 읽던 그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영국의 물리학자들이 학술회의에서 “원자에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말을 허무맹랑한 꿈이다”라는 결론이 났다는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질라드세는 한방에서 연구하는 동료인 엘버트 아인슈타인에게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소위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가능성을 믿고 탐구하는 것이 옳은 자신이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단 말이요” 화를 내면서 그는 신문을 찢어 버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오랜 연구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가장 작은 원자속에도 대 우주를 흔드는 위력을 나오게 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보유시켜 두셨다는 것입니다. 원자 그덧은 가장 작은 입자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그 속에 더 큰 위력을 숨겨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원리를 발견한 순간 세계사에 큰 영향을 일으킨 핵 시대가 연구소에 돌아와 자기의 해답을 아인슈타인에게 설명했더니 아인슈타인은 감격스럽게 “당신은 놀라운 점심을 먹었소”(you had an incredible Lunch)하며 기뻐했답니다. 모든 발견과 발명도 가능성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런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사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엡3:20-21절)
믿음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에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다 훨씬 많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에게는 그대가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과 동료, 여러분이 시원찮게 생각하는 그 사람, 여러분이 부도덕하거나 죄인처럼 생각하는 그에게 회개의 가능성, 큰일을 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머리를 돌리 때 하나님은 그를 더 사랑하십니다.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근거도 이 가능성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는 시각도 주님의 큰일을 담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아야 좋은 교회가 이룩되고 2세 교육과 전도에 열심히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예수님과 안드레의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능력이란 에너지(동력)입니다. 이 에너지에 나를 접선 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나와 여러분의 가능성이 힘으로 변화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때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드린다면서 제물인 양은 왜 안 가지고 갑니까?” 그렇게 묻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아들아,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인 준비하신다는 뜻인 “여호와 이레”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막힌 슬픔속에서도 준비하시는 하나님,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속에서 무지개를 보았고, 야곱의 믿음은 광야 가운데서 하늘나라에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바위속에 생수를 보았고, 삼손은 사나운 사자의 몸에서 꿀을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가장 약할 때 나는 가장 강하다”고 고백함으로서 약점을 극복하는 믿음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달린 사과를 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한 알을 놓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과 나무를 세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보고 창조물을 보면서 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십니까? 이 땅에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왜 부활을 믿지 못하십니까? 그 예수가 인간이었다고 근거 없는 억지를 부리는 SBS 를 우리는 넋 나간 헛소리 방송이라고 규탄합니다. 첨단 과학, 진화론이 무엇이라고 주장해도 창조의 근원을 해명 못하면 모두가 헛소리 일 뿐입니다. 첨단과학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극소수의 부분적인 재료를 이용하는 것을 대단한 발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뿐 입니다.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을 나르고, 큰 배가 대양을 떠갑니다. 우주선이 달과 다른 횡성을 이착륙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과학이 하나님을 부인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공기의 유속의 차이가(베르루이의 원리) 아니면 비행기가 어떻게 날으며 물의 부력이 없으면 배가 어떻게 뜹니까? 인공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이란 하나님께 창조하신 물질 중에서 원리와 성질을 활용한 미미한 학문에 불과한데 교만한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의 존재까지 건방지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간들이 이성의 한계를 넘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공기와 전파를 이용하여 방송을 하여 먹고사는 SBS가 어찌 감히 예수님에 대하여 헛소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우주만물이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믿으십니까? 생각을 조그만 바꾸어 보면 어린아이들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으십니까? 성경이 그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총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던 탈옥수 같은 세상의 힘보다 믿음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힘은 내적 능력으로 죽음을 이긴 예수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신체가 약할 때 “예수의 능력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작은 원리에서 가장 큰 위력이 나왔습니다. 별 것 아닌 나에게도 엄청난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빌립처럼 계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빵1개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잠재적인 능력에 작은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을 믿은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때 앉은 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에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5절)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power)을 갖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1. 바울의 증언에서 그 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8:31절 이하에 유명한 승리의 개가를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까지 내어 주신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겠느뇨?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1-39절) 여기에서 바울은 세상의 힘보다 더 강한 내적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간증하면서 이것은 자기뿐 아니라 믿음을 가지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힘은 세상의 모든 힘보다 더욱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내적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실증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 메이슨 이란 마을에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가 총을 듣고 디그라핀리드씨의 집에 침입했습니다. 남편 나단은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 루이스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운 손님처럼 대하여 주었습니다. “무거운 총을 들고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아요, 내가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며 콧노래로 찬송까지 부르면서 식사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탈옥수는 이상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루이스는 자기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믿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로 시작하여 예수 믿는 기쁨과 새로운 인생을 그 죄수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이야기 했습니다. 새벽 3시에 침범하여 오전 10시가 되기까지 그 집에 머물렀는데 불과 일곱 시간 사이에 탈옥수는 자기 발로 교도소에 돌아갔다는 실화를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컨트롤(조종, 제압, control)과 파워(능력, power)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영적능력은 죽음을 이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의 힘이란 바로 컨트롤(제압)을 뜻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인 힘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세기 역사는 컨트롤 보다 내적 능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류에 입증해 주었습니다.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국수적 민족주의 등 모두가 국민이나 이웃나라들을 컨트롤 하려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적 힘이 있는 민주주의가 더 강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승리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란 이 내적 힘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이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입니다. 예수는 대 로마제국의 독수리 깃발 아래 벌레처럼 약해 보였으나 로마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예수의 능력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선채가 약할 때 “예수의 사랑의 능력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요”하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2. 그러면 복음서에서 주장하는 능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점심식사를 하고 열두광주리가 남은 기사가 나옵니다. 디베랴 호숫가 넓은 초장에 배고픈 무리 5천명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점심을 먹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두 제자 빌립과 안드레의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빌립은 “2백 데나리온(한화 약2,000만원)을 가지고도 부족하다”고 계산에 근거해서 불가능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군중속에서 어떤 소년 하나가 지참해 온 도시락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예수께 드리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것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5천명은 일대 천(1:1000)의 엄청난 차이지만 안드레는 예수의 잠재적인 능력에서 작은 믿음을 걸어 본 것입니다. 이때 정말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potential)을 믿는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디베랴 초원에는 계산기 대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능력 주시는 예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수, 주홍같은 죄로 눈같이 희게 할 수 있는(사1:18)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리오 질라드(Leo szilard)는 유태계 헝가리인으로 이론 물리학자였습니다. 1933년 그는 런던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9월12일 신문을 읽던 그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영국의 물리학자들이 학술회의에서 “원자에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말을 허무맹랑한 꿈이다”라는 결론이 났다는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질라드세는 한방에서 연구하는 동료인 엘버트 아인슈타인에게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소위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가능성을 믿고 탐구하는 것이 옳은 자신이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단 말이요” 화를 내면서 그는 신문을 찢어 버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오랜 연구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가장 작은 원자속에도 대 우주를 흔드는 위력을 나오게 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보유시켜 두셨다는 것입니다. 원자 그덧은 가장 작은 입자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그 속에 더 큰 위력을 숨겨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원리를 발견한 순간 세계사에 큰 영향을 일으킨 핵 시대가 연구소에 돌아와 자기의 해답을 아인슈타인에게 설명했더니 아인슈타인은 감격스럽게 “당신은 놀라운 점심을 먹었소”(you had an incredible Lunch)하며 기뻐했답니다. 모든 발견과 발명도 가능성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런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사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엡3:20-21절)
믿음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에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다 훨씬 많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에게는 그대가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과 동료, 여러분이 시원찮게 생각하는 그 사람, 여러분이 부도덕하거나 죄인처럼 생각하는 그에게 회개의 가능성, 큰일을 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머리를 돌리 때 하나님은 그를 더 사랑하십니다.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근거도 이 가능성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는 시각도 주님의 큰일을 담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아야 좋은 교회가 이룩되고 2세 교육과 전도에 열심히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예수님과 안드레의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능력이란 에너지(동력)입니다. 이 에너지에 나를 접선 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나와 여러분의 가능성이 힘으로 변화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때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드린다면서 제물인 양은 왜 안 가지고 갑니까?” 그렇게 묻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아들아,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인 준비하신다는 뜻인 “여호와 이레”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막힌 슬픔속에서도 준비하시는 하나님,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속에서 무지개를 보았고, 야곱의 믿음은 광야 가운데서 하늘나라에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바위속에 생수를 보았고, 삼손은 사나운 사자의 몸에서 꿀을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가장 약할 때 나는 가장 강하다”고 고백함으로서 약점을 극복하는 믿음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달린 사과를 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한 알을 놓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과 나무를 세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보고 창조물을 보면서 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십니까? 이 땅에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왜 부활을 믿지 못하십니까? 그 예수가 인간이었다고 근거 없는 억지를 부리는 SBS 를 우리는 넋 나간 헛소리 방송이라고 규탄합니다. 첨단 과학, 진화론이 무엇이라고 주장해도 창조의 근원을 해명 못하면 모두가 헛소리 일 뿐입니다. 첨단과학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극소수의 부분적인 재료를 이용하는 것을 대단한 발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뿐 입니다.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을 나르고, 큰 배가 대양을 떠갑니다. 우주선이 달과 다른 횡성을 이착륙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과학이 하나님을 부인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공기의 유속의 차이가(베르루이의 원리) 아니면 비행기가 어떻게 날으며 물의 부력이 없으면 배가 어떻게 뜹니까? 인공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이란 하나님께 창조하신 물질 중에서 원리와 성질을 활용한 미미한 학문에 불과한데 교만한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의 존재까지 건방지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간들이 이성의 한계를 넘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공기와 전파를 이용하여 방송을 하여 먹고사는 SBS가 어찌 감히 예수님에 대하여 헛소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우주만물이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믿으십니까? 생각을 조그만 바꾸어 보면 어린아이들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으십니까? 성경이 그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총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던 탈옥수 같은 세상의 힘보다 믿음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힘은 내적 능력으로 죽음을 이긴 예수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신체가 약할 때 “예수의 능력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작은 원리에서 가장 큰 위력이 나왔습니다. 별 것 아닌 나에게도 엄청난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빌립처럼 계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빵1개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잠재적인 능력에 작은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을 믿은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때 앉은 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에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5절)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power)을 갖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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