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줄 모르는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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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돼지가 젖소를 찾아와 불평했습니다. “나는 왜 사람들한테 인기가 없을까?” 사람들은 젖소 너는 대단히 칭찬하면서 왜 나는 칭찬하지 않을까? 너는 우유와 버터만 주지만 나는 모든 것을 주며 심지어 나의 족발까지 삶아 먹잖아!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왜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할까? 이 말을 들은 젖소는 한참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주기 때문 일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 무엇을 할까도 중요하지만 지금 어떻게 사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비난할까? 내가 죽은 다음에 자선 사업기금으로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헌납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하더랍니다. 분명 그는 젖소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담에 “내일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젖소처럼 살아있는 동안에 주며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무언가 잘못된 인생관을 가지고 살 때 잘못하면 돼지처럼 착각 속에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무미건조한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잘못된 행복관”을 지적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준엄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1. 사람의 행복은 반드시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13절에 보면 아버지의 유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형에게 빼앗긴 동생이 예수님께 그것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지적하셨습니다. 여기 생명이라고 번역한 말은 “행복”이라고 바꾸어 읽어도 됩니다.
Living Bible에 보면 "Real life and real living ore not related to how rich we are" 참 생명과 참 삶은 우리가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은 곧이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있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아니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지기를 강력하게 소원하고 있기에 행복을 위해서 라면 어떤 일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잘못된 행복관을 가지고 있으면 못된 일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둔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서라면, 돈을 위해서라면, 인정도 사정도 없습니다. 배신도, 배반도 얼마든지 합니다. 배금주의 사상으로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결국 그것 때문에 처절한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를 오늘도 우리의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으로 돌아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성경은 장작에게 더 많은 유산을 물려주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형은 동생 몫까지 차지했습니다. 그 탐심은 돈을 얻은 대신 동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돈 때문에 관계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형제가 재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물질 때문에 형제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형도 형이지만 설령 동생이 자기 몫을 찾는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평생을 형에게 속았다는 울분 속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홧병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그 동생은 주님께 자기 몫을 찾아달라고 요구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형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기도했어야 할 것입니다. 돈 때문에 어제의 부부가 오늘 법정 싸움을 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형제간에 불화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행복은 반드시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애정은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내일의 돼지보다 찔끔찔끔이라도 오늘 베푼 젖소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서로 나누며 삽시다. 감사하며 삽시다. 주님은 행복을 파괴하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부자를 왜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을까요?
왜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습니까? 농사도 잘 짓고, 창고도 크게 짓고, 편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 아닙니까? 그래도 형세하고 사는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까? 농사를 잘 지은 것은 요새말로 경영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처외삼촌이 인천에서 병원장으로 계셨는데 췌장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일할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시골에서 올라온 누나들이 땅을 치면서 “암 박사가 암으로 죽다니” 천하에 멍청한 놈이라고 통곡하더랍니다. 왜 의학박사까지 되었는데 그가 멍청합니까? 본문에 나오는 부자 역시 나름대로 똑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으로부터 “어리석은 자”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생각해 볼 때 동생 몫까지 챙긴 형이나 그것을 되찾지 못해 재판하는 동생이나, 경영을 잘해서 부자가 된 농부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행복관이 잘못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살줄만 알았지 죽을지는 몰랐습니다. 가질 줄만 알았지 감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움켜 쥘 줄만 알았지 나눌지는 몰랐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돌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영혼의 요구에는 무관심하고 육체적인 요구에, 자기의 생애에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하며 투자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돌려야 합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고칠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 가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감사 없는 행복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3. 감사의 조건이 염려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감사의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사보다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소출 때문에 큰 창고를 지어야 하겠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의 욕심이 감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염려할 이유가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이유인데도 오히려 염려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생각만 바꾸면 감사할 이유인데 그것이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 꼬”(17)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어떤 것도 감사하기까지는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동생만 보더라도 그때 그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였습니까? 예수님의 영생의 말씀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부모처자까지도 버려두고 따라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질병의 고침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체증 같던 답답한 고민거리가 사라지고 가슴 미여지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은 형에게 빼앗겼다는 피해 의식 때문에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슬퍼하고 억울해 했습니다. 무엇을 잃고 빼앗겼기에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 자체가 불행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지금 최고로 행복한 장소에 있으면 서도 감사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불행한 일입니다. 종은 울리기까지 종이 아니며, 음악은 노래하기까지 음악이 아니며, 복은 감사하기까지 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것으로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할 때 찾아옵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행복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출처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인색하면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조건을 하나님을 주시지 않습니다. 삼상2:30절에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넉넉한 소출을 주셨는데 감사할 줄 모르는 부자에게 분명히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이 됩시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진실한 믿음의 감사가 여러분 속에 넘쳐나시기 빕니다.
1. 사람의 행복은 반드시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13절에 보면 아버지의 유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형에게 빼앗긴 동생이 예수님께 그것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지적하셨습니다. 여기 생명이라고 번역한 말은 “행복”이라고 바꾸어 읽어도 됩니다.
Living Bible에 보면 "Real life and real living ore not related to how rich we are" 참 생명과 참 삶은 우리가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은 곧이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있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아니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지기를 강력하게 소원하고 있기에 행복을 위해서 라면 어떤 일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잘못된 행복관을 가지고 있으면 못된 일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둔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서라면, 돈을 위해서라면, 인정도 사정도 없습니다. 배신도, 배반도 얼마든지 합니다. 배금주의 사상으로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결국 그것 때문에 처절한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를 오늘도 우리의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으로 돌아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성경은 장작에게 더 많은 유산을 물려주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형은 동생 몫까지 차지했습니다. 그 탐심은 돈을 얻은 대신 동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돈 때문에 관계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형제가 재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물질 때문에 형제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형도 형이지만 설령 동생이 자기 몫을 찾는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평생을 형에게 속았다는 울분 속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홧병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그 동생은 주님께 자기 몫을 찾아달라고 요구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형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기도했어야 할 것입니다. 돈 때문에 어제의 부부가 오늘 법정 싸움을 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형제간에 불화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행복은 반드시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애정은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내일의 돼지보다 찔끔찔끔이라도 오늘 베푼 젖소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서로 나누며 삽시다. 감사하며 삽시다. 주님은 행복을 파괴하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부자를 왜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을까요?
왜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습니까? 농사도 잘 짓고, 창고도 크게 짓고, 편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 아닙니까? 그래도 형세하고 사는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까? 농사를 잘 지은 것은 요새말로 경영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처외삼촌이 인천에서 병원장으로 계셨는데 췌장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일할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시골에서 올라온 누나들이 땅을 치면서 “암 박사가 암으로 죽다니” 천하에 멍청한 놈이라고 통곡하더랍니다. 왜 의학박사까지 되었는데 그가 멍청합니까? 본문에 나오는 부자 역시 나름대로 똑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으로부터 “어리석은 자”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생각해 볼 때 동생 몫까지 챙긴 형이나 그것을 되찾지 못해 재판하는 동생이나, 경영을 잘해서 부자가 된 농부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행복관이 잘못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살줄만 알았지 죽을지는 몰랐습니다. 가질 줄만 알았지 감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움켜 쥘 줄만 알았지 나눌지는 몰랐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돌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영혼의 요구에는 무관심하고 육체적인 요구에, 자기의 생애에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하며 투자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돌려야 합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고칠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 가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감사 없는 행복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3. 감사의 조건이 염려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감사의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사보다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소출 때문에 큰 창고를 지어야 하겠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의 욕심이 감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염려할 이유가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이유인데도 오히려 염려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생각만 바꾸면 감사할 이유인데 그것이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 꼬”(17)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어떤 것도 감사하기까지는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동생만 보더라도 그때 그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였습니까? 예수님의 영생의 말씀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부모처자까지도 버려두고 따라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질병의 고침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체증 같던 답답한 고민거리가 사라지고 가슴 미여지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은 형에게 빼앗겼다는 피해 의식 때문에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슬퍼하고 억울해 했습니다. 무엇을 잃고 빼앗겼기에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 자체가 불행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지금 최고로 행복한 장소에 있으면 서도 감사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불행한 일입니다. 종은 울리기까지 종이 아니며, 음악은 노래하기까지 음악이 아니며, 복은 감사하기까지 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것으로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할 때 찾아옵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행복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출처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인색하면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조건을 하나님을 주시지 않습니다. 삼상2:30절에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넉넉한 소출을 주셨는데 감사할 줄 모르는 부자에게 분명히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이 됩시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진실한 믿음의 감사가 여러분 속에 넘쳐나시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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