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용서하신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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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성경 역사상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그것도 잔인하게 동생을 들에서 쳐 죽였습니다.(8절) 대개 말하기를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하는데 아우를 보살펴 주어야 할 형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거기에다 얼마나 뻔뻔스러웠습니까? 하나님께서 훤히 아시고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을 때 시치미를 딱 떼고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9절) 하나님께 새빨간 거짓말까지 했던 매우 못 되먹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을 죽인 가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장에 가인을 죽였습니까? 15절에 보면 오히려 가인을 감싸 주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시며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가는 내용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런 불의를 용납하시므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신 처사가 아닌가!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깊으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게 하시어 내 모든 죄과를 치르게 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사건에서부터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인을 살인의 대명사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처럼 되지 말고 아벨처럼 되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의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죄인이 구원받은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눅15장에 나오는 죄짓지 않은 큰 아들 이야기가 아니라 집을 나가 죄짓고 회개하여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인처럼 죄 지은 후에라도 뻔뻔스러운 것 같지만 하나님께 염치 불구하고 용서해 주실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자체가 사랑이십니다.(요1서 4:8)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의를 세우십니다. 우리도 가인처럼 질투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벨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인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피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벨을 투기하여 죽이기 전에 한발 물러서서 그것을 먼저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남이 잘 되고 칭찬받으면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고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맹목적인 시기, 질투가 분노로 변하여 까닭 없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든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로 비난 받고 있지만 그는 그가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매달린 열정을 가졌었기에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인의 살인 동기는 영적인 욕심을 채우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억울한 심정을 삭하지 못해 그분풀이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가인의 살인 행위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열망하는 열정만은 우리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향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것을 볼 때 영적으로는 가인보다도 훨씬 수준 미달이라는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살인의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저주였습니다.(11절)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서 선포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염치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얼굴을 뵈옵게 해 주시며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지 않고,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죽이지 않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런 행동이었습니까? 동생을 죽이고 거짓말까지 했던 가인이 무슨 염치로 그런 사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같으면 어찌 세상 법이 용서할 수 있으며 우리들이라면 동정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을 책망 않으시고 그를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와 하나님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에게 침 뱉고, 때리고, 창으로 찔렀고, 십자가 위에 꽁꽁 못 박은 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하나님은 그래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살인자 가인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잔혹한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이 그 속에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어야 합니다.
2. 염치 불구하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여 응답받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자기 혼자 끙끙거리며 헛고생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30리(12km)를 걸어서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제일로 힘들 때는 늦가을 무렵입니다. 이른 새벽에 지나가야 할 논 두둑 길들이 밤사이 기온이 내려가 얼음발이 서서 발을 디디면 폭폭 들어가며 시린 기운이 발가락에서부터 발등으로 온 몸으로 스며듭니다. 그럴 때는 어찌도 학교가 그리도 멀게 느껴지고 몸이 오그라드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앞전 장날 어머니가 마을분과 속이 상하여 큰소리로 말다툼하시는 것을 보고 운동화 밑창이 떨어져 새끼로 감고 학교에 가면서도 차마 신발을 사 달라는 부탁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집 가까운 곳에 그런 상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날 새벽에 밑창 떨어진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가는데 발이 얼마나 시린지 주저앉아 울고 싶었습니다. 늦게야 이 사실을 아신 어머님이 나를 때리시면서 이 바보야 왜 신발을 사 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야단을 치시며 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불효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그런 영적 불효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도하면 될 것을 염치가 없어 못하십니까? 내가 잘못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오히려 야단맞을 것 같습니까? 그것만은 기도해도 안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기도도 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기도응답에 대한 열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의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죄인이 구원받는 이야기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염치 불고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인은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호소하며 살인한 주제에 염치 불구하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용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서 성읍을 구원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정반대쪽인 다시스로 가다가 혹독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요나 때문에 공연히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까지 죽을 고생을 해야 했었습니다. 결국 요나는 그곳에서 지옥을 맛보았습니다.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영원히 지옥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감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매달려 기도한 내용이 요나서 2장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내가 산의 뿌리내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오래도록 나를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2:4-7) 요나는 염치없어도 계속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건져 주셨고 니느웨에 토하게 하여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이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여러분의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빌4:19)
요나처럼 사명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시면 염치 불구하고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가인의 기도까지 들어 주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누구나 염치 불구하고 기도하면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의 양편에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지은 죄가 너무도 무거웠기에 차마 구원해 달라는 염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자포자기 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도는 염치 불구하고 매달렸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끊어지더라도 영원한 구원을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자기도 기억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그 강도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가인도 분노 속에 살인을 저질렀지만 살고 싶었습니다. 죽어야 마땅한 그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몸부림치며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15절) 드디어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염치 불구하고 매달리면 하나님은 오히려 기쁘게 여기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어 죽음을 면케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마에 성령으로 인을 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인 같은 살인자의 기도도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나의 길은 너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분명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평가하거나 지례 짐작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나 부활 교리를 자기 나름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 그 못된 동생을 죽인 살인자까지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래도 용서하신 하나님은 나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인을 살인의 대명사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처럼 되지 말고 아벨처럼 되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의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죄인이 구원받은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눅15장에 나오는 죄짓지 않은 큰 아들 이야기가 아니라 집을 나가 죄짓고 회개하여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인처럼 죄 지은 후에라도 뻔뻔스러운 것 같지만 하나님께 염치 불구하고 용서해 주실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자체가 사랑이십니다.(요1서 4:8)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의를 세우십니다. 우리도 가인처럼 질투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벨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인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피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벨을 투기하여 죽이기 전에 한발 물러서서 그것을 먼저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남이 잘 되고 칭찬받으면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고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맹목적인 시기, 질투가 분노로 변하여 까닭 없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든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로 비난 받고 있지만 그는 그가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매달린 열정을 가졌었기에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인의 살인 동기는 영적인 욕심을 채우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억울한 심정을 삭하지 못해 그분풀이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가인의 살인 행위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열망하는 열정만은 우리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향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것을 볼 때 영적으로는 가인보다도 훨씬 수준 미달이라는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살인의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저주였습니다.(11절)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서 선포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염치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얼굴을 뵈옵게 해 주시며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지 않고,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죽이지 않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런 행동이었습니까? 동생을 죽이고 거짓말까지 했던 가인이 무슨 염치로 그런 사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같으면 어찌 세상 법이 용서할 수 있으며 우리들이라면 동정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을 책망 않으시고 그를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와 하나님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에게 침 뱉고, 때리고, 창으로 찔렀고, 십자가 위에 꽁꽁 못 박은 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하나님은 그래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살인자 가인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잔혹한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이 그 속에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어야 합니다.
2. 염치 불구하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여 응답받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자기 혼자 끙끙거리며 헛고생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30리(12km)를 걸어서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제일로 힘들 때는 늦가을 무렵입니다. 이른 새벽에 지나가야 할 논 두둑 길들이 밤사이 기온이 내려가 얼음발이 서서 발을 디디면 폭폭 들어가며 시린 기운이 발가락에서부터 발등으로 온 몸으로 스며듭니다. 그럴 때는 어찌도 학교가 그리도 멀게 느껴지고 몸이 오그라드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앞전 장날 어머니가 마을분과 속이 상하여 큰소리로 말다툼하시는 것을 보고 운동화 밑창이 떨어져 새끼로 감고 학교에 가면서도 차마 신발을 사 달라는 부탁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집 가까운 곳에 그런 상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날 새벽에 밑창 떨어진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가는데 발이 얼마나 시린지 주저앉아 울고 싶었습니다. 늦게야 이 사실을 아신 어머님이 나를 때리시면서 이 바보야 왜 신발을 사 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야단을 치시며 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불효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그런 영적 불효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도하면 될 것을 염치가 없어 못하십니까? 내가 잘못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오히려 야단맞을 것 같습니까? 그것만은 기도해도 안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기도도 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기도응답에 대한 열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의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죄인이 구원받는 이야기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염치 불고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인은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호소하며 살인한 주제에 염치 불구하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용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서 성읍을 구원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정반대쪽인 다시스로 가다가 혹독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요나 때문에 공연히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까지 죽을 고생을 해야 했었습니다. 결국 요나는 그곳에서 지옥을 맛보았습니다.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영원히 지옥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감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매달려 기도한 내용이 요나서 2장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내가 산의 뿌리내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오래도록 나를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2:4-7) 요나는 염치없어도 계속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건져 주셨고 니느웨에 토하게 하여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이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여러분의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빌4:19)
요나처럼 사명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시면 염치 불구하고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가인의 기도까지 들어 주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누구나 염치 불구하고 기도하면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의 양편에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지은 죄가 너무도 무거웠기에 차마 구원해 달라는 염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자포자기 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도는 염치 불구하고 매달렸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끊어지더라도 영원한 구원을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자기도 기억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그 강도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가인도 분노 속에 살인을 저질렀지만 살고 싶었습니다. 죽어야 마땅한 그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몸부림치며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15절) 드디어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염치 불구하고 매달리면 하나님은 오히려 기쁘게 여기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어 죽음을 면케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마에 성령으로 인을 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인 같은 살인자의 기도도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나의 길은 너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분명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평가하거나 지례 짐작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나 부활 교리를 자기 나름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 그 못된 동생을 죽인 살인자까지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래도 용서하신 하나님은 나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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