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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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5:1-6절까지 내용을 잘 음미해 봅시다.
1. 기독교 신앙의 확신성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했습니까?(1절, 믿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인 우리가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에 서 있는 은혜를 얻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2절) 나아가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으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음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구원 역사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 속수무책으로 어린아이 같이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전혀 죄가 없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는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다”(벧전1:7절)고 했습니다.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귀할 까요? 믿음이 무엇이기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이 신앙을 통하여 2천여 년 동안 수십억의 기독교 인구가 증가했고 이 신앙을 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죽음을 통한 순교자들이 그리도 많을 수 있단 말입니까? 대 석학자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난 후에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처럼 확신성이 있으며 생명력이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기독교 신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동성(役動性)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무슨 장입니까?(믿음장)
그곳에 보면 구약시대를 장식했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곧 믿음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에 대한 두려움과 이웃의 조롱을 극복하고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 큰 배를 건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믿음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장래에 대한 모든 염려와 인간의 도전을 하나님께 맡기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개척자로 만든 것도 믿음의 힘이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지도가 있던 시대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큰 도로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전진했기에 그는 위대한 개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를 민족의 해방자로, 여호수아를 위대한 전승 장군으로 만든 것도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폭력이 있고, 전쟁이 있고, 고독과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환난이 첩첩이 쌓여 있었으나 그들은 믿음을 이기고 뚫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시퍼렇게 출렁이는 홍해물도 가르고 나갔고, 그 육중한 난공불락인 여리고성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사도는 고통 속에 있는 로마교회 신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9절)라고 자신 있게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 확실하게 선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 켄터키 주의 촌사람, 초등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했던 에이브라함 링컨이 그렇게 성공하고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링컨은 창세기 1:27절의 말씀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말씀을 통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내재한 순금처럼 소중하고 고결한 존재라는 자긍심을 가져답니다. 자신은 벌레같이 살다가 무의미하게 사라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창조신앙이 링컨을 벌레의 인생관에서 별(star)의 인생관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켄터키 통나무집 촌사람을 미국의 백악관 주인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가장 최대의 인권 운동인 노예해방의 과업을 이루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참을 수 없는 것을 함께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여유 있게 만들고, 관대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더해 질 때 역동적인 기적이 산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진짜 실패자가 아닙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했습니다.(잠24:16) 하나님은 적어도 해 보려고 하는 사람, 아니 꼭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사람을 축복하고 들어 쓰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던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좋은 조건에서도 실패했지만 38년 된 병자, 소경 바디매오, 12년간이나 혈루 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고 남은 생애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이 믿음은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21:21절) 믿음은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가정의 분위기도 바꾸어 놓습니다. 국가와 민족과 인류의 장래를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임금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시23:4)고 했습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확신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두려움을 보지 않고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낙심하지 않고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힘만 의지하지 않고 나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분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기독교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인간은 믿음으로서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속죄 신앙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실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우리 죄인들의 상태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행16:30절에 빌립보감옥의 옥사장이 바울과 실라에게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 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재산을 다 바치라고 했습니까? 직업을 바꾸라고 했습니까? 돈을 몇 천만 원 가져오라고 했습니까? 이사를 가거나 자식들과 아내를 버리라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Nor is there salvaltion in any other)고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고 하나님께로부터 독립 이탈하려는 인간의 근본 상태는 하나님의 자비로서만 변화를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인류에게 구체적으로 계시(啓示, revilation) 되었으므로 이 예수를 받아들임으로서만 나의 구원은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개념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과 육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1회적 구원이 있고 매일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사는 구원이 있습니다. 곧 죽음은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과 분리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절망과 낙심과 분노와 혈기와 원망과 불평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믿음으로 극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되도록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바싹 붙어있는 가지처럼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삽시다. 진리에서 떨어지면 육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죽은 사람이 됩니다. 그때마다 마귀가 지배하여 나로 말미암아 시끄러워집니다. 남을 괴롭게 합니다. 가정을 어지럽힙니다. 교회를 흔들어 놓습니다. 불평, 불만이 부글부글 끓고 한없이 교만해집니다. 세속화됩니다. 그때마다 내가 죽었음을 깨닫고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나로 말미암아 남을 기쁘게 합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구원을 하시려고 해도 내가 거부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날 너머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잭슨 대통령의 특사령을 거부한 살인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때 법원에서 특사령인 은총을 거절한 이상 특사령의 효력은 상실되었다고 판결을 했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에 대한 특사령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구원의 특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능력은 이와 같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의욕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 땅위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게 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력이요, 믿음의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기독교 신앙의 확신성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했습니까?(1절, 믿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인 우리가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에 서 있는 은혜를 얻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2절) 나아가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으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음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구원 역사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 속수무책으로 어린아이 같이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전혀 죄가 없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는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다”(벧전1:7절)고 했습니다.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귀할 까요? 믿음이 무엇이기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이 신앙을 통하여 2천여 년 동안 수십억의 기독교 인구가 증가했고 이 신앙을 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죽음을 통한 순교자들이 그리도 많을 수 있단 말입니까? 대 석학자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난 후에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처럼 확신성이 있으며 생명력이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기독교 신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동성(役動性)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무슨 장입니까?(믿음장)
그곳에 보면 구약시대를 장식했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곧 믿음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에 대한 두려움과 이웃의 조롱을 극복하고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 큰 배를 건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믿음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장래에 대한 모든 염려와 인간의 도전을 하나님께 맡기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개척자로 만든 것도 믿음의 힘이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지도가 있던 시대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큰 도로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전진했기에 그는 위대한 개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를 민족의 해방자로, 여호수아를 위대한 전승 장군으로 만든 것도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폭력이 있고, 전쟁이 있고, 고독과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환난이 첩첩이 쌓여 있었으나 그들은 믿음을 이기고 뚫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시퍼렇게 출렁이는 홍해물도 가르고 나갔고, 그 육중한 난공불락인 여리고성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사도는 고통 속에 있는 로마교회 신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9절)라고 자신 있게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 확실하게 선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 켄터키 주의 촌사람, 초등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했던 에이브라함 링컨이 그렇게 성공하고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링컨은 창세기 1:27절의 말씀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말씀을 통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내재한 순금처럼 소중하고 고결한 존재라는 자긍심을 가져답니다. 자신은 벌레같이 살다가 무의미하게 사라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창조신앙이 링컨을 벌레의 인생관에서 별(star)의 인생관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켄터키 통나무집 촌사람을 미국의 백악관 주인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가장 최대의 인권 운동인 노예해방의 과업을 이루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참을 수 없는 것을 함께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여유 있게 만들고, 관대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더해 질 때 역동적인 기적이 산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진짜 실패자가 아닙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했습니다.(잠24:16) 하나님은 적어도 해 보려고 하는 사람, 아니 꼭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사람을 축복하고 들어 쓰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던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좋은 조건에서도 실패했지만 38년 된 병자, 소경 바디매오, 12년간이나 혈루 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고 남은 생애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이 믿음은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21:21절) 믿음은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가정의 분위기도 바꾸어 놓습니다. 국가와 민족과 인류의 장래를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임금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시23:4)고 했습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확신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두려움을 보지 않고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낙심하지 않고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힘만 의지하지 않고 나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분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기독교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인간은 믿음으로서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속죄 신앙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실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우리 죄인들의 상태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행16:30절에 빌립보감옥의 옥사장이 바울과 실라에게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 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재산을 다 바치라고 했습니까? 직업을 바꾸라고 했습니까? 돈을 몇 천만 원 가져오라고 했습니까? 이사를 가거나 자식들과 아내를 버리라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Nor is there salvaltion in any other)고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고 하나님께로부터 독립 이탈하려는 인간의 근본 상태는 하나님의 자비로서만 변화를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인류에게 구체적으로 계시(啓示, revilation) 되었으므로 이 예수를 받아들임으로서만 나의 구원은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개념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과 육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1회적 구원이 있고 매일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사는 구원이 있습니다. 곧 죽음은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과 분리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절망과 낙심과 분노와 혈기와 원망과 불평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믿음으로 극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되도록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바싹 붙어있는 가지처럼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삽시다. 진리에서 떨어지면 육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죽은 사람이 됩니다. 그때마다 마귀가 지배하여 나로 말미암아 시끄러워집니다. 남을 괴롭게 합니다. 가정을 어지럽힙니다. 교회를 흔들어 놓습니다. 불평, 불만이 부글부글 끓고 한없이 교만해집니다. 세속화됩니다. 그때마다 내가 죽었음을 깨닫고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나로 말미암아 남을 기쁘게 합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구원을 하시려고 해도 내가 거부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날 너머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잭슨 대통령의 특사령을 거부한 살인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때 법원에서 특사령인 은총을 거절한 이상 특사령의 효력은 상실되었다고 판결을 했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에 대한 특사령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구원의 특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능력은 이와 같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의욕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 땅위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게 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력이요, 믿음의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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