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설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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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5월 초 하루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0여 년 동안 노예 아닌 노예생활, 포로 아닌 포로 생활로 억압 속에 살던 그들이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귀향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음력으로 작년 한 해 동안 혹 남모르는 근심이나 걱정이 있었습니까? 질병에 포로 되어 가슴 짓눌리는 아픔이 있었습니까? 기도가 막혀 답답했습니까? 내일이 태음력으로 2009년도 정월 초하루입니다. 우리도 오늘로서 그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바벨론에서 나와 고국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제 꿈과 소망을 가지고 가슴 설레이는 감격으로 새 출발을 해 봅시다.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여러분의 꿈과 소망을 이루시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은 왜 정월 초하루를 “설”이라고 했을까요? 오늘은 그 설이라는 어원(語源) 속에 감추어져 있는 뜻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 음력 2008년도 섣달 그믐날을 의미 있게 정리 해 봅시다.
1. “설”은 서럽다는 의미가 있답니다.
이것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왜 서러웠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생은 원래 서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입니다. 결국 나이가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옛날에는 가족은 늘어나고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한해 한해가 지나가도 청첩산중이고 해가 바뀐다고 더 나아진다는 소망은 전혀 없고, 한해의 첫날 새 소망을 가져 보았지만 인생살이가 개미 체 바퀴 돌듯 항상 그 모양이었으니 고작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사는 인생들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또 지난해처럼 살다가 죽게 될 것을 생각하면 서러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재개발이라는 명분 때문에 생존의 터전을 잃고 생활이 막막하여 죽음으로 항거하다 생명을 잃은 철거민들의 비극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전세 방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저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설이 서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했는데 어찌 우리 교회들이 다 구제하겠습니까마는 금년도 설을 맞으며 개운찮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자들이라고 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모두 게으르고 나빠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양심대로 살았으나 버림당하고, 멸시당하고, 소외당하면서 병들고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죽어가는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 진실한 공무원, 참된 스승, 정직한 노동자들의 눈물이 있기에 진정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을 생각하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서러운 생각이 들어 설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우리 각자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욕심 나는 것이 많고, 갖고 싶고, 국가나 남에게 혜택을 더 받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위로를 받고 서러운 생각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설을 맞이합시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원한 날, 더 좋은 날이 우리 앞에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행20:3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서럽다는 의미의 설 정신을 꿈에도 갖지 말고 하늘 아버지의 도우심과 사랑 안에서 금년도 더 좋은 일만 있을 것을 믿고 소망찬 출발을 합시다.
2. “설”은 설설 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조심한다. 근신한다”는 뜻입니다. 곧 새해 첫날을 맞았으니 이 한해를 근신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자는 숨은 결의가 베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까 조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하였고,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절)고 하였습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마다 계획이나 바램이나 결심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세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고쳐지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우리의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환난 고통을 겁먹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밖으로 과시하는 부귀영화도 좋지만 우리의 내면에 소유한 성결과 기쁨이 더 귀중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결심 또 결심하지만 사단은 굶주린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벧전5:8) 금년에도 정신 바짝 차리고 설설 기는 마음으로 죄짓지 말고 살아봅시다. 영국의 신학자 훌러는 “죄를 통탄하는 자는 성자요, 죄를 뽐내는 것은 악마”라고 했습니다.
2) 형제에게 누를 끼칠까 조심하며 삽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케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거니와 또 조심하리라”(고후11:9)고 하였습니다. 고전14:2절을 보면 “너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德)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신 불신자 간에나, 형제간에나, 교우 간에 피차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마음, 풍성한 은혜, 풍성한 건강, 풍성한 물질을 구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새우 촉에 목 걸린다” 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큰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시비 없는 교회, 따뜻한 교회, 재미나는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금년에도 설설 기는 마음으로 근신하며, 조심히 살아갑시다.
3) 무엇보다도 말부터 부덕할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절)고 했습니다. 말을 왜 조심해야 합니까?
첫째 언어는 가장 범죄하기 쉽습니다.
비평, 아첨, 원망, 불평, 남의 말하기 등 얼마나 말로 죄짓기 쉽습니까?
둘째 언어는 교회 화평과 발전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의 화평과 덕 세우기를 힘쓰라고 하였고(롬14:19절), 누추한 말 ,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말, 감화력 있는 말은 많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셋째 언어는 화목(和睦)과 영원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혀는 곧 불이라 했고(약3:6),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한 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벧전3:10절)
또 예수님께서는 “네 말로 의와 죄를 정한다”(마12:36-37절)고 했습니다. 옛날 어떤 농부가 거북이를 잡아 솥에 삶았으나 삶아지지 않아 할 수 없이 지게에 지고 바다에 버리려고 가다가 뽕나무 밑에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북이가 “자기는 삶아지지 않는다”고 뽕나무에게 자랑하자 뽕나무가 농부에게 “그래요, 나를 베어 거북이를 삶으면 됩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는 자기를 자랑하는 입방정 때문에 죽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坐中談笑 愼桑龜)라는 고사(故辭)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입과 혀를 잘 지켜 영혼을 보존하고 항상 유익된 말, 덕스러운 말, 은혜로운 말로서 조심조심하는 생활을 합시다. 그래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하게 하는 부덕을 범치 맙시다.
3. “설”은 설 익다는 의미도 있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설다, 새롭다”는 뜻입니다. 묵은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돌아올 미지(未知)의 날에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가 클 것입니다. 롬8: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죄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성화되고, 영화되어 완전함을 입게 될 큰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이 한해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몰라도, 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큰 희망을 가지고 복음 전선에 나아갑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라는 국가적 소망은 “민족 복음화”와 “남북통일”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강산이 여호와의 제단이 되고, 이 민족이 여호와의 제물 되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합시다. 이제 우리에게는 설이 서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하며 근신하는 마음으로 또 한해를 출발합시다. 잘해 보자는 욕심과 소망으로 마음의 신발 끈을 단단히 매고 힘차게 출발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마음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묵은해가 가고 한해의 첫날인 설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좋은 생각을 하여 좋은 꿈을 많이 꾸시고 새로운 희망이 넘치는 복스러운 설날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음력으로 새해의 첫날인 설날부터 섣달그믐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구정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70여 년 동안 노예 아닌 노예생활, 포로 아닌 포로 생활로 억압 속에 살던 그들이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귀향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음력으로 작년 한 해 동안 혹 남모르는 근심이나 걱정이 있었습니까? 질병에 포로 되어 가슴 짓눌리는 아픔이 있었습니까? 기도가 막혀 답답했습니까? 내일이 태음력으로 2009년도 정월 초하루입니다. 우리도 오늘로서 그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바벨론에서 나와 고국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제 꿈과 소망을 가지고 가슴 설레이는 감격으로 새 출발을 해 봅시다.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여러분의 꿈과 소망을 이루시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은 왜 정월 초하루를 “설”이라고 했을까요? 오늘은 그 설이라는 어원(語源) 속에 감추어져 있는 뜻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 음력 2008년도 섣달 그믐날을 의미 있게 정리 해 봅시다.
1. “설”은 서럽다는 의미가 있답니다.
이것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왜 서러웠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생은 원래 서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입니다. 결국 나이가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옛날에는 가족은 늘어나고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한해 한해가 지나가도 청첩산중이고 해가 바뀐다고 더 나아진다는 소망은 전혀 없고, 한해의 첫날 새 소망을 가져 보았지만 인생살이가 개미 체 바퀴 돌듯 항상 그 모양이었으니 고작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사는 인생들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또 지난해처럼 살다가 죽게 될 것을 생각하면 서러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재개발이라는 명분 때문에 생존의 터전을 잃고 생활이 막막하여 죽음으로 항거하다 생명을 잃은 철거민들의 비극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전세 방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저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설이 서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했는데 어찌 우리 교회들이 다 구제하겠습니까마는 금년도 설을 맞으며 개운찮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자들이라고 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모두 게으르고 나빠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양심대로 살았으나 버림당하고, 멸시당하고, 소외당하면서 병들고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죽어가는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 진실한 공무원, 참된 스승, 정직한 노동자들의 눈물이 있기에 진정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을 생각하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서러운 생각이 들어 설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우리 각자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욕심 나는 것이 많고, 갖고 싶고, 국가나 남에게 혜택을 더 받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위로를 받고 서러운 생각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설을 맞이합시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원한 날, 더 좋은 날이 우리 앞에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행20:3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서럽다는 의미의 설 정신을 꿈에도 갖지 말고 하늘 아버지의 도우심과 사랑 안에서 금년도 더 좋은 일만 있을 것을 믿고 소망찬 출발을 합시다.
2. “설”은 설설 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조심한다. 근신한다”는 뜻입니다. 곧 새해 첫날을 맞았으니 이 한해를 근신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자는 숨은 결의가 베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까 조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하였고,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절)고 하였습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마다 계획이나 바램이나 결심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세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고쳐지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우리의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환난 고통을 겁먹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밖으로 과시하는 부귀영화도 좋지만 우리의 내면에 소유한 성결과 기쁨이 더 귀중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결심 또 결심하지만 사단은 굶주린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벧전5:8) 금년에도 정신 바짝 차리고 설설 기는 마음으로 죄짓지 말고 살아봅시다. 영국의 신학자 훌러는 “죄를 통탄하는 자는 성자요, 죄를 뽐내는 것은 악마”라고 했습니다.
2) 형제에게 누를 끼칠까 조심하며 삽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케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거니와 또 조심하리라”(고후11:9)고 하였습니다. 고전14:2절을 보면 “너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德)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신 불신자 간에나, 형제간에나, 교우 간에 피차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마음, 풍성한 은혜, 풍성한 건강, 풍성한 물질을 구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새우 촉에 목 걸린다” 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큰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시비 없는 교회, 따뜻한 교회, 재미나는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금년에도 설설 기는 마음으로 근신하며, 조심히 살아갑시다.
3) 무엇보다도 말부터 부덕할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절)고 했습니다. 말을 왜 조심해야 합니까?
첫째 언어는 가장 범죄하기 쉽습니다.
비평, 아첨, 원망, 불평, 남의 말하기 등 얼마나 말로 죄짓기 쉽습니까?
둘째 언어는 교회 화평과 발전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의 화평과 덕 세우기를 힘쓰라고 하였고(롬14:19절), 누추한 말 ,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말, 감화력 있는 말은 많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셋째 언어는 화목(和睦)과 영원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혀는 곧 불이라 했고(약3:6),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한 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벧전3:10절)
또 예수님께서는 “네 말로 의와 죄를 정한다”(마12:36-37절)고 했습니다. 옛날 어떤 농부가 거북이를 잡아 솥에 삶았으나 삶아지지 않아 할 수 없이 지게에 지고 바다에 버리려고 가다가 뽕나무 밑에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북이가 “자기는 삶아지지 않는다”고 뽕나무에게 자랑하자 뽕나무가 농부에게 “그래요, 나를 베어 거북이를 삶으면 됩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는 자기를 자랑하는 입방정 때문에 죽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坐中談笑 愼桑龜)라는 고사(故辭)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입과 혀를 잘 지켜 영혼을 보존하고 항상 유익된 말, 덕스러운 말, 은혜로운 말로서 조심조심하는 생활을 합시다. 그래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하게 하는 부덕을 범치 맙시다.
3. “설”은 설 익다는 의미도 있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설다, 새롭다”는 뜻입니다. 묵은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돌아올 미지(未知)의 날에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가 클 것입니다. 롬8: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죄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성화되고, 영화되어 완전함을 입게 될 큰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이 한해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몰라도, 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큰 희망을 가지고 복음 전선에 나아갑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라는 국가적 소망은 “민족 복음화”와 “남북통일”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강산이 여호와의 제단이 되고, 이 민족이 여호와의 제물 되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합시다. 이제 우리에게는 설이 서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하며 근신하는 마음으로 또 한해를 출발합시다. 잘해 보자는 욕심과 소망으로 마음의 신발 끈을 단단히 매고 힘차게 출발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마음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묵은해가 가고 한해의 첫날인 설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좋은 생각을 하여 좋은 꿈을 많이 꾸시고 새로운 희망이 넘치는 복스러운 설날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음력으로 새해의 첫날인 설날부터 섣달그믐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구정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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