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선행을격려하자
페이지 정보
본문
본문 히브리서 10:19-25절에 보면 우리는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니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그 소망을 굳게 붙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1.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유대인들의 옛 구전집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가장 영리한 광대 시몬에게 세상에 나가 가장 좋은 것을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치 광대 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은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다가 왕이 지시한 물건을 구해 상자에 담아 왔습니다. 왕이 그들이 가져온 상자를 개봉 해 보니 똑같이 사람의 “혀”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탈무드의 교훈은 사람의 혀가 잘 사용하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될 수 있고 조금 잘못 사용하면 가장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쓴 말 한마디가 백 마디의 위로로 지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들 수 있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남의 생명을 죽게 할 수 있습니다. 가시 돋친 말 한마디가 비수보다 더 아프게 가슴에 박힐 수 있고 무책임한 낭설을 퍼트려 많은 사람을 매장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말은 등불 같아 어둠속에 방황하는 사람의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고 상처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슴을 훈훈하게 녹여줍니다. 좋은 말 한 마디는 비싼 약보다 낳은 것입니다. 그것은 치료의 성분과 예방의 효험을 졌기 때문입니다. 나뭇잎에 물 한 방울이 “나는 너무 작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푸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그가 떨어져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꽃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슨 도움이 되려고” 하는 생각으로 입을 다무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의 한마디의 위로를 목 타게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잠언 25:11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경우에 합당한 말은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했습니다. 말을 많이, 길게만 하려고 하지 말고 한마디라도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면 그 말이 은 쟁반에 금사과 같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실 생각 해 보면 우리 모두가 잘 살아보자고 애쓰고 서로 모여 의논하는 것 아닙니까? 기왕이면 서로 부추겨 주고 격려하고 사랑으로 권면하면 세상이 얼마나 부드러워지겠습니까? 작은 지체지만 혀는 우리 몸에, 아니 인생에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중에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24절)고 했습니다. 남의 선행을 격려하는데 인색하지 맙시다. 비록 나는 못했을지라도 남이 좋은 일을 했을 때 말 한마디로라도 칭찬하고 격려하면 피곤하다가도 오히려 새 힘이 솟고 봉사에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 줍시다. 목회하면서 애로 사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에서 숨은 봉사를 하며 수고한 분들을 강단에서 칭찬해 주고 싶어도 “나 일할 때는 아무 말도 않더니 자기 좋아한 사람만 칭찬한다”고 속으로 못 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시험거리가 될까 보아 칭찬하기가 조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가 칭찬하지 않더라도 이해 해 주세요. 또 이 세상에서 칭찬받으면 하늘에 가서 상급이 없을 수 있으니 성경 말씀대로 하늘나라에 많이 쌓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대로 우리끼리는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그래야 서로 살맛나지 않겠습니까?
2. 남을 기죽이지 맙시다.
옛날 3년간 계속되었던 보아전쟁(Boer War)때 아주 특이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레이디 스미스”라는 마을이 적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이 사람은 도시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편이 이기기는 틀렸다. 전세가 너무 불리하다. 숫자도 화력도 너무 부족하다. 적군은 얼마나 강한 줄 아느냐?”고 걱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생하고 있는 군인들을 위로 해 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좋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정부로부터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낙담시키는 자’라는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가끔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형제와 자매를 낙담시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불가능하다. 너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해 보아도 안 될 것이다” 등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가까운 사람들을 낙담시킵니다. “우리 회사는 아무개 같은 사람 때문에 잘 되기는 틀렸어”심지어 교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교역자에 대한 낭설을 퍼트리고, 아무개 같은 집사 때문에 부흥되기는 틀렸어 라고 기죽이는 소리를 하고 다니면서 교인들의 기분을 완전히 깔아지게 하는 잘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팔을 걷어붙이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 보려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자주 들으면 일하고 싶은 의욕이 상실되고 그 교회는 업그레이드( up-grade) 되기는 커녕 완전히 업다운(up-down)되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병 걸린 병아리처럼 교인들이 비실비실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음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22절)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혜 없는 사람과 같이 살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엡5:15-16절) 기왕이면 남의 기를 죽이는 말을 하지 말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언어를 사용합시다. 아무리 자기 자녀들이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는 말, “너는 못해”라고 하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자기 딴에는 위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의 기를 죽이고, 상처받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하찮은 말이나 행동으로 낙담시켜서는 안 됩니다. 가뜩이나 다들 살기가 어렵고 힘든 이때 행여 이웃을 낙담시키지 말고 진정한 사랑과 애정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줍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14절에 보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고 또 갈라디아서 6: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쉽게 한 말 한마디가, 행동 하나가 얼마든지 남을 낙담시킬 수 있습니다. 격려하고 용기는 주지 못할망정 낙담시키면 안 됩니다. 그것은 상처위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낙담시키는 자”라는 죄명의 유죄 판결을 받고 있는 지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함부로 죄 짓고 활보하지 맙시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합시다.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3. 남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갖읍시다.
창세기 40:7절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로의 신하들에게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나이까?” 하고 물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요셉의 형편은 어떤 신세였습니까? 노예로 살던 집 주인 부인의 음탕한 유혹을 뿌리친 정직 때문에 오히려 겁간하려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도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가 막혀 밥이 제대로 넘어가겠습니까? 언제 풀려날지 가망 없는 징역살이 신세였습니다. 자기 코도 석자나 빠져 있는데 남의 일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여기에 온 것은 무엇인가 이곳에서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옥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봉사를 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뜻에 기준을 두고 좋게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요셉을 옥사장은 알아보고 제반 사무를 요셉의 손에 맡겨 처리하게 했다고 했습니다.(창29:22절) 창세기의 내용을 볼 때 요셉은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신바람 나게 죄수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을 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도 아침에 일어나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바로의 관원들을 살펴보았기에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생각만 먼저하고 남의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갖습니까? 아니 남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지는 않습니까? 요셉은 그들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게 여겨 말을 걸었던 것이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나중에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해석 해 주고 일약 발탁되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엄청난 행운의 사나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당연한 보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은 믿음과 정직하고 성실하며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마음으로 말없이 봉사하면 하나님이 먼저 아시고, 사람들도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생각하고 행동한 만큼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보상 원리이기도 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죽겠다. 바쁘다. 못 살겠다. 힘들다”고 자기 타령만 하지 얼마나 남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갖습니까? 내가 요셉처럼 괴롭고 분하고 억울한 처지였다면 어찌 남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 것까지 신경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요즈음 좀 어렵다고 너무 인간관계가 차가워진 것 같아 오한 끼가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위를 돌아보면 마음 아파하던 요셉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너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얻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 은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24절) 고 강력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①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혀로 기죽이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격려합시다.
②무심코 던진 돌이 개구리 머리에 맞아 죽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 없이 가볍게 말하여 남의 기를 죽이지 맙시다.
③남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가집시다. 요셉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도 복에 복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1.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유대인들의 옛 구전집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가장 영리한 광대 시몬에게 세상에 나가 가장 좋은 것을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치 광대 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은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다가 왕이 지시한 물건을 구해 상자에 담아 왔습니다. 왕이 그들이 가져온 상자를 개봉 해 보니 똑같이 사람의 “혀”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탈무드의 교훈은 사람의 혀가 잘 사용하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될 수 있고 조금 잘못 사용하면 가장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쓴 말 한마디가 백 마디의 위로로 지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들 수 있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남의 생명을 죽게 할 수 있습니다. 가시 돋친 말 한마디가 비수보다 더 아프게 가슴에 박힐 수 있고 무책임한 낭설을 퍼트려 많은 사람을 매장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말은 등불 같아 어둠속에 방황하는 사람의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고 상처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슴을 훈훈하게 녹여줍니다. 좋은 말 한 마디는 비싼 약보다 낳은 것입니다. 그것은 치료의 성분과 예방의 효험을 졌기 때문입니다. 나뭇잎에 물 한 방울이 “나는 너무 작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푸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그가 떨어져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꽃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슨 도움이 되려고” 하는 생각으로 입을 다무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의 한마디의 위로를 목 타게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잠언 25:11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경우에 합당한 말은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했습니다. 말을 많이, 길게만 하려고 하지 말고 한마디라도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면 그 말이 은 쟁반에 금사과 같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실 생각 해 보면 우리 모두가 잘 살아보자고 애쓰고 서로 모여 의논하는 것 아닙니까? 기왕이면 서로 부추겨 주고 격려하고 사랑으로 권면하면 세상이 얼마나 부드러워지겠습니까? 작은 지체지만 혀는 우리 몸에, 아니 인생에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중에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24절)고 했습니다. 남의 선행을 격려하는데 인색하지 맙시다. 비록 나는 못했을지라도 남이 좋은 일을 했을 때 말 한마디로라도 칭찬하고 격려하면 피곤하다가도 오히려 새 힘이 솟고 봉사에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 줍시다. 목회하면서 애로 사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에서 숨은 봉사를 하며 수고한 분들을 강단에서 칭찬해 주고 싶어도 “나 일할 때는 아무 말도 않더니 자기 좋아한 사람만 칭찬한다”고 속으로 못 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시험거리가 될까 보아 칭찬하기가 조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가 칭찬하지 않더라도 이해 해 주세요. 또 이 세상에서 칭찬받으면 하늘에 가서 상급이 없을 수 있으니 성경 말씀대로 하늘나라에 많이 쌓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대로 우리끼리는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그래야 서로 살맛나지 않겠습니까?
2. 남을 기죽이지 맙시다.
옛날 3년간 계속되었던 보아전쟁(Boer War)때 아주 특이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레이디 스미스”라는 마을이 적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이 사람은 도시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편이 이기기는 틀렸다. 전세가 너무 불리하다. 숫자도 화력도 너무 부족하다. 적군은 얼마나 강한 줄 아느냐?”고 걱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생하고 있는 군인들을 위로 해 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좋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정부로부터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낙담시키는 자’라는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가끔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형제와 자매를 낙담시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불가능하다. 너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해 보아도 안 될 것이다” 등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가까운 사람들을 낙담시킵니다. “우리 회사는 아무개 같은 사람 때문에 잘 되기는 틀렸어”심지어 교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교역자에 대한 낭설을 퍼트리고, 아무개 같은 집사 때문에 부흥되기는 틀렸어 라고 기죽이는 소리를 하고 다니면서 교인들의 기분을 완전히 깔아지게 하는 잘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팔을 걷어붙이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 보려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자주 들으면 일하고 싶은 의욕이 상실되고 그 교회는 업그레이드( up-grade) 되기는 커녕 완전히 업다운(up-down)되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병 걸린 병아리처럼 교인들이 비실비실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음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22절)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혜 없는 사람과 같이 살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엡5:15-16절) 기왕이면 남의 기를 죽이는 말을 하지 말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언어를 사용합시다. 아무리 자기 자녀들이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는 말, “너는 못해”라고 하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자기 딴에는 위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의 기를 죽이고, 상처받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하찮은 말이나 행동으로 낙담시켜서는 안 됩니다. 가뜩이나 다들 살기가 어렵고 힘든 이때 행여 이웃을 낙담시키지 말고 진정한 사랑과 애정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줍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14절에 보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고 또 갈라디아서 6: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쉽게 한 말 한마디가, 행동 하나가 얼마든지 남을 낙담시킬 수 있습니다. 격려하고 용기는 주지 못할망정 낙담시키면 안 됩니다. 그것은 상처위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낙담시키는 자”라는 죄명의 유죄 판결을 받고 있는 지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함부로 죄 짓고 활보하지 맙시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합시다.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3. 남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갖읍시다.
창세기 40:7절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로의 신하들에게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나이까?” 하고 물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요셉의 형편은 어떤 신세였습니까? 노예로 살던 집 주인 부인의 음탕한 유혹을 뿌리친 정직 때문에 오히려 겁간하려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도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가 막혀 밥이 제대로 넘어가겠습니까? 언제 풀려날지 가망 없는 징역살이 신세였습니다. 자기 코도 석자나 빠져 있는데 남의 일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여기에 온 것은 무엇인가 이곳에서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옥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봉사를 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뜻에 기준을 두고 좋게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요셉을 옥사장은 알아보고 제반 사무를 요셉의 손에 맡겨 처리하게 했다고 했습니다.(창29:22절) 창세기의 내용을 볼 때 요셉은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신바람 나게 죄수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을 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도 아침에 일어나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바로의 관원들을 살펴보았기에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생각만 먼저하고 남의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갖습니까? 아니 남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지는 않습니까? 요셉은 그들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게 여겨 말을 걸었던 것이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나중에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해석 해 주고 일약 발탁되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엄청난 행운의 사나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당연한 보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은 믿음과 정직하고 성실하며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마음으로 말없이 봉사하면 하나님이 먼저 아시고, 사람들도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생각하고 행동한 만큼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보상 원리이기도 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죽겠다. 바쁘다. 못 살겠다. 힘들다”고 자기 타령만 하지 얼마나 남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갖습니까? 내가 요셉처럼 괴롭고 분하고 억울한 처지였다면 어찌 남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 것까지 신경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요즈음 좀 어렵다고 너무 인간관계가 차가워진 것 같아 오한 끼가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위를 돌아보면 마음 아파하던 요셉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너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얻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 은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24절) 고 강력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①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혀로 기죽이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격려합시다.
②무심코 던진 돌이 개구리 머리에 맞아 죽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 없이 가볍게 말하여 남의 기를 죽이지 맙시다.
③남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가집시다. 요셉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도 복에 복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관련링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