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인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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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율법사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당신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렇다면 율법에 이미 그 해답이 나와 있을 텐데 왜 내게 묻느냐? 는 의미가 담긴 반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되묻자 그 율법사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며 살리라”(28절) 왜 알면서 물어보느냐? 그 말씀대로 살면 될 것 아니냐? 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다시 질문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달달 외우는 사람이 아직도 자기의 이웃을 모르고 있었다는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셨습니까? 설교는 얼마나 많이 들으셨습니까? 그러면서 왜 교회에 나오는지도 모른다면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른다면 큰일입니다. 동원 참치 사장 어머님이 세례 문답을 하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느냐? 고 묻자 “아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을 끼라”고 대답했다는 웃기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노인은 며느리가 세례 문답 전에 교육을 시키면서 목사님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시면 “우리 아버지라고 대답하세요. 잊어버리면 안 돼요”라고 단단히 일러드렸습니다. 드디어 D-day가 왔고 세례 문답은 여러 교인들이 모인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며느리의 예상 문제는 적중했습니다. 역시 목사님이 “할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이십니까?”하고 묻자 이 할아버지는 옳지 됐다 하고 자신 있게 “나의 사돈입니다” 당당하게 으시대며 대답했습니다. 그때 박장대소가 주위에서 터져 나오자 어리둥절한 할아버지가 “분명히 내 며느리의 아버지라고 했단 말입니다”하고 오히려 화를 내더랍니다. 평생 성경을 연구했다는 율법사도 어떻게 보면 그 노인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사실 아직도 그런 정도의 상식으로 예수를 믿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있는 저희 아들이 “아버지! 한국 교인들은 예수님을 깡패 대장으로 아는 것 같아요? 왜 교회에서 그렇게 싸우지요. 당회 때 마다 싸우지요. 재직회 때마다 싸우지요” 싸우는 것 보기 싫어 한국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목사인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설명하신 비유가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본문 내용에 예수님은 세 종류의 인생철학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①첫째 인생관은 “네 것이 내 것이다”고 욕심을 부리는 강도 인생관이요.
②두 번째는 “내 것은 내 것이다. 나에게 상관 말라”는 이웃을 망각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고립주의, 이기주의 인생관이요.
③셋째는 “내 것이 네 것이다”라는 나눔의 인생관, 베푸는 인생관인 곧 사랑의 인생관입니다.
나는 이 세 가지 중 어떤 인생관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1. 강도 인생관은 어떤 인생관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 같은 인생관입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졸라 되어 뺐다시피 나누어 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했던 작은 아들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모른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자요. 아버지의 소유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입니다. 아들로서 책임을 망각한자요.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도둑 인생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대인들의 인생관을 “엇나가는 3박자 인생관”이라고 한답니다. “무조건 큰 것이 좋다. 많이 가지는 것이 성공이다. 나만 기분 좋고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나쁠 것 없는 말 같으나 따지고 보면 본문에 나오는 강도나, 탕자의 가치관과 하나 다를 것 없습니다. 한마디로 극단의 이기주의요, 자기중심적인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대답은 그것은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병들면 약을 구하고, 위급하면 구급차를 부르듯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우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며 그 분의 뜻을 쫓고, 미래를 그 분에게 의뢰하며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인생 태도를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웃과 사귀고, 가정도 다스리고, 시간과 물질도 사용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2.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자기중심적 인생관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에게 당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채 지나쳐 갔습니다. 이들은 나만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빨리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저 사람의 죽음과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평상시 남을 위해 기도 해주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당하자 자기들 외에 전혀 남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우리 진지하게 숙고 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나만 구원 받아 천국가면 되지 저 사람이 지옥 가든 음부에 가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진 않습니까? 심지어 부모도, 형제도 어떻게든지 예수 믿어 함께 천국가려는 고민도 안 해 본다면 큰일입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 맙시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영적 이기주의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조금도 다를 것 없습니다. 요즈음 교회들도 모두 자기 교회 중심이요. 선 한 일 하는데 예산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머니가 비워질까 보아 전진 긍긍합니다. 그래서 남의 교회 신자라도 기를 쓰고 빼앗아다가 자기 교회만 잘 되게 하려고 합니다. 교회까지 빈익빈, 부익부 사상이 팽배하여 그런 강도 같은 행동들을 한다면 어찌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진지하게 생각 해 봅시다. 한술 더 떠서 이런 이야기 하면 콧방귀를 뀌며 약사의 자기변명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교회, 한국 교인들이여! 극단적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그것은 그 사고방식은 예수님께서 가르친 신앙철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배격하고, 통렬하게 비판하신 반 기독정신인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약점을 지적하고 꼬집으며 자기를 합리화 하거나 정당화 하려고 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을 꾸짖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동생의 회개, 아버지의 용서, 마을 사람들의 기쁨에 동참하지 않은 맏아들의 “나 홀로 철학, 자기만 잘했다는 이기주의적인 인생관”을 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립보다 공존(共存)이 낫고, 전쟁보다 평화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지구촌은 한 배에 탄 가족입니다.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대기와 물의 오염을 방지하고, 날로 무서워져 가는 질병과 싸우고, 살기 좋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시작하신 천국 운동인 것입니다. 여러분, 따지고 보면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좋은 이웃이 되는 운동입니다. 진리는 평범한 데 있습니다. 바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챙기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실천 운동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이웃을 돌보지 않고 인류 평화를 위해 몸을 던지겠다는 웅변은 정치인들의 캐치 플레이는 될지언정 그리스도인들의 구호는 아닙니다.
3. 베품의 인생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 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인가? 율법사는 그때서야 “베푸는 자니이다”(37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또 다시 강도가 나오지 않을까 겁이 안 났을 리 없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자기도 이 강도만난 사람처럼 당할 수 있다는 것에 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살겠다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놓아두고 자기만 살자고 도망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는 응급처치를 한 후 자기는 걷고 그 환자는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운반하여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돈도 많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돌보아 주는 비용을 돌아오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자기도 돈이 없고 가난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의 생명을 자기 생명처럼 아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에 그 강도만난 사람에게 신세진 일도 없습니다. 얼굴도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가진 것이 그 사람 것도 된다”는 나눔의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베푸는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남의 애처로움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자비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했습니다. 율법사처럼 알고 있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교인은 교인의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교회는 교회 사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나눔의 철학이요 사랑의 인생관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 기록된 모든 역사와 사건을 통하여 기독교의 중심사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신19:18절)고 당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까?”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근본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1서4:8) 모름지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마땅히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인생관, 나눔의 철학은 영생을 얻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철학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나누는 삶을 삽시다. 마음을 나눕시다. 사랑을 나눕시다. “내 것이 네 것이라”(mine is yours)는 사마리아인의 삶을 삽시다. 내가 져서 상대방이 좀 기뻐하면 어떻습니까? "나의 희생이 상대방의 행복“이 된다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성서의 가르침은 반드시 100배, 60배, 30배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자가 복 있는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①첫째 인생관은 “네 것이 내 것이다”고 욕심을 부리는 강도 인생관이요.
②두 번째는 “내 것은 내 것이다. 나에게 상관 말라”는 이웃을 망각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고립주의, 이기주의 인생관이요.
③셋째는 “내 것이 네 것이다”라는 나눔의 인생관, 베푸는 인생관인 곧 사랑의 인생관입니다.
나는 이 세 가지 중 어떤 인생관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1. 강도 인생관은 어떤 인생관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 같은 인생관입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졸라 되어 뺐다시피 나누어 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했던 작은 아들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모른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자요. 아버지의 소유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입니다. 아들로서 책임을 망각한자요.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도둑 인생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대인들의 인생관을 “엇나가는 3박자 인생관”이라고 한답니다. “무조건 큰 것이 좋다. 많이 가지는 것이 성공이다. 나만 기분 좋고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나쁠 것 없는 말 같으나 따지고 보면 본문에 나오는 강도나, 탕자의 가치관과 하나 다를 것 없습니다. 한마디로 극단의 이기주의요, 자기중심적인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대답은 그것은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병들면 약을 구하고, 위급하면 구급차를 부르듯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우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며 그 분의 뜻을 쫓고, 미래를 그 분에게 의뢰하며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인생 태도를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웃과 사귀고, 가정도 다스리고, 시간과 물질도 사용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2.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자기중심적 인생관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에게 당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채 지나쳐 갔습니다. 이들은 나만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빨리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저 사람의 죽음과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평상시 남을 위해 기도 해주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당하자 자기들 외에 전혀 남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우리 진지하게 숙고 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나만 구원 받아 천국가면 되지 저 사람이 지옥 가든 음부에 가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진 않습니까? 심지어 부모도, 형제도 어떻게든지 예수 믿어 함께 천국가려는 고민도 안 해 본다면 큰일입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 맙시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영적 이기주의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조금도 다를 것 없습니다. 요즈음 교회들도 모두 자기 교회 중심이요. 선 한 일 하는데 예산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머니가 비워질까 보아 전진 긍긍합니다. 그래서 남의 교회 신자라도 기를 쓰고 빼앗아다가 자기 교회만 잘 되게 하려고 합니다. 교회까지 빈익빈, 부익부 사상이 팽배하여 그런 강도 같은 행동들을 한다면 어찌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진지하게 생각 해 봅시다. 한술 더 떠서 이런 이야기 하면 콧방귀를 뀌며 약사의 자기변명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교회, 한국 교인들이여! 극단적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그것은 그 사고방식은 예수님께서 가르친 신앙철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배격하고, 통렬하게 비판하신 반 기독정신인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약점을 지적하고 꼬집으며 자기를 합리화 하거나 정당화 하려고 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을 꾸짖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동생의 회개, 아버지의 용서, 마을 사람들의 기쁨에 동참하지 않은 맏아들의 “나 홀로 철학, 자기만 잘했다는 이기주의적인 인생관”을 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립보다 공존(共存)이 낫고, 전쟁보다 평화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지구촌은 한 배에 탄 가족입니다.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대기와 물의 오염을 방지하고, 날로 무서워져 가는 질병과 싸우고, 살기 좋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시작하신 천국 운동인 것입니다. 여러분, 따지고 보면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좋은 이웃이 되는 운동입니다. 진리는 평범한 데 있습니다. 바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챙기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실천 운동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이웃을 돌보지 않고 인류 평화를 위해 몸을 던지겠다는 웅변은 정치인들의 캐치 플레이는 될지언정 그리스도인들의 구호는 아닙니다.
3. 베품의 인생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 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인가? 율법사는 그때서야 “베푸는 자니이다”(37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또 다시 강도가 나오지 않을까 겁이 안 났을 리 없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자기도 이 강도만난 사람처럼 당할 수 있다는 것에 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살겠다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놓아두고 자기만 살자고 도망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는 응급처치를 한 후 자기는 걷고 그 환자는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운반하여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돈도 많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돌보아 주는 비용을 돌아오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자기도 돈이 없고 가난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의 생명을 자기 생명처럼 아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에 그 강도만난 사람에게 신세진 일도 없습니다. 얼굴도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가진 것이 그 사람 것도 된다”는 나눔의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베푸는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남의 애처로움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자비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했습니다. 율법사처럼 알고 있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교인은 교인의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교회는 교회 사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나눔의 철학이요 사랑의 인생관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 기록된 모든 역사와 사건을 통하여 기독교의 중심사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신19:18절)고 당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까?”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근본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1서4:8) 모름지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마땅히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인생관, 나눔의 철학은 영생을 얻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철학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나누는 삶을 삽시다. 마음을 나눕시다. 사랑을 나눕시다. “내 것이 네 것이라”(mine is yours)는 사마리아인의 삶을 삽시다. 내가 져서 상대방이 좀 기뻐하면 어떻습니까? "나의 희생이 상대방의 행복“이 된다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성서의 가르침은 반드시 100배, 60배, 30배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자가 복 있는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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