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어 복을 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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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들이 자녀를 낳아 길으면서 제일 기쁘고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장아장 걸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며 귀찮토록 달라붙을 때가 가장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잘 자라서 소위 성공했다고 할 때일까요?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하고, 직장에서 지위도 높아졌을 때 물론 자랑스럽고 기쁘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보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그때 비로소 부모와 자식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심이 통하고 대화가 통합니다. 그때 제대로 효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최고로 기뻐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일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녀들이 오순도순 사랑하며 우애하고 사는 것을 볼 때 그 이상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이신 것을 믿으시지요. 곧 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며 의지입니다. 성경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바라시는 뜻대로 행복하게 살다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도 최고로 기뻐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모두 하나 되기를 빌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모두 하나 되기를 빌었습니다.(요17:21-23) 바울 서신을 보아도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했고, 고전 12:12절 이하에서는 “한 몸의 지체와 동일” 하다고 일체가 될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13:11절에 “.......서로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 할지어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막혔던 담이 헐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로 연합될 것을 예언했고(엡2:13-14절) 그리스도인은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이며 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도 하나이심을 기억하면서 평안히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4:3-6절)고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 전체를 보면 “그리스도인의 화목에 대한 소원”을 힘차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合一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처럼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입니까? 교회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해서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될 때 내가 편안하고 기쁩니다. 내가 영육 간에 건강해집니다. 한번 웃을 때 근육 230개가 움직이고 에어로빅을 10분동안 한 것과 같으며, 5초 동안 호탕하게 웃으면 3일간 생명이 연장된다고 합니다. 제발 웃고 삽시다. 제멋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남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된 사랑이 마치 사치품으로 취급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기들을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깊은 속마음을 알아야 진정한 효도를 할 수 있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서로 sign이 통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sign을 바로 알고, 믿음의 행위를 바로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 해 봅시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힘을 주어 강조하면서 크리스챤끼리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까?
1. 마음을 같이하며 서로 동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들과 같이 울어야 한다”(롬12:15절)고 했습니다. 남이 못 되는 것을 내심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지체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으며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12;26절) 동정과 이기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2.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겸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으며 또 받고 있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요일 4:20절)했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 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4-15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시험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의 농도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은 식물의 성장점과 같고 곤충의 더듬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의 심령 속에 있는 사람은 식물이 빛을 향해 성장하듯 곤충이 더듬이로 갈 곳과 안 갈 곳을 식별하듯 빛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사랑이신 하나님 쪽으로 바로 찾아가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을 불쌍히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긍휼의 촉각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순간적인 동정심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감상주의적 동정심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불쌍히 여김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또 겸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①창조자 앞에 있는 피조물이라는 느낌에서 와야 합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서 혼자의 힘으로는 완전치 못함을 깨달을 때 겸손해집니다.
②비교의 기준이 예수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동료와 자신을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표준으로, 거울로 자기 앞에 놓아둘 때 영원히 겸손할 수 있습니다.
③그리스도의 특징은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 해 주는 것입니다.(엡4:23)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줄 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도 용서받습니다.(마6:12, 14, 15)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위 사람이 복 받고 후대가 복 받습니다. 12절에 주의 눈은 누구를 향한다고 했습니까?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신다고 했습니다.(12절)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고 했습니다.(잠2:7절) 어느 추운 겨울 날 깊은 산길에 차를 몰고 가던 사람이 얼어 죽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어서 아들에게 입혀 주었기에 죽기 직전이어서 차에 태워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들만 차에 태우고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이 가물가물 하던 어머니는 비몽사몽 중에도 아들이 유괴되는 줄 알고 사력을 다해 차를 쫓아왔습니다. 운전자는 잠시 멈추는 듯 하다가 다시 몰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는 차를 따라 오느라고 몸이 녹아 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까지 아니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자기도 살고 자식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세요. 그것이 남도 살고 자기도 사는 비결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중 예화처럼 죽은 부모를 놓고 서로 재산 더 가져가기 위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던 자녀들처럼 되면 안 됩니다. 그 어머니는 이미 재산을 개에게 유산으로 주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자기 한 일은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사람이 제일 꼴불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리하면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완전한 지혜가 있으십니다. 행실이 온전한 자의 방패가 되십니다. 하나님 얼굴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신다고 했습니다. 함부로 오해하고, 남을 비방하고, 생각 없이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통찰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지체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아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 섬기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욕을, 옥으로, 악을 악으로 친히 갚지 말고 오히려 서로 복을 빌어 줍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친히 몸 깨뜨려 세우신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13:11절에 “.......서로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 할지어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막혔던 담이 헐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로 연합될 것을 예언했고(엡2:13-14절) 그리스도인은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이며 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도 하나이심을 기억하면서 평안히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4:3-6절)고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 전체를 보면 “그리스도인의 화목에 대한 소원”을 힘차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合一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처럼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입니까? 교회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해서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될 때 내가 편안하고 기쁩니다. 내가 영육 간에 건강해집니다. 한번 웃을 때 근육 230개가 움직이고 에어로빅을 10분동안 한 것과 같으며, 5초 동안 호탕하게 웃으면 3일간 생명이 연장된다고 합니다. 제발 웃고 삽시다. 제멋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남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된 사랑이 마치 사치품으로 취급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기들을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깊은 속마음을 알아야 진정한 효도를 할 수 있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서로 sign이 통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sign을 바로 알고, 믿음의 행위를 바로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 해 봅시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힘을 주어 강조하면서 크리스챤끼리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까?
1. 마음을 같이하며 서로 동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들과 같이 울어야 한다”(롬12:15절)고 했습니다. 남이 못 되는 것을 내심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지체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으며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12;26절) 동정과 이기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2.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겸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으며 또 받고 있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요일 4:20절)했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 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4-15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시험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의 농도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은 식물의 성장점과 같고 곤충의 더듬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의 심령 속에 있는 사람은 식물이 빛을 향해 성장하듯 곤충이 더듬이로 갈 곳과 안 갈 곳을 식별하듯 빛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사랑이신 하나님 쪽으로 바로 찾아가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을 불쌍히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긍휼의 촉각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순간적인 동정심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감상주의적 동정심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불쌍히 여김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또 겸손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①창조자 앞에 있는 피조물이라는 느낌에서 와야 합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서 혼자의 힘으로는 완전치 못함을 깨달을 때 겸손해집니다.
②비교의 기준이 예수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동료와 자신을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표준으로, 거울로 자기 앞에 놓아둘 때 영원히 겸손할 수 있습니다.
③그리스도의 특징은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 해 주는 것입니다.(엡4:23)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줄 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도 용서받습니다.(마6:12, 14, 15)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위 사람이 복 받고 후대가 복 받습니다. 12절에 주의 눈은 누구를 향한다고 했습니까?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신다고 했습니다.(12절)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고 했습니다.(잠2:7절) 어느 추운 겨울 날 깊은 산길에 차를 몰고 가던 사람이 얼어 죽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어서 아들에게 입혀 주었기에 죽기 직전이어서 차에 태워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들만 차에 태우고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이 가물가물 하던 어머니는 비몽사몽 중에도 아들이 유괴되는 줄 알고 사력을 다해 차를 쫓아왔습니다. 운전자는 잠시 멈추는 듯 하다가 다시 몰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는 차를 따라 오느라고 몸이 녹아 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까지 아니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자기도 살고 자식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세요. 그것이 남도 살고 자기도 사는 비결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중 예화처럼 죽은 부모를 놓고 서로 재산 더 가져가기 위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던 자녀들처럼 되면 안 됩니다. 그 어머니는 이미 재산을 개에게 유산으로 주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자기 한 일은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사람이 제일 꼴불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리하면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완전한 지혜가 있으십니다. 행실이 온전한 자의 방패가 되십니다. 하나님 얼굴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신다고 했습니다. 함부로 오해하고, 남을 비방하고, 생각 없이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통찰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지체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아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 섬기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욕을, 옥으로, 악을 악으로 친히 갚지 말고 오히려 서로 복을 빌어 줍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친히 몸 깨뜨려 세우신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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