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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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신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의 가르치심을 받으려는 무리가 많아지고, 청중을 생각하신 예수님은 종종 언덕이나, 들이나, 자연환경에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무리들과 함께 게네사렛 호숫가에 까지 나오신 예수님과 자연환경 속에서 그의 가르치심을 경청하는 무리, 밤이 맞도록 그 호수에서 헛수고한 어부들이 빈 그물을 씻는 대조적인 장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소개됩니다. 어부들 중에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많은 사람들처럼 여유가 있거나, 취미로 낚시질을 간 사람이 아닙니다. “내일은 다른 데로 가 봅시다!” 오락이나 소일삼아 여기 저기 고기 잡으려 가는 사람과는 달리 그는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잡아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되는 사람, 식구들의 목숨이 그물던지기에 달린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밤을 꼬박 새면서 그물을 던지고 또 던지고 잡아 다녔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어부들입니다. 얼마나 착잡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의욕상실”이라는 말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표현일 것입니다. “절망적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절망할 수 없어서, “한 번 더 던져보자!”는 것이 밤을 꼬박 새우게 했고, 이제 고기가 잡히는 때마져 다 놓쳐버린 아침입니다.“산다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을 빼앗아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힘을 다 해서, 언제나 양심 것 최선을 다 하는데도 왜 이렇게 빈손 만 쥐고 가슴을 쥐어짜야 한단 말이냐?”아마, 오늘 우리 같으면, 그도 이런 푸념, 불만, 원망으로 숨 가쁜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구차하고 역겨운 생활을 계속해야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흔히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가져 보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의욕상실이나, 절망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외 없이 누구나 당할 수 있고,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빠질 수 있습니다. 두려운 것은 이런 경우 우리는 우발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국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자마이카에서 미국으로 들어온 퍼거슨, 삼십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 좋다는 미국에 살지만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는 자기를 채찍질 하면서 참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견디면 견딜수록,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힘들수록 세상이 자기에게 무관심한 것이 싫어지고, 결국 세상은 자기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생김새 때문에 차별당하면서 하루같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 해 12월 7일, 저녁나절 그는 백여 발의 실탄과 자동권총을 준비하고 뉴욕에서 힉스빌 롱아일랜드를 왕래하는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한 번 일을 내 보려는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앉아 있는 동안, 그는 그 끔직스런 살인계획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 “끝이다!” “절망이다” “더 이상은 못 견딘다”는 마음속의 발버둥과 아우성을 극복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더 참아서 뭘 하겠단 말이냐?” “나는 틀렸다!” “나 밖에 누가 나를 안단 말인가!” “다 죽이고 죽자!” 갑자기 일어나 전혀 무방비 상태인 승객들을 향해서 무차별 난사를 합니다. 죽을 각오로 닥치는 대로 쏴댄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매일 실패, 의욕상실, 낙심, 고통의 소용돌이 와 짝하여 사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을 피해서 사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한 다윗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장군이요, 용사요, 시인이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됩니다.”(시 42:5) 호소합니다.
한때 그는 얼마나 힘들고, 의지가 없고, 절망적이었든지;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 때처럼 절망적인 경우가 있을까요?
선지자중의 선지자라 할 수 있는 엘리아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사와 이적으로 함께 하셨던 그 사람, 그도 한 때 절망과, 좌절 중에; “아, 하나님, 더는 싫습니다. 내 목숨을 지금 거두어 가소서” 울부짖은 때 (왕상 17-19장)가 있었습니다.
어부 시몬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직업이 어부 입니다. 그렇다면, “하루 이틀 허탕치고, 빈손으로 집에 가는 것이 예사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지만. 빈손으로 들어가는 날이 잦아지면서, “아, 이 운명, 어부라는 운명의 굴레를 어쩐단 말인가!”“저 무정하고, 잔인한 물속, 나는 어째서 하루같이 이 지긋지긋한 그물질을 거듭하면서 허우적대는가! 마음속으로 몸부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그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좌절, 실의에 찬 사람에게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새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하지만 그는 그물을 씻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잠시 후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배를 좀 빌리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예수님, 어떤 수모라도 감수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 사람, 어부 베드로에게 다가섰을 것입니다. 아마는 그곳 호수까지 오신 것도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초면이 아닌 베드로를 심중에 두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훗날 베드로, “아, 주님, 그날 그때 그가 내게 오시어 절망, 좌절, 실의의 고통으로 몸부림하던 나를 만나주시려고, 일으켜 세우시려고, 나의 주님이 되어주시려고, 나의 능력과 소망과 영생이 되어주시려고 그곳 그 자리에 찾아오셨다”고 거듭 간증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읽고 그를 보고, 우리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두 사람, 그저 몇 마디 말 주고받는 것으로 그칩니다. 불쑥“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 “밤새껏 수고했지만 한 마리 못 잡았지만, 말씀을 따라 그리 하겠습니다!”
베드로 맘속으로 순간 “어부를 너무 모르신다! (나를 너무 모르신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성경말씀이, 주님의 가르치심이 가끔 나의 현실과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듯이 말입니다. 베드로,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 두 배에 가득하게 잡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배를 대자마자 그는 예수님 앞으로 가 엎드립니다. 그리고“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어 베드로와 일행은 배는 물론 잡은 고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마다 속의 이야기가 많듯이 실의에 찬 베드로의 이야기로 볼 것인지, 그를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볼 것인지, 현장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을 이야기 할 것인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이야기할 것인지 사람마다, 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봅시다.
밤새껏 수고(toiled) 한 시몬 그는 이미 몸과 맘이 기진맥진한 사람입니다.“얻은 것이 없지만...”이라는 말은 수천, 수만 근의 말속의 말의 무게가 있는 말입니다. “한 번 다시 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한 번 더 해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빈 그물을 당기고 허탈해하는 자기노출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목숨 줄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그 사람. 물이 두렵고, 무정스러워 그것을 생각하기도 싫다는 생각일 터인데 말입니다.
왜, 그렇게 일이 안되면, 사람들이 밉습니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싫어져야 할 것인데 남이 싫어집니다. “내 생각이 틀렸구나!”“내가 모르는 것, 내가 부족한 것이 있었구나!”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경험이나, 상식이나, 이치를 앞세워 모든 것을 속단하면서 자신을 속박합니다.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아버립니다. 마음에안 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정신적, 신앙적불구자로 만드는 괴질이요, 불치병입니다. 생각을 고치는 사람이 그 생각을 고친다는 것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 힘과 새 길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자기를 버릴 줄 아는 사람, 자기의 감정과 생각의 지배를 거부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회도 오고, 성장도 성취도 있는 것 아닙니까? 신앙도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자기 마음에 끌려 다닐 것입니까? 우리 모두 10년, 20년 꼭 같은 자기 속에서 안정과 평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발전적인 변화마저 가로막는 것이 아닐까요?
“아 나는 고정관념, 곧 내 생각이 옳다는 마음으로 나를 무능하게 만들었구나. 내 마음, 내 생각 때문에 알아야할 것을 알지 못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밉고, 싫은 것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는 깨달음이 깊은 물로 가 이를 악물고 힘을 다하여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을 보면서 군침을 삼키고,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얼른 주어 담는 것이 지혜롭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과가 천개 만개 깨어지는 한이 있어도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붙들고 씨름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어찌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남도 보지 못한다는 판단, 그리고 그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단 말입니까? 속단일 것입니다. 한편, “남들이 못하는 것인데, 내가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을 한다면, 그것 또한 성급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일에 한번 시도로 그치고 맙니다. 그래서 목숨은 살아있는데 마음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몸은 바쁜데 꿈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마침내 “죽음만이 모든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 생각에 머리를 끄덕입니다.
베드로, 배를 타고, 그물을 던지면서 살아온 평생, 이날 “말씀을 따라 하겠습니다” 나서는 자신 이것은 평생 상상도 못했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절망적이었는데, 일어서면서 소망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새사람인 자기, 예수님이 보시는 자기가 보였습니다. 그물을 들고 나서는 전에 없던 자기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서면,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새 사람을 찾고, 새사람이 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십시오!” 아닙니다. 깊은데서 그물을 치고 당겨야한다는 것을 모르는 어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어부가 어부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한 번 다시 하라!”“나와 함께 다시 해보자!”는 예수님의 초청으로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에 따라... 말씀을 믿고, 말씀에 의지해서...” 할 것이라고 나섰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를 자기를 볼 수 있게 될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다 주시려고 찾아와 만나주시는 그분, 그리고 기적적으로 공급하시는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베드로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를 찾아오셨던 주님,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 중에, 기도 중에, 찬송 중에, 섬기는 중에, 평범한 일상에, 이야기 속에, 자연 속에, 절기 속에, 바람 속에, 가난 속에. 질병 속에, 고난 속에, 슬픔 속에. 이웃 사람들을 통하여 찾아주십니다.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영혼의 눈을 뜨십시오. 정말 만선이었습니다. 두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지게 많이 잡았습니다.“축복,” “축복” “만사형통”을 외치면서 춤을 추었어야 할 장면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고기가 얼마나 잡혔느냐에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아마 깊은데 그물을 던져 한 마리 잡지 못했다 해도 흡족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배와 고기와 그물을 두고, 다 같이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취하고자 하고,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산다면, 대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취한다 해도 또 다른 좌절과 실망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마지막이다!”“더는 안 된다!”는 생각이듭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 앞에 자기를 내어놓으십시오. 말씀을 따라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십시오. 빈 그물 같은 인생, 텅 빈 인생, 허무한 세상이 변하여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왜 모든 것을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면서, 신앙만은 안 된다는 생각을 앞세웁니까? 하나님의 것은 모두 성경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해서 경험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밤새 수고한 것을 모르시고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겠습니까? 어부라면, 고기를 잡으려면, 물속을 깊은 곳, 얕은 곳, 갈퀴질 하듯 그물을 칠 것이라는 생각을 주님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고기 잡겠다는 사람이 어찌 얕은데 만 그물을 던지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물을 어디다 던지느냐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부칠 때, 길이 막힐 때 주님 안에 길이 있다는 소망을 주신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모르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주님은 아시기도 하고,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라고 주저앉아도, 주님 안에서는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승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는 물론 모든 무리들에게 실물 교육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잡은 것도 버리고,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었습니다.
이 베드로, 이렇게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따르고, 알고, 믿게 되면서 새삼 자신의 존재의식에 변화가 왔습니다. 순간 배도, 고기도, 그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연, 예수님 앞에 엎디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다.”-파스칼.
여러분, “내가 어떻단 말이냐?” 생각이 드십니까? 양심껏 자기를 드려다 보십시오. 당신의 거울에 비치는 당신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정말 그 앞에서, 그의 말씀과, 가르치심과, 사랑의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당신도 죄인입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워“나를 떠나소서!”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께 기도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죄가 생각날 것입니다. 그리고 차마 그 현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를 따라나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 또한 얼마나 주님과 함께 하고 싶었겠습니까? 늘 말씀을 듣고, 그를 닮고 그와 함께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요? 그것이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까? 좋은 것을 갖고 싶고,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면전에 선 베드로의 마음에 “당신을 배우고 싶습니다. 닮고 싶습니다!”생각이 당연히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모습은 꿈에도 예수님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거리가 있고,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 자애로우시고, 감당할 수 없이 크신 분이었습니다. 주님 옆에 선다는 것이 소원이면서도 그것은 있을 수도 없고 감당할 길도 없다는 자신의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바로 보면, 주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자기를 드려다 보면,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 모두 이런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바로 그 다음에 있습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좋으니라.”(눅 5:11).“선생님,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고기 잡히고, 안 잡히는 것 가지고, 인생을 허무하다 하고,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다. 내일이 확실치 않다고 이웃을 미워하고, 세상을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고, 하나님을 불평하거나, 신의 존재를 왈가왈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우선 고기를 잡으려 나서기 전,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고, 사람들의 고통, 사람들의 슬픔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물을 던지고, 비린내 나는 고기를 만지는 것 보다 시급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또 주님은 그를 물고기를 잡던 사람에서 주님을 위해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헌신하는 귀한 제자로 삼으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실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노라면 좌절과의 씨름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을 영접하고, 그 주님의 뜻을 따라 매일매일 그와 동행하십시오. 더욱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 안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구차하고 역겨운 생활을 계속해야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흔히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가져 보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의욕상실이나, 절망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외 없이 누구나 당할 수 있고,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빠질 수 있습니다. 두려운 것은 이런 경우 우리는 우발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국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자마이카에서 미국으로 들어온 퍼거슨, 삼십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 좋다는 미국에 살지만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는 자기를 채찍질 하면서 참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견디면 견딜수록,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힘들수록 세상이 자기에게 무관심한 것이 싫어지고, 결국 세상은 자기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생김새 때문에 차별당하면서 하루같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 해 12월 7일, 저녁나절 그는 백여 발의 실탄과 자동권총을 준비하고 뉴욕에서 힉스빌 롱아일랜드를 왕래하는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한 번 일을 내 보려는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앉아 있는 동안, 그는 그 끔직스런 살인계획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 “끝이다!” “절망이다” “더 이상은 못 견딘다”는 마음속의 발버둥과 아우성을 극복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더 참아서 뭘 하겠단 말이냐?” “나는 틀렸다!” “나 밖에 누가 나를 안단 말인가!” “다 죽이고 죽자!” 갑자기 일어나 전혀 무방비 상태인 승객들을 향해서 무차별 난사를 합니다. 죽을 각오로 닥치는 대로 쏴댄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매일 실패, 의욕상실, 낙심, 고통의 소용돌이 와 짝하여 사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을 피해서 사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한 다윗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장군이요, 용사요, 시인이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됩니다.”(시 42:5) 호소합니다.
한때 그는 얼마나 힘들고, 의지가 없고, 절망적이었든지;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 때처럼 절망적인 경우가 있을까요?
선지자중의 선지자라 할 수 있는 엘리아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사와 이적으로 함께 하셨던 그 사람, 그도 한 때 절망과, 좌절 중에; “아, 하나님, 더는 싫습니다. 내 목숨을 지금 거두어 가소서” 울부짖은 때 (왕상 17-19장)가 있었습니다.
어부 시몬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직업이 어부 입니다. 그렇다면, “하루 이틀 허탕치고, 빈손으로 집에 가는 것이 예사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지만. 빈손으로 들어가는 날이 잦아지면서, “아, 이 운명, 어부라는 운명의 굴레를 어쩐단 말인가!”“저 무정하고, 잔인한 물속, 나는 어째서 하루같이 이 지긋지긋한 그물질을 거듭하면서 허우적대는가! 마음속으로 몸부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그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좌절, 실의에 찬 사람에게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새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하지만 그는 그물을 씻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잠시 후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배를 좀 빌리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예수님, 어떤 수모라도 감수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 사람, 어부 베드로에게 다가섰을 것입니다. 아마는 그곳 호수까지 오신 것도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초면이 아닌 베드로를 심중에 두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훗날 베드로, “아, 주님, 그날 그때 그가 내게 오시어 절망, 좌절, 실의의 고통으로 몸부림하던 나를 만나주시려고, 일으켜 세우시려고, 나의 주님이 되어주시려고, 나의 능력과 소망과 영생이 되어주시려고 그곳 그 자리에 찾아오셨다”고 거듭 간증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읽고 그를 보고, 우리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두 사람, 그저 몇 마디 말 주고받는 것으로 그칩니다. 불쑥“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 “밤새껏 수고했지만 한 마리 못 잡았지만, 말씀을 따라 그리 하겠습니다!”
베드로 맘속으로 순간 “어부를 너무 모르신다! (나를 너무 모르신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성경말씀이, 주님의 가르치심이 가끔 나의 현실과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듯이 말입니다. 베드로,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 두 배에 가득하게 잡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배를 대자마자 그는 예수님 앞으로 가 엎드립니다. 그리고“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어 베드로와 일행은 배는 물론 잡은 고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마다 속의 이야기가 많듯이 실의에 찬 베드로의 이야기로 볼 것인지, 그를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볼 것인지, 현장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을 이야기 할 것인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이야기할 것인지 사람마다, 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봅시다.
밤새껏 수고(toiled) 한 시몬 그는 이미 몸과 맘이 기진맥진한 사람입니다.“얻은 것이 없지만...”이라는 말은 수천, 수만 근의 말속의 말의 무게가 있는 말입니다. “한 번 다시 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한 번 더 해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빈 그물을 당기고 허탈해하는 자기노출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목숨 줄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그 사람. 물이 두렵고, 무정스러워 그것을 생각하기도 싫다는 생각일 터인데 말입니다.
왜, 그렇게 일이 안되면, 사람들이 밉습니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싫어져야 할 것인데 남이 싫어집니다. “내 생각이 틀렸구나!”“내가 모르는 것, 내가 부족한 것이 있었구나!”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경험이나, 상식이나, 이치를 앞세워 모든 것을 속단하면서 자신을 속박합니다.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아버립니다. 마음에안 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정신적, 신앙적불구자로 만드는 괴질이요, 불치병입니다. 생각을 고치는 사람이 그 생각을 고친다는 것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 힘과 새 길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자기를 버릴 줄 아는 사람, 자기의 감정과 생각의 지배를 거부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회도 오고, 성장도 성취도 있는 것 아닙니까? 신앙도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자기 마음에 끌려 다닐 것입니까? 우리 모두 10년, 20년 꼭 같은 자기 속에서 안정과 평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발전적인 변화마저 가로막는 것이 아닐까요?
“아 나는 고정관념, 곧 내 생각이 옳다는 마음으로 나를 무능하게 만들었구나. 내 마음, 내 생각 때문에 알아야할 것을 알지 못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밉고, 싫은 것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는 깨달음이 깊은 물로 가 이를 악물고 힘을 다하여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을 보면서 군침을 삼키고,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얼른 주어 담는 것이 지혜롭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과가 천개 만개 깨어지는 한이 있어도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붙들고 씨름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어찌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남도 보지 못한다는 판단, 그리고 그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단 말입니까? 속단일 것입니다. 한편, “남들이 못하는 것인데, 내가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을 한다면, 그것 또한 성급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일에 한번 시도로 그치고 맙니다. 그래서 목숨은 살아있는데 마음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몸은 바쁜데 꿈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마침내 “죽음만이 모든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 생각에 머리를 끄덕입니다.
베드로, 배를 타고, 그물을 던지면서 살아온 평생, 이날 “말씀을 따라 하겠습니다” 나서는 자신 이것은 평생 상상도 못했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절망적이었는데, 일어서면서 소망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새사람인 자기, 예수님이 보시는 자기가 보였습니다. 그물을 들고 나서는 전에 없던 자기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서면,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새 사람을 찾고, 새사람이 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십시오!” 아닙니다. 깊은데서 그물을 치고 당겨야한다는 것을 모르는 어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어부가 어부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한 번 다시 하라!”“나와 함께 다시 해보자!”는 예수님의 초청으로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에 따라... 말씀을 믿고, 말씀에 의지해서...” 할 것이라고 나섰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를 자기를 볼 수 있게 될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다 주시려고 찾아와 만나주시는 그분, 그리고 기적적으로 공급하시는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베드로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를 찾아오셨던 주님,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 중에, 기도 중에, 찬송 중에, 섬기는 중에, 평범한 일상에, 이야기 속에, 자연 속에, 절기 속에, 바람 속에, 가난 속에. 질병 속에, 고난 속에, 슬픔 속에. 이웃 사람들을 통하여 찾아주십니다.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영혼의 눈을 뜨십시오. 정말 만선이었습니다. 두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지게 많이 잡았습니다.“축복,” “축복” “만사형통”을 외치면서 춤을 추었어야 할 장면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고기가 얼마나 잡혔느냐에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아마 깊은데 그물을 던져 한 마리 잡지 못했다 해도 흡족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배와 고기와 그물을 두고, 다 같이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취하고자 하고,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산다면, 대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취한다 해도 또 다른 좌절과 실망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마지막이다!”“더는 안 된다!”는 생각이듭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 앞에 자기를 내어놓으십시오. 말씀을 따라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십시오. 빈 그물 같은 인생, 텅 빈 인생, 허무한 세상이 변하여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왜 모든 것을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면서, 신앙만은 안 된다는 생각을 앞세웁니까? 하나님의 것은 모두 성경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해서 경험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밤새 수고한 것을 모르시고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겠습니까? 어부라면, 고기를 잡으려면, 물속을 깊은 곳, 얕은 곳, 갈퀴질 하듯 그물을 칠 것이라는 생각을 주님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고기 잡겠다는 사람이 어찌 얕은데 만 그물을 던지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물을 어디다 던지느냐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부칠 때, 길이 막힐 때 주님 안에 길이 있다는 소망을 주신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모르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주님은 아시기도 하고,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라고 주저앉아도, 주님 안에서는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승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는 물론 모든 무리들에게 실물 교육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잡은 것도 버리고,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었습니다.
이 베드로, 이렇게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따르고, 알고, 믿게 되면서 새삼 자신의 존재의식에 변화가 왔습니다. 순간 배도, 고기도, 그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연, 예수님 앞에 엎디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다.”-파스칼.
여러분, “내가 어떻단 말이냐?” 생각이 드십니까? 양심껏 자기를 드려다 보십시오. 당신의 거울에 비치는 당신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정말 그 앞에서, 그의 말씀과, 가르치심과, 사랑의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당신도 죄인입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워“나를 떠나소서!”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께 기도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죄가 생각날 것입니다. 그리고 차마 그 현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를 따라나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 또한 얼마나 주님과 함께 하고 싶었겠습니까? 늘 말씀을 듣고, 그를 닮고 그와 함께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요? 그것이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까? 좋은 것을 갖고 싶고,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면전에 선 베드로의 마음에 “당신을 배우고 싶습니다. 닮고 싶습니다!”생각이 당연히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모습은 꿈에도 예수님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거리가 있고,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 자애로우시고, 감당할 수 없이 크신 분이었습니다. 주님 옆에 선다는 것이 소원이면서도 그것은 있을 수도 없고 감당할 길도 없다는 자신의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바로 보면, 주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자기를 드려다 보면,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 모두 이런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바로 그 다음에 있습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좋으니라.”(눅 5:11).“선생님,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고기 잡히고, 안 잡히는 것 가지고, 인생을 허무하다 하고,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다. 내일이 확실치 않다고 이웃을 미워하고, 세상을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고, 하나님을 불평하거나, 신의 존재를 왈가왈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우선 고기를 잡으려 나서기 전,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고, 사람들의 고통, 사람들의 슬픔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물을 던지고, 비린내 나는 고기를 만지는 것 보다 시급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또 주님은 그를 물고기를 잡던 사람에서 주님을 위해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헌신하는 귀한 제자로 삼으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실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노라면 좌절과의 씨름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을 영접하고, 그 주님의 뜻을 따라 매일매일 그와 동행하십시오. 더욱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 안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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