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와같이 하라 눅10:30-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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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점은 의무 이상을 수행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에게 어떤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는데 그들 역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태도와 행동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마리아인의 모범을 따르기를 원하시며 이 이야기 내용 중에 등장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을 통해서도 교훈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본문 내용 속에서 세 부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이 세 부류 중 어느 하나에 속합니다.
첫 번째는 도둑들과 강도들이요, 두 번째 부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며 세 번째 부류는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각자 자기 진단을 해 보고 나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설교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책망하시고 나의 흠집을 꼬집어 속을 뒤집어 놓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점을 개선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려는 사랑의 배려에서 주시는 말씀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신자는 복 있는 분들인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복된 눈으로 설교자에게 주목하시고 복된 귀로 들으셔서 복된 심령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도둑과 강도들에 대하여 생각 해 봅시다.
이 사람들은 남을 짓밟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짐승에 가까운 본능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정신 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심성을 이드(id)와 에고(ego) 슈퍼 에고(super ego)로 분류했습니다. 곧 본능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 자아를 초연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도둑들과 강도들은 적어도 인간 이하의 동물적 생존본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누가 상처를 받든, 해를 당하건 혹은 죽임을 당하던 상관없이 오직 자기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짓밟고, 해치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강도들은 자기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피해당한 사람에게도 아내가 있으며,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이 있으며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남을 깔아뭉개고, 심지어 자기 합리화를 위하여 악담까지도 서슴치 않습니다. 남의 자존심과 양심 따위는 아량 곳 하지 않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무조건 남을 욕하고 헐뜯고 생각 없이 말해서 남의 속을 쓰리고 아프게 해 놓고도 구수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무자비한 사람들이 바로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소름이 끼칩니까?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엄연한 현실이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중에도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마음속에 흘러 들어옴으로 이러한 잘못된 태도가 말끔히 씻어지도록 우리가 더욱 기도합시다. 며칠 전 일생동안 뼈 빠지게 일하고 받은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몽땅 털려 버린 분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고 탄식하는 호소를 들었습니다. 그 분의 푸념을 들으며 나도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오늘날만 있었던 것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나쁜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빼앗고 싶은 욕심이 났습니다. 결국 사악한 아내 이세벨의 음모로 나봇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왕상 21:1-16) 백성의 생명을 지켜주어야 할 왕이 도리어 강도가 되어 선량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아합은 결국 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죽은 나봇이 살아날 순 없었습니다. 남을 짓밟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때문에 속상해 하고, 피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분들도 전후 사정과 내용은 살펴보지도 않고 선뜻 선뜻 한마디씩 하면 그들을 잘 되라고 기도하는 목사까지도 속이 상하고 숨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자기들 잘 되라고, 편리하라고 이 사람 저사람 찾아가 사정하고 일이 되게 하려고 죽을 애를 쓴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생각대로 몇몇이 모여 수근수근 한 내용이 진짜 인 것처럼 말해 버리면 그 소리를 듣는 목회자의 심정이 어떠할까 생각 좀 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과 세치 밖에 안 되는 혀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이런 말은 하는 것은 앞으로 그런 실수를 말고 사랑으로 뭉쳐진 교회다운 교회가 되자는 충심에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도 시험에 들지 않고, 남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깨워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유 불문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영성이 약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어 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 제사장과 레위인을 생각 해 봅시다.
이들은 남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 무척 부드럽고 신사적이어서 매우 점잔해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에게서 그런 모습만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 사이에도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무관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한 일에 트집만 잡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보다는 무관심한 사람이 더 나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 고통을 주거나 해를 끼친 일 없고, 남의 슬픔이나 죽음에 대해 책임질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평을 하셨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여리고 노상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외친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니 피를 토해 내며 죽어가는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강도들처럼 남을 때리거나 남의 것을 빼앗진 않았지만 반면 도움의 손을 내 주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예배에는 잘 참석하고, 교회에서 봉사생활은 잘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이웃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지 못한다면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내놓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시고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감동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을 맡아 수고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생활만으로는 예수님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뭐라고 평해도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요양원과 어린이집, 아동센터는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이웃 사랑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핑계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지난번 기아대책에서 내 준 사랑의 동전 저금통이 50개 수집된 것을 보고 저는 우리 교회도 어쩔 수 없이 목포 평균 수준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인 같은 대답을 하지 맙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시치미도 떼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내가 어찌 압니까? 무지가 상책이라고 대답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들어왔던 초창기 우리나라 형편을 생각 해 보세요. 미래의 꿈이 없었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자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고 축복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희망을 잃지 말고 작은 손이 나마 이웃에게 내밉시다. 더 큰 희망을 가집시다.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이웃에게 무관심하지 맙시다. 서로를 배려합시다.
3. 사람을 살린 사마리아 사람
성경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름이나 강도만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속에는 바로 우리 자신이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언제 어느 때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짓밟는 사람들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모세는 백성을 살리는 기도를 했습니다.(출32:31-32) 신약에서도 바울은 “형제를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3) 했습니다. 에스더도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남을 짓밟는 사람들”이 꾸민 음모를 저지하려고 몸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죽었습니까? 왕에게 더 큰 총애를 받았고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이 바로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 죄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6)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8)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편안히 사시면서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지옥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도 편안한 마음이 드는 크리스챤은 그 속에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도 위험하고, 또 자기 부비도 모자랐지만 죽어가는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피를 닦아주고, 아픈 곳을 싸매 주고, 자신은 걷고 환자는 말에 태워 주막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을 살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델형 인간입니다. 우리도 병들고 지치고 고달픈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육신만 치료받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영혼까지 치료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합시다. 여러분, 나는 지금 어떤 인간형에 머무르고 있는지 진단해 봅시다. 기왕이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지부식 간에 죄짓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합시다. 나 때문에 남이 기뻐지고 행복해 지고, 복 받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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