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향한 입성(入城)” 마21: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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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근본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벳바게에 이르러 두 제자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말뚝에 매어 있을 것이니 무조건 그것을 내게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 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려고 하신 것은 자신이 피곤했다거나 위인행세를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 이사야서 62:11절에 예언된 말씀대로 응하기 위한 절차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곧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심을 증명해 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빌2:6-8절)
잡신이 들린 무당들이나 술객들이 혹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어찌 예수님께서 창조주가 아니시라면 들에 매여 있는 나귀의 진짜 주인이 자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 나귀를 키우는 주인이 어찌 이유 없이 예수님의 지시대로 순순히 내어주겠습니까? 또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결정하시면 모든 것을 그 분의 뜻대로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690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나 성경에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스갸라서 9:9절에도 이미 이 사건을 예언했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 우리의 구원을 베풀어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하신 말씀을 의도적으로 성취하시기 위하여 어린나귀를 어울리지 않게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능력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당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죄 값 대신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대적을 무찌른 용기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사랑으로 포기하셨기에 더욱 위대한 용기요, 사랑의 극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다의 바람을 잔잔케 하여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임을 이미 마8장에서 증거 해 보여주셨습니다.(23-27절) 여기서는 동물의 세계까지도 지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고전15:4-5절(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 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말씀같이 성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시어 성경에 예언하신대로 다시 사셨고, 죽으신 후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의 예언대로 부활승천 하셨으며 이제 성경의 예언대로 영광의 주, 심판의 주로서 다시 오실 것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곧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본체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렇게도 대망(待望)하던 구세주요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얼마나 낮아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는 어떤 나귀였습니까? 안장도 없고 길들여지지도 아니한,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막11:2절) 어린 나귀새끼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자기 옷을 깔아 안장을 만들어드렸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나귀는 힘이 부쳐 뒤뚱뒤뚱 걸었을 것이고 그때마다 나귀 등에서 떨어지려고 했을 것입니다. 나귀는 키도 작아 예수님의 발이 땅에 끌렸을 것입니다. 얼마나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웠겠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준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가셨어야 합니다. 그 즈음 예루살렘에서는 날로 많은 인파가 따르고 인기가 천정부지로 높아져 가고 있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가진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그러한 죽음의 블랙 홀(Blak Hall) 같은 예루살렘으로 뚜벅뚜벅 나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예수님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셨는가를 보여주는 겸손과 그러면서도 의연한 용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 자신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심을 인류 역사의 무대 중앙에 세우시고 모든 사람의 눈총을 집중시키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 속죄양이 되겠다는 비장한 결단의 모습이었음을 실감(實感)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그 비장한 결단의 모습 앞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 사순절에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신앙의 자세를 고쳐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때 군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무리의 대다수가 그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깔고 “무리가 소리 높여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라는 히브리어, 시118:25)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8절)하며 환영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곧 12절 이하에 보면 성전을 깨끗이 하시며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엄히 꾸짖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이 외치고 자신들의 정치적 소망을 이루어 주실 세속사회의 군주가 아닌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이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것을 확신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복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메시야이셨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눈을 뜨고 보면 예수님의 용기와 그의 가르침과 사랑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왕궁에만 모시지 맙시다. 곧 우리의 마음속에 삶의 주인으로 모셔 그의 사랑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요(엡2:9) 예수님 닮은 삶을 사는 것을 자랑합시다.
3. 군중을 보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 같았으면 우쭐했을 것입니다. 군중들의 환호는 대단했습니다. 제자들도 3년간 따라다닌 보람을 느끼며 흐뭇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내일 모래면 (금요일)강도 바나바는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사람들인 것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들은 세속적 나라의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자 예수님을 사형수로 몰아붙여 처형을 선동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산산히 흩어져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저하지도, 물러서지도, 후퇴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서 일점의 착오도 없이 묵묵히 성경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그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그렇게 행진했습니다. 오늘도 그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 한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설정한 세속적 기독교, 내가 생각하고 요구하는 세속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 것 같으면 예수님을 원망하고 금방 돌아서 버립니다. 이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이 아닌 가 부끄럽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나귀만큼이라도 순종하는 크리스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귀는 힘들어도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묵묵히 걸어갔기에 예수님이 받으시는 환호를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이 예수님을 태우고 가기보다 타고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횡재 해보고, 예수님을 통해 편해보고, 대우받고, 우쭐해보고 싶어 합니다. 이 사순절을 통해 다시 한 번 진정한 크리스챤의 모습을 정립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찬양하되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찬양해야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므로 부활의 영광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죽으므로 남을 살리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활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지므로 더욱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주므로 20, 60, 100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세속적인 왕으로 모시지 말고 진정한 평화의 왕,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시여 그 분의 통치하심을 받아 하늘나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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