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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합시다(요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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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2,669회 작성일 10-10-0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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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교회당이 이곳에 세워진지 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80년 10월5일 비탈진 언덕 아래 쓰레기 더미위에 서서 고 박홍근 장로님과 김화자 권사님 그리고 나 셋이서 초라하게 개척예배를 드렸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40이었는데 칠순 노 청년이 되어버렸습니다. 프레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tzche)의 말이 생각납니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 갈 수 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공부할 때 너무도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니체의 이 말을 되 내이며 꿈을 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교통편이나 경제면, 교단 배경 등 여러 가지가 몹시도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그렇지만 팔뚝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일해 왔었습니다. 한참은 기도의 열기도 뜨거웠고, 교세 확장에도 최선을 다했기에 은혜와 사랑의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지칠 줄 몰랐습니다. 목포에서 뜨는 교회, 신바람 나는 교회라고 소문이 자자했고 목사님들은 나에게 혼자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농담반 진담반 제동을 걸기도 했습니다. 완도에 기도원을 건축했다가 청계로 옮겨 수양관을 마련했고 지금은 요양원과 어린이집 아동센터까지 선교기관을 모두 구비하여 더 부흥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꿈이 크면 문제도 많습니다.

“풍파는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니체의 말처럼 여기까지 오는데 어찌 작고 큰 풍파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른들 말씀에 “산 넘어 산”이란 속담이 있듯이 살다보니까 지금가지 겪어온 풍파는 아무것도 아니요 배가 커진 만큼 바다의 저항은 더 억세진 것을 실감합니다. 오직 교회와 교인들을 위하여 나름대로 죽어라고 밤새는 줄 모르고 일하여 많은 선교 기관을 세워 놓았더니 그것이 오히려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을 잡는 구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목사가 요양원과 어린이집, 아동센터에서 월급을 받아 신세가 늘어졌다는 둥, 사업하는 목사라는 둥, 정치목사 또 우리 교회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라는 둥 별의별 소문이 난무하여 교회에서 밖으로 퍼져 나가니 전도가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부탁입니다. 이제 나도 더 이상 이런 설교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 그렇게 잘못하거나 불량한 사람 아니니까 여러분도 헛소문을 내지 맙시다. 여러분을 쉬시라고 내 사비로 당회의 허락 하에 집을 지은 것이니 하찮은 땅 문제로 저의 진심을 매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그 보다 훨씬 큰 혜택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런 기관들이 잘못 될까보아 노심초사하며 이 구석 저 구석 살피느라고 제 돈을 모두 털어 써가면서까지 애를 쓰는데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따라주어야 할 사람들까지 이제는 점점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것 같아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불가 몇 사람이 그런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그 몇 사람 때문에 이제는 용기도, 의욕도 상실 되어 버려서 기운이 빠질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고 교인들을 사랑하는 초심만은 변함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앞으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용해동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나의 인생 전부를 내놓고 일한 곳이요, 땀과 피와 눈물을 쏟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택하여 이곳에 파송했고 내가 쓰려지려고 할 때마다 큰 손으로 붙들어주신 은혜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해 호는 이제 두둥실 이 풍파 많은 세상을 이기고 전진해야 합니다. 꿈이 큰 만큼 풍파도 더 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풍파도 전진하는 자에게는 벗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가기만 하면 어떠한 노도풍랑도 잔잔해 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마8:26절)


2. 다시 시작합시다.

미국 남북 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밖에서 보초 서던 병사 하나가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때 최전선을 시찰하던 링컨 대통령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곯아떨어진 병사의 총을 들고 대신 보초를 섰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병은 이 사실을 깨닫고 기겁을 하여 어찌 할 줄 몰랐습니다. 그때 링컨 대통령은 그 병사에게 총을 건네주며 “자네는 오늘의 과오로 이미 죽은 사람이야, 이때부터 자네의 이름은 자네 것이 아니니 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하네” 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해 주는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선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으로 용감하게 돌진하는 한 병사가 부대원 전체에게 사기를 충천하게 하여 그 전쟁을 승리하게 했답니다. 바로 그 병사는 부상을 당하여 신음하면서 “대통령 각하에게 나는 약속을 지켰노라고 꼭 전해 달라”고 울먹였답니다. 그 무명의 병사는 링컨 대통령을 만난 후 다시 시작하는 삶을 살다가 장렬히 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대통령을 만나서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계급이 승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죽을 자리에서 대통령을 만난 후 정신이 달라졌고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생의 목표와 삶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이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영생을 얻었습니다.(엡2:3-4절) 사람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습니다.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 문제 삼지 마십시오. 이미 흘러가버린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 가 버린 과거는 흘러가 버리도록 내버려 둡시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힘이 들고 지치고 고단하면 쉬었다가 갈망정 제발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마28:20)


3. 예수님은 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음행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들이 예수님 앞에 끌고 와 모세의 율법에는(레20:10, 신22:22절 이하) 돌로 치라 하였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 가를 따진 내용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물은 것은 예수님을 고발 할 구실을 얻어 내려는 나쁜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모습이 초라해지니 자기들의 위신을 세위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제거 해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트집거리를 잡아낼 수 없어서 율법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면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요, “용서 해 주라”고 한다면 분명히 율법을 어기는 범법자가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트집거리요, 저렇게 말해도 트집거리가 되어 예수님은 꼼짝없이 그들의 그물에 걸려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참으로 긴장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땅에 앉아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6절) 그런 다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 하신 후 다시 몸을 굽혀 또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여러분,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성경에 그때 무슨 글을 쓰셨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로 여인을 치려고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들까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가버렸다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쓰신 글씨 속에 그들의 양심이 가책 받을 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음을 미루어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들의 죄목과 그 창녀인 여인과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오물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보고 욕하듯”우리는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대개 남의 흉 잘 보는 사람이 자기 흉거리가 더 많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누가 누구를 욕하고, 누가 누구를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돌멩이를 내 던지고 슬금슬금 다 도망하고 난 빈자리에 예수님과 가련한 창녀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걸레처럼 찢긴 옷자락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 그 말씀 속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도 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지난날의 허물도, 죄악도, 실수도, 실패도 다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지금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력히 암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절기 가운데는 희년(요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번 50년이 되는 해마다 노예도 해방시켜주고, 빚도 탕감해 주며 삶과 역사를 다시 하는 희망의 해인 것입니다. 희년은 삶과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하신 것처럼 인생과 역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교회는 오늘이 30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만 희년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재출발해 봅시다. 무에서도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은 용해호가 두둥실 떴는데 재도전하려고 결심만하면 앞으로 몇 년 안 가서 예수님이 기뻐하셨던 만큼 더 교회다운 교회로 성장하여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 내고 등경위에 켜진 등불처럼 진리의 밝을 빛을 온 누리에 비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어떤 탓도, 자질구레한 이야기도 모두 시원하게 던져버립시다. 우리 교회 창립 30주년, 지금이 다시 시작할 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흘러간 과거에 연연하지 맙시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강을 이룹니다. 서로 힘을 보탭시다. 사랑하며 격려하고 밀어줍시다. 좋은 생각만하고 좋은 말만 합시다. 누가? 어떤 사람? 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빌4:13) 인간에게는 세 개의 회색 그림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공허와 죄의 고민과 공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아픔과 고통이 있다면 반대로 상상 할 수 없는 축복도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헤아릴 수 없는 반대의 패배에 직면해도 그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결심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만 캐려는 사람은 하늘의 별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이룬 것을 발판 삼아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복음 가득한 용해 호를 타고 이제 힘차게 노를 저읍시다. 우리 용해 호에는 예수님이 승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장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훌륭한 선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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