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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희망하라 창37: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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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2,447회 작성일 11-06-2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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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제가 설교 제목을 “꿈 넘어 꿈을 꾸자”한 내용으로 요셉의 생애에 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를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요셉은 열두 형제 중에서 열한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어머니가 네 명이었으니 위로 열 명은 세 명의 어머니가 출산한 모두 배 다른 형제였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착하여 아버지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형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살았겠습니까? 아버지가 사랑하면 한 만큼 반대로 형들은 요셉을 더 미워하고 따돌림 받았을 것은 뻔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내 것 주고 코 밴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래서 몸과 물질 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 주면서 희생하고 봉사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예수쟁이가 뭐 저래”하고 욕밖에 없을 때 여러분, 속이 저리게 아플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기뻐하고 더 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절)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자라면서도 어려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 같았으면 자신의 처지를 수없이 비관했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얻어맞을 때마다 분노가 복수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했으면 아무리 배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한 아버지의 아들인데 고의적으로 그 무더운 사막에서 물 없는 우물에 빠뜨려 죽여 버리려고 했겠습니까? 당시 노예는 짐승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종래는 요셉을 헐값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렸겠습니까? 미움은 이처럼 잔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 없는 깊은 웅덩이에 던져져 죽어가던 요셉, 노예 상인들의 낙타 꽁무니에 매달려 질질 갔을 요셉의 절망적인 모습을 생각 해 보셨습니까? 

저물어 가는 황혼녘에 형들에게 살려 달라고 구슬프게 외쳐 댔을 요셉의 울부짖음이 여러분들의 마음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그렇게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인생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습니다. 17세가 되도록 집안에서 잔 심부름이나 하며 자랐을 요셉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 짐승보다 더 가혹하게 혹사당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도 요셉은 주인의 집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곡식 한 톨도 자기 것처럼 아꼈습니다. 아무리 고달파도 자기 일처럼 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이 목석 같은 주인을 감동시켰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가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충성하는 진실한 마음이었습니다. 진실은 하늘과도 통하는 법입니다. 그러한 요셉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 요셉의 범사가 형통했습니다.(창39:3절)  주인이 요셉을 인정하여 가정 총무를 삼고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기 까지 요셉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마귀는 그러한 요셉을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훤칠하고 빼어난 용모를 탐낸 보디발의 부인이 유혹하여 동침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때 요셉은 자기를 신뢰해 주는 주인을 배반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하고 뛰쳐나왔더니 오히려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이 못된 짓을 하려 했다고 대신 죄를 뒤집어 쓰여 한 번 들어가면 영영 나올지도 모를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요셉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 해 보았습니다. 일반 드라마 같으면 여기서 요셉의 운명은 종을 쳤을 것이며, 서글픈 여운을 남긴 채 연속극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우리를 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때 인생의 연속극은 반전(反轉:Rolling back)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해몽하는 지혜를 주셔서 애굽의 왕을 놀라게 했고 일약 대제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복지정책으로 7년 가뭄에서 국가의 위기를 모면케 하고 고국 이스라엘까지 살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일익을 담당한 주인공으로 높이 세워 주셨습니다. 그때 요셉은 식량을 구입하려 와 자기 앞에서 사정하는 형들을 미워하기는커녕 너무도 반갑고 감격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에게는 왜 그런 미움이 없었을까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요셉에게는 꿈 넘어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창37:7절) 곡식의 열한 단이 그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해와 달까지 절했습니다.(9절) 요셉은 그 꿈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반드시 그 꿈은 성취되고 만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할 틈이 없었습니다. 형들을 미워하며, 보디발의 부인을 원망하면서 꿈을 향한 행진을 멈출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을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 꿈이 성취된 고지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항상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기쁘게 살았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열심히 봉사 헌신 했습니다. 이것이 꿈 넘어 꿈을 꾸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요셉이 꿈 넘어 꿈을 가졌기에 마귀는 그 만큼 기를 쓰고 요셉의 꿈을 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꿈 넘어 꿈을 포기하지 않은 요셉을 세상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파노라마 같은 그러한 기구한 운명의 풍파 속에서 어떻게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짐승보다 못한 노예가, 언제 세상 밖으로 나갈지 모르는 지옥 같은 감옥 속에서도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하게 된다는 꿈을 꾸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뜬 구름 같고 헛웃음이 나올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요셉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환경과 능력으로는 성취 될 가망이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점점 더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꿈 넘어 꿈을 꿉시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누구는 못합니까? 내 힘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시고 그 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또 바울사도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고백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을 때 살아났을 뿐 아니라 사단의 도시 느니웨를 회개시켜 구원 해 냈던 것입니다. 요셉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여러분들도 눈동자같이 사랑합니다. 요셉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꿈 넘어 꿈을 꿉시다. 그 꿈을 결단코 포기하기 맙시다. 이 세상을 넘어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무슨 일이 무섭습니까?  꿈이 크면 클수록 저항도 크기 마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싸워 보고 싶은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물 없는 구덩이 속에서도, 노예로 끌려가면서도, 감옥 속에서도 결코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꿈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작건 크건 그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믿고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면 놀라운 세계를 바라보시게 될 것입니다. 백두산을 올라가는데 아슬아슬 했습니다. 공연히 온 것 같다.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면 큰일이다 하고 조마조마 했지만 올라가는 차에 몸을 담고 견디었더니 참으로 황홀한 천지를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동모산이 가까운 돈화나 일제 항일 투쟁의 본 고장인 용정, 도문, 간도 등을 지나면서 또 두만강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가슴도 아팠지만 통일 조국의 내일을 꿈도 꾸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선한 꿈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꿈을 꾸십시다. 꿈을 포기하지 맙시다.


2. 항상 희망을 희망합시다.

마음에 절망을 품으면 우리의 삶은 온통 절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쓴 뿌리(히12:15절)는 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내면에서 자라는 쓴 뿌리는 어느 시기가 되면 쓴 물이 나옵니다. 쓴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그대로 받아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더 큰 꿈을 꾸십시오.

더 좋은 희망을 희망하십시오. 그러면 쓴 뿌리가 자랄 여유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상처를 들추어내지 마십시오. 상처를 들추면 들출수록 자신만 더 상처를 받습니다. 원망과 절망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의 삶을 기대하십니다. 요셉처럼 항상 나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패배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릅니다. 요셉은 아직 17세의 소년이었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형들이 서로 이야기 하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했습니다. 그 꿈 때문에 모진 고생을 했지만 그 꿈 때문에 요셉은 성공했고 승리했습니다. 그 꿈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릅니다. 남의 눈에 띕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10명의 정탐꾼처럼 자기 자신을 메뚜기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사단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원망, 좌절, 두려움, 그리고 열등감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슈퍼맨 같은 완벽한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나는 좀 부족해도, 나에게는 힘이 벅차도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삶에 활용할 때 나는 슈퍼맨처럼 일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가면 패배감에 젖어 만사를 포기한 죄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패배와 절망감으로 이 세상에 메어 사는 죄수들이 되지 맙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게 된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은 탈출을 결심하고 어느 죄수 친구에게 망치를 구해 달라고 합니다. 그 죄수 친구는 “여기 오면 희망을 버려야 한다. 이 망치로 탈출하는데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20년 만에 손바닥만한 망치로 매일 굴을 파서 쇼생크 감옥을 탈출을 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만난 친구 또한 나이 들어 출옥을 하게 되는데 탈출한 주인공을 만나러 가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주인공이 참담한 감옥에서 안 죽고 탈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죽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던 남은 친구에게 또한 희망을 선물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희망을 희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스스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의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단점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의 물 없는 우물, 오늘의 노예모습, 오늘의 죄수의 모습을 보지 말고 요셉처럼 꿈 넘어 꿈을 꾸십시오. 희망을 희망하십시오.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말에는 엄청난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언가 입으로 말하면 말의 내용은 생명입니다. 잠언18: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혀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람은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삽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입을 배의 키에 비유했습니다. 배의 방향은 배의 키에 달려있듯 우리의 미래는 말에 달려 있습니다. 입술의 말이 변하면 미래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우리에게도 말의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또한 여러분이 기도한대로, 선포한대로 이루어집니다. 탁월하게 살려면 말부터 바꾸십시오. 말을 바꾸어야 인생이 바뀝니다. 말이 변하면 나 자신이 달라지고 미래가 결정됩니다. 중국을 오고 가는 비행기 의자에 “뇌파는 자유롭다”란 구호가 써 있었습니다. “뇌를 속여야 성공한다”는 글을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기쁜 말을 하고, 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하면 우리 신체속에 엄청난 항체인 토파민이 생산되어 나쁜 세균이 침범하지 못한답니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재산보다 축복의 말을 더 귀하게 생각한답니다. 창27장에 보면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야곱에게 먼저 한 축복을 다시 거둘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결국 에서의 축복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말고 축복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어느 장로님은 돼지를 기르는 축사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설교도 듣게 하고 복음 송을 들려주었더니 병들어 죽는 돼지가 없었다고 간증했습니다. 또 고기 맛도 더 좋았답니다. 음악은 돼지의 뇌파에도 영향을 미친 모양입니다. 이런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만 말에 힘과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희망에 희망을 가집시다.

뇌에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합니까? 안 된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생깁니까? 말로 뇌를 속이십시오. 병이 나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까? “나는 건강하다. 나는 할 수 있다. 병은 정복됐다”고 반복해서 말하십시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잠18:21)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막9:23절)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의 입으로 나온 말씀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넘어 저 천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무엇이 두렵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꿈 넘어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희망을 희망하시기 바랍니다. 결단코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살아온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까? 왜 포기 하시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힘을 내세요. 꿈 넘어 꿈을 꿉시다. 희망을 희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꿈으로 가득 찬 요셉이 형들에게 다가오자 그들은 “꿈을 꾸는 자가 오도다”라고 합창하듯 말했습니다. 세상도 여러분을 보고 그렇게 합창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꿈 넘어 꿈을 꾸자, 희망을 희망하자” 우리 함께 복창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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