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행2:"37-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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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절은 교회의 생일과 같은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람과 같고 불과 같은 성령의 나타남을 공동으로 체험하고 이 땅위에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초대 교인들의 생활이 요약되어 기록된 내용이며 성령 받은 열매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성령 강림은 그들을 죄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의 확실한 변화는 진심으로 죄 된 생활을 회개하고 예수 안에서의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죄에서 깨어난다는 말은 영적인 대 각성을 뜻합니다. 잠자는 상태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라는 상자 속에서 나와 넓은 세계와 추수할 밭을 보고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순간입니다. 18세기 미국에 소위 “대 각성(great Awakening)”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에 기독교가 국교처럼 왕성 해 질 뿐 아니라 19세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 수 천명의 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나갔고 세계 선교 운동이 벌어진 것도 이 “대 각성”의 여파였던 것입니다. 이“대 각성”은 지금부터 286년 전 1725년 뉴 저지주 뉴 브론즈윅 장로교 목사 길버트테넨트(gilbert Ternent)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테넨트 목사는 “뉘우침을 위하여”(for conviction) 라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교회당 안에는 회개의 기도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 각성 운동은 뉴 브론즈윅의 몇몇 교회로 퍼지고 뉴저지, 뉴욕, 펜실바니아로 번져 나갔습니다. 2년 후 메사츠 세츠주 노샘푸턴(Northampton)에서 후세에 미국 최고의 목사라고 불리우게 된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노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설교를 하였는데 교인들은 의자에 매달려 통곡하기 시작했으며 우는 소리에 설교가 서 너번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교인들은“우리가 지옥가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외쳤습니다. 매사추 세츠주의 대각성 운동에 이어 조지 화이트필드 목사님의 야외집회를 통한 각성 운동이 또 일어났습니다. 어느 집회는 산마루에서 열렸는데 하루에 5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의 이 대각성 운동은 1725년부터 1760년까지 35년간 계속되었고 미국 전역에 확산될 뿐 아니라 세계 선교에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영적인 대각성이 시작된 것은 물론 초대교회 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지 50일 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 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위대한 각성의 제1보가 본문 37절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 꼬 하거늘“ 하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마음에 찔려”라는 헬라어는 카타누스(ΚαΤανμσσω) “꿰뚫어 도려낸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철저하게 찢겨 드려내지는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뜻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charles spurgeon)는 자기가 거듭나게 된 것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 마음은 우거진 땅”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오셔서 이 굳은 땅을 갈아주셨습니다. 이 위대하신 농부는 내 마음 밭을 갈 때 열 마리의 검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용하신 보습은 몹시 날카로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보습으로 나의 마음 밭을 깊숙이 갈아엎었습니다. 열 마리의 말은 십계명이며 보습은 하나님의 의(義 )입니다. 내 심령이 깊숙이 쪼개 질 때 나는 저주 속에 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고, 가망이 없고, 길 잃은 고아이며 영원한 멸망 밖에 없다는 슬픔과 자책과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밭갈이 뒤에 씨뿌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이 내 마음 밭을 쪼개도록 깊숙이 갈아엎은 것은 내가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끼게 하려는 준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기쁨으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각성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이 간증이 우리 모두의 간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카타누소(καΤανύ σσω)“ 마음이 찔리고 쪼개져야 합니다. 마음 밭에 깊숙이 의의 보습이 들어가 굳은 흙을 한번 뒤집어야 합니다. 이것이 초대교인들이 받은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2.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생긴 놀라운 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생겼습니다.
본문 46-47절을 봉독 해 봅시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집에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역사가 누가는 성령 강림 후 초대교인들의 생활을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언제 체포되어 어떻게 죽게 될 지 모르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덜덜 떨고 있던 그들이 이제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에 모이고만 싶었습니다. 전에는 밥을 먹으면서도 불안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후에는 밀개떡을 먹어도 마음이 기뻤습니다. 배가 불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입만 벌리면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변해 버렸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변화되니 초대교회 교인들은 한마디로 “기쁨이 충만” 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처럼 변했습니까? 무엇이 이들을 그처럼 순수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이처럼 기쁨이 충만하게 하였습니까? 환경이 바뀌었습니까? 로마정부로부터 정치적인 해방이 왔습니까? 그들을 탄압하고 죽이려 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사라졌습니까? 풍년이 들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변화시켰습니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고 속 사람이 변하자 지옥 같았던 생활이 천국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변하니 세상이 온통 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니 바로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점이 우리 교인들의 특징입니다. 초대교회는 ①구원받은 기쁨이 가득 했기에 음식과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구원에서 기쁨으로, 기쁨에서 나눔으로, 나눔으로 사랑이 꽃피는 공식이(구원→기쁨→나눔→사랑) 성령 받은 사람의 생활입니다.
②구원받은 기쁨이 충만했을 때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기쁨은 알림으로, 알림은 전도(선교) 「구원→기쁨→알림→전도(선교)」의 공식이 성령 받은 사람의 방향전환입니다.
③구원받은 기쁨이 충만할 때 함께 모여 받은 바 구원을 축하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예배를 흔히 축하(celebration)라고 부릅니다.
구원→기쁨→예배(축하)→신앙공동체의 공식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교회생활입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본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인데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비판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할 여지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현대의 크리스챤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물 없는 강이 많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오늘날 크리스챤들도 물 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지하는 교회를 많이 본다”고 애석해 했습니다. 글렌드 헤리스 목사는 설교 집필가로 유명한 목사인데 자기 동네에서 저녁에 산책을 하면 우울해진다고 했습니다. 집집마다 밝은 창문을 통하여 거실이 들여다보이는데 거의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피곤한 얼굴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가정을 “권태의 전쟁터(Battle field of Boredom)” 기쁨도 생기도 잃고 지루함에서 벗어나려고 겨우 T V 에게 구원을 청하는 비참한 인간상을 본 것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자기의 설교를 듣고 있는 교인이라는 생각을 할 때 그는 실패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헤리스 목사의 또 하나의 경험담이 있습니다. 교회 앞에 비석이 있고 그 교회 출신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다섯 살 날 소녀가 물었습니다. “저 이름들은 뭐예요?” “서비스(service- 군복무를 뜻하며 동시에 예배의 뜻)에서 죽은 사람들이다” “어머나, 그럼 아홉시 예배(service)에 죽었어요? 열한시 예배에 죽었어요?” 그러한 질문을 받자 목사님의 마음이 뜨끔했고 찔렸답니다. 아이의 순진한 말이지만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기쁨 없는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배 시간에 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꾸중을 들어도 감사하고, 야단을 맞아도 사랑의 채찍으로 알고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은 모두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 했던 초대 교회 인들의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기쁨이 충만한 삶이었고 그것이 곧 사랑의 나눔과 전도와 예배(축하)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상의 평이 “새 술에 취한 자”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령 강림주일에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초대교인들이 보여준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더라”(47절) 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성령 받은 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좋은 인상을 끼치고, 존경받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의 수가 날마다 늘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닮은 말과 행동을 통하여 예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숨어있던 자들이 거리로 나오고, 입을 다물었던 자들이 입을 열고, 비겁했던 자들이 당당해졌고 예수를 용감히 증거 하게 된 것이 성령 받고 변화된 모습이었습니다. 불과 50일전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으라”고 외쳤던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 할꼬”하고 통회할 때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38-39절) 성령은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기쁨과 행복의 영이며, 치유와 해방의 영이고, 새 출발과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영이며, 평안과 평화의 영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그들에게 숨을 내 뿜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받으라”(요20:21-22)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도 여기에 오셔서 여러분에게 숨을 내 쉬며 “성령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마가의 다락방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령 충만 받아 초대교인들처럼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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