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사람” (요11:33-44절) > 주일오전예배

본문 바로가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사람” (요11:33-44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1,999회 작성일 11-10-08 11:41

본문

 

본문은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기적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급히 달려오시지 않고(요11:6) 요단가 동편 세례요한이 세례 베풀었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시다가 죽은 지 나흘 후에야(39절) 현장에 오셨습니다. 이제 오시면 어떡합니까?

사람들은 모두 이제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주님의 발을 닦았던 죽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도(요11:2)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32절하)하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녀의 울음이 얼마나 처절하고 슬프게 보였던지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35절)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죽음을 비통해 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그처럼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역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신 예수님은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가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무덤은 열어 무엇 하시렵니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주저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이미 심부름꾼에게 전해 준 말(4절)을 벌써 잊어버렸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과 해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주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옛날에 떡 한번 배부르게 먹어 본 일이 없던 어부가 어떤 부자에게 떡 대접을 받고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에이, 멍청한 놈, 그것도 몰랐느냐?”고 엉엉 울더랍니다. 알고 봤더니 10개째 먹다가 그때 배가 부르니까 처음에 그 떡을 집어먹었으면 배부를 것을 그것도 모르고 아홉 개를 공연히 먹어 치우게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 번째 먹을 떡만이 사람을 배부르게 한 것입니까? 앞에 아홉 개를 먹었기 때문에 배가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숟갈에 배부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먹다보면 배가 부를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 사람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빨리 빨리 입니다. 한번 두 번 교회 나와서 영원히 죽고 사는 진리를 금방 깨닫는다면 예수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매사에 열심은 내되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은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인내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성질 급하게 행동하다가 예수님에게 책망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만 보더라도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을 대 예수님께서 “칼로 된 자는 칼로 망하니 조심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기적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순종하는 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하루에 한 바퀴씩 돌다가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돌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갔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했더니 난공불락이던 그 여리고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고통당하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깨끗이 나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사에 인내하며 끝까지 견디어 내는 믿음이 있기를 진실로 축원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생각의 차이가 있듯이 하나님의 뜻과 우리 생각과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급한 땅엣 것만 생각하고 위엣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와 나의 생각은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차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부사이도, 친구 사이도 생각이 다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남을 나쁘다고 비판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주님도 누이들 못지않게 나사로의 죽음이 마음 아프셨지만 이미 결과를 알고 계셨기에 이틀을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려고 그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주님은 결코 나사로가 죽도록 모른 체 방관 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고통당할 때 결코 모른 체 하시지 않습니다. 지체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항상 더 큰 뜻이 배후에 있음을 믿으시고 잠잠히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당장에 끝장내려고 성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을 조용히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나타내주십니다.

본문 11:3절에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또 35절에 “유대인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나사로의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에 왜 이런 죽음의 고통과 슬픔이 왔습니까? 복을 주셔야 마땅하고 좋은 일만 있어야 할 텐데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던 것입니까? 왜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인이 형통하며 활개를 치고 다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물어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 안 하셨습니까? 그런데 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도 병도 들고 고난도 당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십자가에 죽지 않게 했다면 우리는 영영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으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썩고 냄새난 나사로를 살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믿게 하셨습니다.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믿는 사람들을 얕보고 멸시한 사람들에게 믿은 사람을 축복하여 “누가 이 사람들을 멸시했느냐,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을 보아라”고 높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낙심과 좌절과 원망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참고 기다리며 묵묵히 믿음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자를 통해서 축복의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셔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는 주님이 사랑하는 자였고, 나사로의 가정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가정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믿는 사람은 지금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40절에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후에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지 아니했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가 아니라 지금 살아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떠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까? “믿으면....”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묻혔고, 시체가 썩어 악취가 나고 있습니다. 장사 지낸지 사흘도 지났고 나흘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리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언제 죽었느냐? 썩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안 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죽은 지 사흘 된 사람은 살리고 나흘 된 사람은 못 살리는 분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20장에서 아람군대들은 시온 산 싸움에서 패하고 이스라엘 하나님은 산(山)의 신이기 때문에 평지에서는 도울 능력이 없다고 상상하여 두 번째는 들판에서 싸웠는데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들판에서도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느냐 못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본다고 했습니다. 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넌 사람이 “내가 아이를 업고도 건널 수 있음을 믿느냐”고 묻자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곁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업혀 달라고 하니까 “내 아이는 안 된다”고 기겁을 하더랍니다. 기적의 산출은 말로 믿거나 이론 적으로 믿는 믿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돌은 불신앙을 상징합니다. 현실의 믿음 앞에 돌이 박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곧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에 오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이 사건이 의도하는 목적과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고 믿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일 일어날 기적에 목숨 걸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막연히 그럴 것이라는 희망과 상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지금 믿으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지금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만한 자가 겸손해지고, 거역하는 자가 순종하고, 근심 걱정이 물러가고, 억압된 자가 자유 함을 얻어 사는 기분과 인생의 맛이 달라집니다. 식습관까지 달라집니다. 표현력도 달라지고 생활태도와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내면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육이 죽고 영이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배로 동인 채고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44절) 나사로의 죽음은 육으로는 죽고 예수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습니다.(요12:11절)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사로가 아닙니다. 나사로 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날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복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육신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의 평안이니라”(롬8:5-6절)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육은 죽고 영이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567건 24 페이지

검색

상단으로

엘림전원교회 |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문화로 274-30
비영리단체등록번호:411-82-73048 | 대표전화:010-6691-0071 | 이메일 davidjbk@gmail.com

Copyright © elimtown.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