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복을 받을 수 있는가?”(창9:18-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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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셈, 함, 야벳입니다. 그런데 노아와 세 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살았고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1. 실수한 노아
노아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할 정도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시대에 살았으나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6:9)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노아는 도도하게 흐르는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죄악의 물결을 거슬러 치고 올라간 보기 드문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신앙으로 참고 견디어 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등불은 어두울 때 더욱 빛을 내는 것이며 지팡이는 함한 산길을 오를 때 효능을 발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라고 했으니 참으로 귀한 신자요 하나님이 보실 때 별과 같이 빛나고, 보석같이 값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려울 때 더 빛을 발하고,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쓰임 받는 값진 일군들이 되십시다. 혼탁한 이 세대를 보면서 우리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사람 노아도 실수했습니다. 홍수사건 이후에 포도 농사를 지어 그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신앙을 잘 지켜 나갔던 노아도 실수 했습니다. 홍수 사건 이후에 포도 농사를 지어 그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신앙을 잘 지켜 나갔던 노아도 고난과 환난의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자 방심하고 부주의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순간적으로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섰다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고전10:12)
-. 그러면 노아는 무엇 때문에 실수 했습니까?
(1)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던 것이 실수 였습니다.
성경에 포도주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①십일조로 드렸습니다.(신12:17) ②손님을 접대할 때 썼습니다.(삿19:19) ③상처를 치료할 때 약품으로 썼습니다.(눅10:34)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포도주는 많이 마시고 취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시60:3절에 보면 포도주를 마시면 취하여 비틀거린다고 했습니다. 곧 자세가 흩어지고 정신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롬13:13, 엡5:18)고 했고 “술에 취한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5:11)고 경고했습니다. 창세기 1:1절부터 계시록 22:21절까지 성경 전체에서 술에 대한 내용이 119번이나 언급되어 있으며 “술 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10)고 강조하였습니다. 술에 취하면 신앙 감각, 생활의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어 정도(正道)를 걷지 못합니다. 말도 헛말을 하여 실수하게 되고 행동으로도 실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하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하여 어이없게도 수치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2) 노아는 또 방심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노아가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를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120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에도 어떤 유혹이 와도 절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이 끝나고 노아의 여덟 식구가 모두 구원받은 후에는 그 성취감에 도취되어 포도주의 유혹에 어이없이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심은 절대로 금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항상 큰일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방심을 조심해야 실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 될 때, 건강할 때, 물질이 있을 때, 남에게 인정받을 때 나태하지 말고 더욱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람은 누구나 완전한 의인이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①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놓고 군중들이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려 할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는 예수님의 말씀에 한 사람도 치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다 죄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죄도 있습니다.
②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은 아담도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범했습니다.
노아의 실수를 통하여 주는 분명한 교훈은 거룩한 사람도,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완벽할 수 없고, 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4:3절에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했고 롬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라고 다윗임금은 고백했던 것입니다.
혹 잘못된 삐딱한 교인은 노아도 실수했고 다윗도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자기의 죄를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그렇게 인용하고 합리화하면 그것은 더 큰 죄악입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누워있던 실수로 자식들에게 부끄럼을 당하고 둘째 아들 함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항상 깨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될 줄 믿습니다.
2. 저주 받은 함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하체를 보고 두 형제에게 마치 톱 뉴스거리인 양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9:22) 이러한 행동은 조심성이 없는 경거망동한 행위였습니다. 남의 허물도 감추어주어야 할 사람이 바로 자기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비웃으며 동네방네 다 들리게 소리치며 형과 동생에게 함께 구경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경거망동한 행동 때문에 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댓가는 저주였습니다. 사실인데도 경솔한 행동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데 함께 기도하며 협력하고 덮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사실 무근한 헛소문으로 남을 모함하고 넘어뜨리려 했다면 어떤 벌이 떨어지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눈도 두려운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는 앞에서 경거망동하면 안 됩니다.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혹 실수 한 점이 있을 때 자기 눈에 거슬린다고 수군거리고,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공개하고 비판하고, 조롱한다면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실리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허물을 덮어 줄줄 아는 사랑의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비웃은 함에게 주어진 심판은 무엇이었습니까? 역사 이후에 계속 저주의 골짜기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저주의 늪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함)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나이다”(9:25) 했습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가지고 있던 경박했던 죄악의 씨앗이 자손들에게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신앙이 자녀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축복받은 큰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
아버지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뒷걸음질해서 들어가 하체를 가려주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존경심과 겸손한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해 줄줄 알아야 하고 그 분께 순종하고 복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인들이 복 받는 비결은 웃어른들을 공경하고 교역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고 복종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자신에게 손해가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은 덮어주는 사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부끄러움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보지 못하도록 덮어주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그마한 남의 허물을 보면 험담하기를 좋아하고 비판하며 수군거리기를 좋아합니다. 있는 것만 가지고 그렇게 하면 또 모릅니다. 사실 무근한 것 가지고도 말을 만들며 부풀려서 실감나게 이야기 하면 정신없는 사람들은 한 술 더 떠서 그 이야기를 듣고 손뼉 치며 좋아합니다. 그것은 무슨 심보입니까? 교회에 그런 사람이 두 사람만 있어도 바람 잘날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은혜가 떠나가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는 풍토가 생겨서 오히려 찬바람이 돌고 서로 눈치 보느라고 아멘 소리도 못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4:8)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흠집 내려고 하지 말고 허물을 덮어 줄 줄 아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샘과 야벳이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준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한마디로 축복받았습니다.
①큰 아들 셈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셈족(유대)에서 나셨습니다.(요4:22, 마2:1) 또 가나안(함)은 셈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9:26)고 노아가 예언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셈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②셋째 아들 야벳은 물질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함)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7절) 했습니다. 야벳은 땅위에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야벳을 축복하시어 자손을 창대케 하고 그의 영토를 넓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벳의 자손들은 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서양인들이 창대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셈은 하늘 위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오게 하셨고, 그 자손을 통하여 교회가 계속 유지되게 하셨으며 제사직을 셈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별것 아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그 축복과 저주는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손만대 영항이 미침을 우리는 현실을 통하여 실감나게 느끼고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기는 커녕 부풀려 소문내거나 헛소문까지 퍼뜨려 동네방네 시끄럽게 한다면 그 죄가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셈과 야벳처럼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므로 자손만대 복을 받읍시다. 셈의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셈의 장막에 거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늘의 복(셈의 복)과 땅의 복(야벳의 복)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복 받게 행동하고, 복 받게 신앙생활을 하여 당대에도 복을 받고 후대에도 복을 받게 하는 그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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