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3:7-11절 )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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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불평과 불만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점점 더 심각할 정도로 부정적이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회로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불평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해당되는 특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頑固)해져서 감사를 모르고 항상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완고해 진다는 것은 마음이 굳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마음이 굳어져 강퍅하게 되고 그 마음에는 기쁨이나 감사 대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1. 불평하는 사람의 최대의 피해자는 누구입니까?
예를 들면 흙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할 때는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이 말라서 흙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을 때는 씨를 뿌려도 헛수고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의 말씀을 뿌려 주어도 오히려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여 마음에서 쓴 물만 올라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매사에 열정이 없고 모든 사람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다른 사람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 불평하게 만들고 결국 함께 불행의 동반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불평하는 사람의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제2의 피해자는 함께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빼앗고 남의 행복까지 망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친구도 없습니다. 친구가 있다면 불평꾼끼리 모이는 그들은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자신들의 감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떳떳치 못하고 남을 경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원망과 불평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원망과 불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히11:6)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일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민14:28)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원망과 입술의 불평을 버리고 오직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불평하는 영적인 병이 치료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7: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도 계속 그런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 됨에는 같은 믿음과 사랑이 있고 같은 소망이 있으며 함께 하는 희생과 수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분이신 하나님을 동일하게 섬기면서 하나이지 못하고 서로 반목한다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물인 기러기들도 V자 모양으로 떼를 지어 날아가기 때문에 70%정도를 더 날 수 있다고 합니다. 뒤에 있는 기러기들은 소리를 내어 앞의 기러기들을 독려하며 힘을 돋구어 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만리장천도 멀다하지 않고 날아간다는데 하물며 천성을 향해가는 성도들이 서로 독려하지 못한다면 어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 되었습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니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함이 너무 좋았습니다. 장력의 실험에서 보면 5×10cm 나무 기둥은 275kg의 무게를 버틴답니다. 그러나 두 개의 5×10cm 나무 기둥은 826kg의 무게를 버리고 남는 답니다. 즉 2배의 힘이 아니라 3배 이상 버틸 힘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서로 힘을 보탠다는 것은 그만큼 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욱이 공동체가 하나가 될 때 어떤 위력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서로 함께 가야 합니다. 비전도 함께, 꿈도 함께, 헌신도 함께, 충성도 함께, 도전도 함께, 응답도 함께, 축복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아픔도 우리는 함께 해야 합니다. 너와 나 공동체가 함께 한다면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가 되려면 덕을 세우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푸른 초장에 황소 네 마리가 정답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풀을 뜯을 때도, 잘 때도 같이 지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맹수의 공격도 이겨낼 수 있었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들 주위에서 공격의 기회를 노리던 사자가 도저히 불가능하여 꾀를 썼습니다.
어느 날 무리에게서 조금 이탈한 황소에게 슬그머니 다가가서 “다른 황소들이 네 흉을 보더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때 그 황소는 표정이 확 변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한 마리 한 마리를 흩어놓은 다음에 그 사자는 한 마리씩 차례로 잡아먹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간질이 공동체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경우를 참 많이 겪습니다.
조직과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불신의 말입니다. 가정과 사회, 직장과 교회도 그렇습니다. 잘못 전하고, 잘못 알아들은 말 한마디 때문에 공동체가 어이 없이 무너지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긍정의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는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러시아의 속담에 “구설수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시 돋친 한마디가 상대의 가슴을 찌르기도 합니다. 교인들의 구설수 때문에 상처받는 목회자도 있고, 교회를 옮기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혀는 가장 무서운 살상 무기입니다. 쓴 말 한마디는 백 마디 위로의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무책임한 구설수가 한 인간을 매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사랑의 말을 아까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조직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좋은 말은 양약보다 낫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아껴야 합니다. 개구 신기산(開口 神氣散)이란 말도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쉽게 피곤이 찾아와 수명을 깎아 먹는다고 합니다. 말이 적은 사람이 장수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수도사, 목동, 청각장애인들이 대개 장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도 황소를 노리는 초원의 사자 같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언어를 퍼뜨려 조직을 붕괴시킵니다. 불신의 말을 차단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의 비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험당할 때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맙시다. 그들은 그 완고함 때문에 한사람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의 최고의 피해자는 바로 자기 자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가 되려면 덕을 세우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시다. 내가 변해야 모든 것이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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