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불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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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5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주에 못다본 중요한 부분을 보충하며 시작하겠습니다.
다같이 창세기 3장 22절에서 24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요즘 신천지가 생명나무를 과도하게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소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거짓 목사요, 생명나무는 진짜 목사라는 억지 해석을 주장하는데요, 이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고, 억지스러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생명나무는 문자적으로 단순명료하게 해석하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저주받은 상태이며, 생명나무를 먹게 되면 그 저주받은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즉 22절의 영생은 참다운 영생이 아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원 지옥 형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속죄함을 받은 사람만이 생명나무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4절에 생명나무를 사람들의 접근으로부터 막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문맥의 흐름 그대로 자연스럽게 해석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 앞서나아가 인간적인 의도를 첨가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여러 해석들을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 본문으로 돌아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첫번째 아들 가인과 둘째 아들 아벨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으로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한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하와는 인류 최초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는 장본인입니다.
산부인과도 없고, 조산원도 없으며, 심지어 먼저 출산을 경험해본 사람들도 주변에 없습니다.
그러한 극도의 긴장 속에서 하와는 아이를 생산하게 되니 그 아이의 이름을 가인, 즉 "소유" 라고 짓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이를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를 생산하게 되는데 아벨, "허무함" 이라고 이름합니다.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까요?
하와는 최초의 인간 아기인 가인을 낳고 무척 큰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죄지은 자신과 아담과는 달리 너무나 작고 사랑스럽고 순수한 모습에 감동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낳은 가인이 훌륭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에덴 동산으로 다시 복귀시켜 주실거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얼마 안가 무너졌을 것입니다.
자신들보다 더 괴퍅하고 고집쎄고 반항적인 아기의 모습에 질려버렸을 겁니다.
그래서 둘째 아벨을 낳고서 그저 허무하다고 이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를 하나님은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하나님께 정성껏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을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담당하였고, 아벨은 가축을 길러 입을 옷과 덮을 이불 및 천막을 담당하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인 농산물로 제사드렸고, 아벨은 어린 양으로 제사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제사물의 종류 때문에 가인의 제사는 거부당하고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물의 종류를 가릴 얕은 분이 아니실 뿐더러, 민수기 15:20 절에 곡식도 제사물에 해당됨을 보게됩니다.
가인의 제사가 거부당한 정확한 이유는 본문 4:7 에 나옵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구절은 평소 가인의 행실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자기 중심적인 삶의 소유자임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첫번째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의 거부를 통해 가인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이제 자기 중심적인 삶과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는 메세지였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기회에 대한 가인의 반응은 어떻했습니까?
4:5 에 가인은 분노하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첫번째 기회에 대한 명백한 거부였습니다.
그런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그것도 아우 아벨을 말입니다.
4:8 절은 가인의 살인이 용의주도하게 계산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두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은 이미 가인의 살인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아벨이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죄지은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과 상통합니다.
가인은 즉시 무릎꿇고 용서를 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두번째 기회마저 짓밟고 맙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와를 핑계됐지만, 가인은 인류 최초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아벨을 죽여 놓고 하나님께 아벨이 어디있는지 알지 못한다며, 자기가 아벨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오히려 하나님께 되묻는 적반하장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죄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떨어뜨립니다.
이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세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창 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실질적인 벌을 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 저곳 떠돌며 살다보면,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고, 그렇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게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회 앞에 무조건 감사하다고 넢죽 절해도 부족할 판에 가인은 또 토를 답니다.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자기의 죄의 벌이 너무 무겁다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가인은 살인자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자입니다.
그런 그가 뻔뻔하게도 자기의 벌이 너무 무겁다니 적반하장이 도를 넘어선지 오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많이 알려진 성경의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 아니 아벨은 이미 죽었으니 통틀어 세 명 뿐일진대, 어떻게 가인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구속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구원의 역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부분은 언급되지 않게 됩니다.
본문도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은 후 또 다른 여러 아들과 딸들을 출산하였을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35:19-21 에 히브리적 관습에서 볼 때, 자신의 혈족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경우 반드시 그 죽은 자의 일가 친척이 보복토록 규정하고 있는 고엘 제도처럼 가인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아벨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당할 것을 미리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또 기회를 주셔서 가인에게 특별한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조치하여 주셨습니다.
그런 가인이 이제는 회개하였을까요?
(창 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 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한 곳에 정착하여서는 아니되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녀야했습니다.
더군다나 한 곳에 머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척박하게 만드시니 뭘 심어도 농사가 안되어 다른 땅을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놋 땅에 아예 말뚝을 박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전과의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인류 최초의 도시를 건설하게 되며 이 도시의 이름은 자기 아들의 이름인, 에녹, 즉 "헌신" 이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농사외에 다른 산업으로 생계를 꾸리기 시작합니다.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약탈이라는 신종 사업으로 자신의 도시를 키워나갔습니다.
다른 부족들의 농산물을 약탈함으로 굳이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최초로 일부 다처제를 시행하였으며, 약탈을 통해 많은 식량과 가축들, 아녀자들을 강탈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4:23에 나옵니다.
그리하여 "부의 집중" 현상이 최초로 나타나게 되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4:17 의 에녹은 성이 아닌 도시 또는 타운으로 번역되어야 정확한 것입니다.
또한 라멕의 아들 딸들은 거대 자본을 통하여 각종 사업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야발은 축산업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음악 산업에, 두발가인은 제철산업의 창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라멕의 딸인 나아마는 아주 흥미로운데, "사랑스럽다" 라는 뜻입니다.
나아마는 인류 최초의 도시 여성으로서 땡볕에 농사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집중하여 아름다움의 가치를 끌어올려 재화의 한 종류로 자본화시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시화를 통해서 사람들은 더욱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되고 자신들의 생계유지에 "헌신" 즉 에녹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생계유지에 관한한 어떠한 윤리도 도덕도 법도 일번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도시라는 장을 통해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한 곳에 머물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가인의 불순종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가인은 끝까지 하나님의 기회를 짓밟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가인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 주신 셋이라는 아담의 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기서 우리가 혹시 착각할 수 있는 부분은 25절의 아담의 발언을 통해 볼 때, 셋의 이름을 아담이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히브리 본문을 직역하면, 하와가 이름을 지었다고 나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언급은 안되었을 지라도 이미 셋 이후에 여러 다른 아들 딸들이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 났을 것입니다.
다만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셋은 살해당한 아벨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긴 유일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의 자손들은 가인의 자손과는 달리(16-24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을 유지하였는데, 그 이유로 셋은 그의 자손들에게 아담과 하와를 통해 배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세히 가르침으로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라는 두 갈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죄로부터 시작하여 죄로 마무리되는 가인의 인생이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셋의 후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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