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우물
페이지 정보
본문
창세기 26장
구약성경을 알아가는 기쁨 중 하나는
처음 본문을 읽었을 때 나의 짐작과 약간의 상상으로 그려졌던 첫 인상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얼마다 다른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또한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창세기 26장의 사건이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전의 것이나 이후의 것이냐 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만약 본문이 에서와 야곱 출생 이전의 사건이라면 이전 25장에서 언급된 그들의 출생 기록보다 더 앞에 위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기록물들을 짜깁기한 것일 수 있다는 추측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깊이 본문을 들여본다면 이러한 오해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풀어지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 25장의 사건은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발생한 역사에 해당합니다.
아브라함을 이어 두번째 족장이 된 이삭이 하나님과 약속을 맺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인간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특징을 네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1) 편법이 아닌 정도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던 중 그랄이라는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르게되었습니다.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시고 다시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이삭은 흉년에 찌든 불모지 가나안 땅 브엘세바로 돌아가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해 두해 그랄땅에 머물다보니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의 미모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도 이집트에서 똑같은 문제를 겪었습니다. 20 장에서는 본문의 장소인 그랄 땅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둘러대는 편법으로 모면하려고 했습니다.
한번도 아닌 두번에 걸친 아브라함의 사례를 통해 좀 달라질 줄 알았건만, 그의 아들 이삭도 똑같이 편법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죄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둘 다 "이쁜 아내" 를 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엘림전원교회 남자 성도님들도 모두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외모만 보고 신부를 고르신 것 같은데 더욱 신중하게 오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만, 그 미인을 계속 옆에 두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그러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이 두려움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편법을 낳게하였습니다.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다행히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위기가 기회가 되어 그랄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이삭에게 신앙은 "편법" 이 아닌 "정도" 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2) "복" 이 아니라 "약속"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의 축복과 자손의 번영, 한마디로 "복" 주시겠다는 약속은 이삭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평균보다 백배라는 소출은 대박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합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의 문제가 해결되고 대박 풍년까지 맞아 자신이 복받은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이삭은 여전히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질 않고 그랄땅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복" 을 얻었다면 그 "복" 은 오래가지 않아 그 "복" 때문에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14-15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그랄 땅의 팔레스타인들이 무력으로 이삭의 우물을 막고 자기들의 땅에서 이삭을 추방하였습니다.
"복" 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복" 이 있다가 없으면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확실히 믿음 밖의 사람들보다 더 복을 받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 이라고 다 같은 복이 아닙니다.
약속안의 복이 진짜 복입니다.
약속이 없는 복은 본문의 이삭처럼 반드시 어떤 이유로든 오래가질 못 합니다.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땅의 축복과 자손의 번영이 약속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삭은 약속의 결과인 "복" 보다 약속의 과정인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3) 타협이 아니라 결단으로
이정도 배웠으면 뭔가 깨달았아야 할텐데 우리의 이삭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질 않고 찔금찔금 북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위의 본문에 세 우물들이 등장합니다.
우물을 판다는 것이 오늘날에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특히 당시 이스라엘 근동의 우물을 판다는 것은 오늘날 대규모 간척사업과 비슷한 국가적 사업이었습니다.
그런 우물을 세번이나 팠던 것입니다. 더욱 억울한 것은 그 중 하나도 자기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빼았긴 것입니다.
"삽질" 이라고 헛수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유래가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바로 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다 거기가 더 좋을 듯 해서 우물을 파고 그러다 빼앗기기를 세번이나 반복하였으니 이삭의 불신앙도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본문에 보면 첫번째와 두번째 우물은 다툼을 일으켰지만 세번째 우물은 다툼이 없었습니다.
우물을 놓고 다투던 팔레스타인들마저 이삭의 고집에 두 손든 것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우물은 하나님을 막아버리셨습니다.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래서 이삭은 마침내 브엘세바,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도착했던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길고긴 여정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랄에서 이 곳으로 왔다면 세번의 우물 공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고집 센 이삭도 대단하지만, 역시 하나님은 결코 포기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하지만, 자기 고집이 살아 있어서 참 힘들게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삭은 쉽고 짧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을 길고 어렵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타협이 아니라 결단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4) 조급 이 아니라 인내로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역시 약속의 땅 브엘세바에 돌아오니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시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동일한 언약을 이삭과 맺으셨습니다.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에 용기를 얻은 이삭은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야 제대로된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힘차게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영적으로 충만해진데다 그간 세번의 우물 공사 노하우까지 더하니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파면 판데로 나오던 우물이 이제는 나올 기미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이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업친데 덮친다고 팔레스타인의 왕 아비멜렉이 그랄땅에서부터 이 곳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럴려고 하나님은 나를 그랄 땅에서 이 곳 브엘세바까지 끌고 오신건가?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의 문제의 핵심은 우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물을 수십 수백개 판들 또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빼앗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이삭과 평화 조약을 맺게 하셨습니다.
이삭 자신은 몰랐던 문제의 핵심을 하나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악재도 한꺼번에 호재도 한꺼번에 오듯이 평화조약 체결 다음날 기쁜 소식이 왔습니다.
마침내 우물이 터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생활을 시작하면 약속해주신 복이 금방 올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 보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핵심 문제를 이끌어내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잠시 왔다 사라지는 "가짜 복" 이 아니라 "진짜 복, 언약의 복" 을 주십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는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5) 결론: 예수 그리스도 - 언약의 우물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행하고 이루는 것이아니라 내가 어디에 거하느냐 에서 출발합니다.
내 몸이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전의 세 우물의 이름은 "에섹:다툼, 싯나:반목, 르호봇:넓은 곳" 이라고 지었습니다.
앞의 세 우물은 자신의 입장와 상황을 따온 것이라면 브엘세바 언약의 우물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삭의 몸은 진작에 브엘세바로 왔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이삭의 마음이 브엘세바에 도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생각과 고집이 살고 있는 곳에서 얼마 안가 없어질 우물을 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우물을 파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안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딱 한 우물만 팝시다. 이 곳 저 곳 파제쳐봐야 얼마안가 빼앗기든지 말라 없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우물만 파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