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아들과 자유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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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 장 1 - 12 절
갈라디아서 4장 21 - 31 절
강해설교를 하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 제가 말하고 싶은 주제를 원하는 때에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주제를 너무나 간절히 말하고 싶었었고 오래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한을 풀 차례입니다.
본문에 두 가지 아들이 나옵니다.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주인 사라의 아들 이삭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감안할 때, 본문의 사건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식도 아들인데, 사라야 그렇다치더라도 어찌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치게 하셨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정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3절 이후에 하갈과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는 자비를 베푸신 것을 보게됩니다.
이를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거스를 만큼 종의 아들과 주인의 아들은 공생할 수 없이 분리되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과 율법은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피가 섞이지않고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의 순수한 혈통인 이삭만이 유일한 상속자이듯,
복음 또한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도록 그 순수성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메세지입니다.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위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 행동이 아닌 마음으로 기준을 삼으라!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
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이
사야서 58장)"
본문은 진정한 금식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금식을 며칠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맞는 것인가에대한 논쟁으로 정작 금식의 참 의미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본절의 멍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지나친 금식을 규칙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음이요,
손가락질은 이러한 금식 규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함이며,
허망한 말은 겉으로는 금식으로 곧 금방 굶어 죽을 거 같이 보이려는 과장을 뜻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없애고, 배고파서 먹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돕는 것이 진정한 금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절의 멍에과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가 핵심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하는 교만이 최우선
일 때 나타납니다.
2)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보이라!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태복
음 9:14)'"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은 개인적인 영역과 집단적이 영역이 있습니다.
이 둘다 모두 중요하며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는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기도 등, 집단의 영성에 지나치게 치우쳐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게 가장 간절하게 부르짖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예배나 기도회의 기도는 절대로 하나님과 일대일의 기도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기도할 환경이 안된다고 생각하십니꺼?
그렇다면 환경을 바꿀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과거에 비해서 너무나 많이 바빠직 빨라진 오늘날, 기존의 예배나 기도회 같은 모임기도에 자신의 영성을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위한 창조적인 노력을 하십시오.
일정한 시간대에 핸드폰이나 티브이를 끈다거나, 직장이나 일터에 자신만의 기도 공간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드리지 마라고 없앤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드리고 싶은 분들은 근처 교회에 가셔서 드리면 됩니다.
우리는 자유의 자녀들입니다. 자유하십시오.
그렇지만 새벽기도보다 더 권하는 것은 아침 식사 전 가정예배입니다.
가정예배를 격식 갖추어 길게하려고 하니 어렵습니다.
그냥 찬송가 한장 부르고 성구 한절 읽고 함께 기도하면 됩니다.
이 짧은 시간이 여러분의 가정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는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3) 규칙이 아닌 원칙을 지키라!
그러나 이 모든 것마저도 규칙을 삼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58장에서 보았듯이 우리 인간들은 멍에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도 지키게 만들려는 본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은 대부분 오래되고 효율성이 떨어진 것들이 많지만, 동시에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하는 이점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대게 강제력이 발생하고 억압과 책벌이 등장하며, 비교와 비난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본문 갈라디아서 4:29에서 박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복음 9:17)."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알아가고 배워가야 하는 분입니다.
그 분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배웠다고 할만큼 제한적인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날마다 배워가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규칙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고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완벽한 규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규칙 대신 원칙을 지킵시다!
규칙은 생각하지 않아도 하던대로만 하면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한번은 생각해 봐야 제대로 지킬 수 있습니다.
규칙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에 원리를 타협합니다.
그러나 원칙은 원리를 지키기위해 안전을 희생합니다.
죽음도 못가둔 예수님은 결코 규칙에 묶여 있을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규칙이 아닌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4) 의무가 아닌 자유로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
음이라 하였으니(갈라디아서 4:27)."
본문은 규칙에 얽매인 사람들이 자유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아니,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다수의 흐름을 쫓는 인간의 의존적인 본성때문에, 규칙에 얽매이기보다 자유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특히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각종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는 이 때에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 정말 주저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D.N.A. 차원에서 아니, 영적인 차원에서 종의 자녀가 아닌 자유자의 자녀들입니다.
주변의 많은 종의 자녀들처럼 종노릇하면 안됩니다.
때론 외롭고 힘들더라도 자유자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자유자의 자녀로서 댓가라면, 외로움과 핍박을 달게 각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엘림전원교회 성도들은 자유의 자녀들입니다.
이제부터 율법에서 나오는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부터 나오는 열심으로 하나님을 알아갑시다.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아니, 솔직히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옳은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들이
오히려 나와 하나님을 가로막는 율법의 멍에요, 손가락질이요, 허망한 말이었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새로운 은혜의 포도주에 걸맞는 새 가죽부대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미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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